[박명기의 밑줄긋기 51]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박명기 기자
  • 입력 2019.10.16 10:40
  • 수정 2019.10.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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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을 안내하는 주황 리본 / 사진=박명기
서울둘레길을 안내하는 주황 리본 / 사진=박명기

가을비가 낙엽 위로 똑똑 떨어졌다. 도토리와 밤 몇 톨 떨어진 길 위에서 기분까지 촉촉했다. 10월 초인데도 아직 가을이 안 오셨다.

2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돌아오자마자 매주 서울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14일 새해 벽두에 8코스를 완주했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둘레길을 걸었다. 동행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홀로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이맘 때 <박명기의 밑줄긋기> 연재를 시작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지인의 좋은 뜻을 지지하기 위해 자그만 힘을 보태고 싶었다.

이 나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은 북한산 코스에서 낙엽을 밟고 주우며 시작하기로 했다. 내 인생의 필름을 되돌려보니, 나이 ‘쉰’ 이후 전환점은 단연 산티아고 순례길과 북한산 둘레길 완주였다.

내 칼럼 50회를 자축하는 기념으로 북한산 둘레길 첫 완주 기록을 복기해본다. 단번에 스윽 훑어보기에는 아까운 내 생의 뿌듯하고 의미 있는 리스트다. 이모작 인생들에게 내 걷기의 시간을 바친다.

 

8코스 소나무숲길 구간 / 사진=박명기
8코스 소나무숲길 구간 / 사진=박명기

■ 2018년 1월 13일 서울둘레길 8코스 157km 완주!

2018년 1월 13일은 내 생애에서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날이었다. 드디어 서울둘레길 전체 8코스 157km를 완주한 날이었다. 유시유종(有始有終),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나는 3코스 종점 수서역에서 나홀로 ‘완주’를 자축했다.

서울둘레길은 솔직히 싱거웠다. 2년 전 다녀온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비하면 밋밋하고 소소했다. 하나가 대하소설이라면 다른 하나는 단편소설 같은 느낌이었다.

그 이유가 있다. 서울둘레길에는 점점 멀어지는 지평선과 광활한 밀밭이 없다. 호젓한 올리브밭과 끝없이 이어지는 탐스러운 포도밭이 없다. 사람을 압도하는 풍경과 아름다운 마을과 장엄한 성당도 없다.

 

안양천변의 억새밭 / 사진=박명기
안양천변의 억새밭 / 사진=박명기

그래도 길은 길이다. 서울에도 다양한 마을과 역사와 스토리가 있고, 고개와 돌무더기와 굽어볼 풍경이 담겨 있는 길이 있었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의 행정구역 경계와 나란히 걷는다. 모두 경기도다. 구리, 하남, 위례, 성남, 과천, 안양, 고양, 의정부와 서울이 얼마나 가까운지 실감난다.

젊은 시절부터 한라, 설악, 지리, 오대, 대덕, 백두 등 한반도 산이란 산은 모두 돌아본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쉰’ 무렵 길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산은 정상을 향하는 수직이다. 이와 달리 길은 수평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힘이 들면 그대로 내려와 버스를 타면 된다.

걸으면서 조금씩 알게 된 사실은 ‘길’ 자체의 평안함이었다. 길은 수직의 욕망을 수평으로 다스려주었다. 위에서 저 아래를 굽어보는 욕망을 줄여주고, 명상과 사색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었다. 걷는 속도에는 고독과 발견, 해찰이 스며들었다.

 

북한산에서 본 은평구 전경 / 사진=박명기
북한산에서 본 은평구 전경 / 사진=박명기

■ 내 몸 내비게이션으로 들어온 서울둘레길, 전체 8코스 중 5코스는 ‘나홀로’

“어린이의 세계는 걸어서 갔다 돌아오는 거리”라고 하던가.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은 둘레길을 걷기 전에는 어린이 세계에 불과했다. 완주 이후 비로소 서울의 전체 맵이 내 몸 내비게이션으로 들어왔다.

2014년 개통한 서울둘레길은 전체 8코스로 총 157km이다. 숲길 85㎞-하천길 32㎞-마을길 40㎞로 짧으면 12.6km, 긴 곳은 34.5㎞이다.

서울둘레길은 6코스를 빼면 산 무릎을 둘러간다. 서울 산은 늠름하고 잘 생겼다. 도봉, 백운, 청계, 수락, 관악, 대모 등 오를 때마다 수려한 경치에 절로 경탄이 쏟아진다.

2코스 용마 아차산에서는 망우리 공동묘지-고구려 유적을 만났다. 7코스 봉산-앵봉산에서는 월드컵공원 메타세쿼이아길이 호젓했다. 8코스 북한산 둘레에 있는 평창동을 지나다 보면 서울에도 LA 비버리힐스와 같은 부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34.5㎞ 거리의 8코스 북한산 둘레길은 하루에 주파할 수 없는 코스이다. 이곳에서 마주치는 하늘전망대, 구름정원길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에서 해찰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전체 8코스 중 5코스는 나홀로였다. 6코스는 아내랑 걸었다. 아쉬운 건 산도 없고 재미있는 길도 없이 지루한 안양천변이었다. 우리 부부가 신혼 시절 보낸 시흥동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5코스를 걸었을 걸!

 

관악산 삼성산 천주교 성지 / 사진=박명기
관악산 삼성산 천주교 성지 / 사진=박명기

5코스 사당-석수 구간에는 관악산 도란도란 길이 있다. 그 길에서는 절로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신혼 시절 옛집이 간절히 그리워서 다시 아내랑 함께 5코스를 다시 걸었다.

낙성대-서울대 입구를 지나 호압사 아래 내 이름으로 문패를 달았던 지붕이 평평한 그 집은 그대로였다. 문 앞 라일락 화단은 사라졌다, 나팔꽃이 올라가는 실그물도 없었다. 그래도 20여년 받은 편지를 전달해주는 새 주인은 있었다. 아, 추억에 잠겨 사물이 아니라 기억도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벌써 2년이 됐다. 지금도 나는 꿈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도 한다. 그리고 10월 들어 세 번째 돌고 있는 서울둘레길도 꿈에 나타난다.

나에게 작은 목표가 있다. 서울둘레길뿐 아니라 지리산둘레길, 다섯 코스만 걸었던 제주 올레길을 모두 돌고 싶다는 것. 그리고 내년 봄 한 달동안 휴가를 내어 800km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싶다.

 

월드컵공원 메타세쿼이아길 / 사진=박명기
월드컵공원 메타세쿼이아길 / 사진=박명기

먼 길이나 가까운 길이나 음악은 친구가 된다. 산티아고의 가는 길에서 들었던 조용필의 ‘걷고 싶다’, 서울둘레길을 동반한 강산에의 ‘천천히 걷는다’, 제주 올레길의 친구였던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노래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외친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걸을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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