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⑮] 뜰이 있는 풍경

김경 기자
  • 입력 2020.05.06 12:07
  • 수정 2021.01.1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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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몇 해 전, 우리는 용마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남편이 친구들과 산에 오르면서 인연을 맺고, 나는 또 그 인연에 푹 빠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낯선 곳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친숙함에 사로잡혔다. 역시 기대한 만큼 충족한 나날…… 산은 거실이나 서재, 주방 등 집 어디에서도 사시사철 한 결 같이 나를 반겨준다.

연둣빛 신록에 눈이 부시는 한적한 오후다. 나는 아낌없이 쏟아내는 산의 정기에 한 차례 목욕을 한다. 그 동안 빌딩숲 속에서 부대껴온, 켜켜이 쌓인 도심의 피로를 나름대로 씻겨내는 참이다. 그런데 한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만다. 뜻밖에 한 생각이 섬광처럼 번뜩 스친다. 새로운 꿈이다. 산동네라면 무조건 좋다던 생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땅을 꿈꾼다. 산을 얻은 데에 만족하지 못하고 뜰이 있는 주택을 꿈꾼다.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요즈음, 나는 걸핏하면 그 꿈속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한없이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풍경의 파노라마……. 꿈을 꾸는 매순간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랄까. 그렇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요,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이제 나는 오롯이 그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 작은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길면서도 짧고 좁으면서도 넓은 뜰이 있는 고즈넉한 풍경. 한 뼘의 뜰이 있는 옛집이 선명한 영상으로 펼쳐진다. 내 유년과 성년의 한때가 고스란히 담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아버지의 온기가 서려 있는 곳에 시나브로 내 모습이 부각된다. 나는 어머니요, 아내이기 전에 행복한 딸이었다. 아버지, 소리를 감추고 가만히 불러본다.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을 울린다. 내 새로운 꿈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싹이 텄다.

엊그제, 성북동에 자리한 최순우 옛집을 다녀왔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새록새록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들처럼 고대광실이나 넓은 후원은 아니지만 나는 내 나름의 좁은 뜰에 가지가지 산나무들과 조촐한 들꽃들을 가꾸면서 호젓하고도 스산한 산거의 멋을 즐겼고 남의 기름진 뜰이 부러운 줄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나에게는 이 산나무들과 들꽃들이 지닌 미덕이 그리도 컸다고 할 만하다.’

최순우 선생이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중에서 한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읊조리면서 서성거리다가 사랑방 문 앞에 걸린 현판,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과 마주했다. 나도 언젠가는 문을 닫고 깊은 산중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내 기억 속 첫 뜰의 풍경은 초등학교 3학년 봄에 막을 내린 ‘ㄱ’자 집의 뜰이다. 필경 어린 눈에 확대되어 담겨졌을 확률이 높을지라도, 집에 비해 대지가 꽤 넓었다. 그 중에서도 대문과 중문 사이에 자리한 텃밭은 순전히 아버지의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퇴근 후는 물론, 출근 전에도 텃밭을 가꾸었다. 고랑과 두둑으로 잘 정비된 텃밭은 아기자기한 얘기꽃을 풍성하게 피웠다. 토란과 옥수수는 넓은 잎과 큰 키로 좌중을 압도하고, 가느다란 오이 줄기는 지주를 타고 간신히 기를 폈다. 들깨, 상치, 쑥갓, 아욱, 가지들은 끼리끼리 모여 알콩달콩 수다를 떨었다. 무법자인 호박은 제멋대로 혼자서 종횡무진 뻗어나갔다. 담벼락에 바투 붙은 황매는 찬란한 황금색 꽃을 무더기로 뽐내고, 튼실한 감나무는 담 너머 바깥 세상에 더 열을 올렸다.

나는 일곱 형제 중에서 유난히 아버지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래서인지 텃밭 풍경 속의 등장인물은 늘 아버지와 나뿐이다. 아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 증후군으로 조작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구순한 형제들의 표정이 오락가락한다.

앞뜰에는 주로 나무와 화초들이 놀이판을 벌였다. 역사를 등에 업은 감나무와 무화과의 고풍스러움에 치자는 강렬한 향기를 내뿜고 동백은 농염한 색을 과시했다. 다사롭고 정겨운 쪽은 누가 뭐래도 화초가 으뜸이었다. 중문 입구에서부터 돋아난 채송화는 댓돌 사이사이를 깜찍하게 파고들고, 금송화, 백일홍, 해바라기, 봉숭아 들은 다소곳한 모습으로 상큼하면서도 수줍은 미소를 날렸다.

대학 시절의 집은 당시 유행하던 조촐한 양옥이었다. 손바닥만 한 앞뒤 뜰도 아버지에겐 벌판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식물 나라의 주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담장에서는 만발한 능소화 불꽃이 타오르고, 현관문 옆에서는 팔손이가 손님을 맞이했다. 거실 커튼을 젖히고 두 계단만 내려서면 한 사람이 뒹굴기에 맞춤한 잔디밭이 푸르렀다. 아버지와 동향인 잔디에서는 은근히 섬진강의 여운이 맴돌았다. 잔디밭에 뿌리 내린 섬잣나무, 장미, 산다화는 아버지보다 여낙낙한 어머니의 손길을 더 좋아했다. 잔디밭 너머 연못에는 항상 통통한 부레옥잠이 부유했다. 번식력이 강한 부레옥잠은 어지간한 수족관보다 좁은 물속에서 비만 오면 몸살을 앓았다. 그때마다 연못 좌우 보초병인 꽝꽝나무도 덩달아 온몸을 비틀어댔다. 뭐니 뭐니 해도 앞뜰의 정점은 단연 매화였다. 우리 가족은 고고한 매화 향기와 더불어 기지개를 켜며 아침을 맞았다. 매화꽃잎이 한 장 한 장 스러지고 나면, 앞집과 경계를 나눈 담장에 더덕더덕 더덕 잎이 달라붙었다. 그 풋풋하고 싱그러운 향기라니. 매화를 깜박하기에 충분히 사랑스러운 식물이었다. 그리고 아, 내 방 창문을 두드리던 댓잎소리……. 나란히 선 동백이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댓잎은 모르쇠로 밤새 잎을 비비댔다.

뜰에 담긴 모든 풍경은 아버지의 붓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버지의 숨결이 빚어낸 사랑의 결실이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까봐 조바심을 한다. 나의 꿈, 아버지의 숨결……. 언제쯤이나 나는 꿈을 이루려나. 아니 나는 벌써 꿈을 이룬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숨결이 밴, 뜰이 있는 집에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가슴속에 아버지의 숨결이 배어 있는 것을.

베란다 유리문 너머 산이 보이고, 산 너머 구름발치가 눈에 들어온다. 문득 뜰이 있는 내 마음의 집에 아버지를 초대하고 싶어진다. 아버지가 손수 덖은 찻잎을 떠올리며 녹차를 대접하면 어떨까. 그 시절, 분에서 꽃 피운 하얀 문주란과 주홍 군자란도 아버지의 숨결이었다고 말해야지. 아버지의 손길이 그립다. 나는 다기를 꺼내 놓고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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