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29] 텃밭도 싫어요

오은주 기자
  • 입력 2019.11.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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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br>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br>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br>'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br>소설집 [달의 이빨] <br>[하루 이야기]<br>[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br>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br>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br>​​​​​​​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영순씨는 올해 초에 남편을 졸랐다.

“여보, 양평 쪽에 여러 가구가 몇 이랑씩 텃밭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집단 텃밭이 있대요. 요즘 그런데 얻으려면 경쟁이 심해서 빨리 가서 신청해야 돼요. 올해 봄부터 채소를 심으려면 지금 현장을 확인하고 두 세 이랑 정도는 재배한다고 계약을 해야 돼요.”

그런데도 공무원으로 퇴직한 남편 민국씨는 영 심드렁했다.

“당신 정년퇴직하면 나랑 여행 다니고 텃밭 가꿀 시간이 난다는 기대에 남들이 싫다는 남편의 퇴직도 난 괜찮던데, 내 손으로 가꾼 싱싱한 상추쌈 먹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런 영순씨의 간절한 바람으로 텃밭을 빌려서 올봄부터 농사를 시작했고, 철 맞춰서 남들이 심는 푸성귀와 가지, 고추, 호박 등을 심고, 신선한 수확물이 봄부터 가을까지 식탁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도 지난 봄부터 이제 배추농사를 끝으로 올해텃밭농사를 마감하는 시간이오도록 민국씨는 그저 영순씨가 원하는 날에 운전이나 착실히 해줄 뿐 전혀 달가워하지를 않았다.

영순씨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중학교까지 농사를 짓는 시골집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그 근처 읍내에서 자취를 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민국씨가 농사 같지도 않은 텃밭 푸성귀 키우는 일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관심도 없다니.

한 해 텃밭농사 대장정의 끝인 배추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인 11월에는 뽑고 내년 봄을 기약하면서 땅을 갈아두어야 한다. 영순씨는 정성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튼실하게 잘 자라준 20여 포기의 푸른 배추를 보자 자못 마음이 뿌듯했다. 그 배추로 담그는 올해 김장은 얼마나 맛있을까!

배추를 차 트렁크에 가득히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민국씨는 운전대에서 전방을 주시하며 영순씨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나 내년엔 저 텃밭농사 짓기 싫은데……”

“왜요? 뭐가 힘들었어요? 당신 올해도 운전만 했지 일은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나 당신도 알다시피 저 남쪽 끝 시골 출신이잖아. 준비물 살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 문 앞에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서있던 날도 있었어. 고등학교는 내가 중학교 때 산에 가서 나무를 져 와서 판 돈을 근근이 모아 읍내 고등학교로 혼자서 간 거야. 그 시절 내 책상에 ‘시골 탈출’이라는 종이를 써 붙이고 악착같이 공부를 한 거야. 시골 탈출은 곧 가난 탈출을 말하는 거였지. 그래서 4년 동안 장학금을 준다는 대학에 다행히 갈 수가 있었어. 그리고 막연히 동경하던 공무원이 된 거야.”

긴 결혼생활 동안 그 정도의 객관적인 사실은 영순씨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아픔이 깊이 박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난 농사짓기 싫어서 악착같이 공부한 사람이야. 난 농사 말고 넥타이 매고 책상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려고 공부한 거야. 나보고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농사 비슷한 거라도 지으라고 하지 마. 난 앞으로 아픈 기억이 없는 시간을 살고 싶어. 손바닥만한 텃밭도 싫어. 어릴 때 내 옷에 배어있던 그 구리한 퇴비냄새가 다시 훅 올라오는 것 같아.”

영순씨는 비장하게 들리는 민국씨의 말을 들으며 살짝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그러나 텃밭을 통해 서서히 민국씨를 ‘땅사랑’으로 이끌어서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진정한 탈출을 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마음 한 켠에 타올랐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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