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43] 점심밥, 졸업합니다

오은주 기자
  • 입력 2020.06.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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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2019년 조연현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숙씨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의 스케줄을 주욱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오전 9시인 지금 집을 나가면 곧장 요즘 다니는 스포츠센터로 가서 요가수업을 한 시간 받고, 약간의 근력운동을 하고, 사우나에서 30분 정도 땀을 뺀 뒤, 그곳의 지인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찬거리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온다. 코로나 사태로 비록 마스크를 쓰고 회원들 간 멀리 떨어져서 하는 요가시간이지만, 휴장 후에 재개된 수업이라 그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예상 시간은 오후 5시이다. 오늘은 정말 무난하고, 힘들지 않고, 그런대로 활기에 찬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요가복을 챙겨서 막 거실로 나온 남숙씨는 거실에 앉아 아직도 아침신문을 읽고 있는 남편 경호씨를 발견했다. 아차차… 남편의 점심! 물어봐서 점심약속이 없다고 하면 뭐라도 준비를 해놓아야 하는데…

“당신,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요?”

매일 아침 대답을 기다리는 이 순간에는 알지 못할 고도의 긴장감이 돌았다. 전날 저녁에 미리 물어봐도 되는데, 요즘은 휴대폰이 있어선지, 남편 경호씨의 친구들이 다들 퇴직하고 시간이 많아선지, 번개일정도 많은 터라 미리 물어보는 게 은근히 외출을 종용하는 것 같아 무심한척 일과를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 남숙씨는 왠지 퇴직 전까지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 집밥을 먹을 권리를 최소한이나마 지켜주고 싶어서 선뜻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숨겨진 속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경호씨가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당구 치러가는 날이잖아. 점심 걱정은 말아요.”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당구장에서 먹는 자장면이라니 오늘 그거 먹으면 좋겠네요.”

남숙씨는 마치 선심을 쓰고 격려를 하는 듯한 자신의 말투가 본심을 숨긴 연극적이란 느낌 때문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경호씨는 할 얘기가 있다며 잠깐 앉으라고 했다.

“벌써 내가 퇴직한지 3년이나 됐네. 당신도 이제 60줄에 들어서고, 내가 남들처럼 편의점이나 치킨집도 안 차리고 주로 집에만 있으니 당신도 내 모습 보는 게 지겹고 밥공양도 힘든지 잘 알아. 근데 나는 회사일 할 때의 여독이 덜 빠졌는지 집에서 이렇게 신문이나 책을 읽고 집근처를 산책하는 일과가 아직은 전혀 지겹거나 답답하지 않아. 내가 당신이 여행을 떠났을 때 몇 번 직접 해보니까 진짜 부엌일이란 게 수공업의 끝판왕이더라구.”

남숙씨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경호씨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태도의 변화를 선서했다.

“당장 내일부터 내가 혼자서 먹든 약속을 만들어서 친구와 먹든, 점심밥은 스스로 해결할 테니까 아예 걱정을 말아요. 당신이 내 점심밥에 신경 쓰느라 뭔가 하루의 중도가 불편하다는 게 싫어. 당신도 내 밥 챙길 만큼 챙겼어. 정말이야. 주말이야 애들도 집에 올 때도 있고 하니까 계획대로 안 되겠지만, 적어도 주중 점심에는 각자 자유롭게, 정말 자유롭게 먹고 지냅시다!”

게다가 실질적인 예를 들어가며 아주 못을 박았다.

“내가 집에서 점심을 먹는 중에 당신이 들어온대도 따로 먹읍시다.”

그걸 말하는 경호씨나 듣는 남숙씨 모두 활짝 웃었다. 남편 경호씨가 봉을 한번 휘익 돌리면 오랜 소망을 단번에 들어주는 요술방망이를 가지고 휘두르는 듯 했다. 남숙씨는 집을 나서면서 이제부터 전개되는 새로운 생활패턴이 가져올 신바람에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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