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⑫] 칭다오(靑島)의 눈물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8.06 16:21
  • 수정 2021.04.10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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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靑島)의 눈물

“길 위에는,
직업도 없고, 귀천도 없다
길 위에서,
나는 항상 자유로웠다.”
- <고산자> 박범신 원작

(아득한 바다, 설레는 꿈. 촬영=윤재훈)
(아득한 바다, 설레는 꿈. 촬영=윤재훈)

나는 지금 열하(황해)를 건너는 비행기 안에 있다. 그 옛날 사람들은 이 험난한 바닷길을 돛단배나 노 젓은 배에 의존해서 건넜을 것이다. 일기예보도 없는 이 먼 길을 오직 바닷길에 이골이 난 뱃사공에 의지해서, 자연의 순리인 바람을 따라 끝도 모를 길을 나섰으리라. 그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했을 순간, 나는 편안하게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만에 산둥반도의 남쪽, ‘중국 속의 유럽, 청도’에 도착했다.

6년 만에 오는 중국, 공항에서 내리자 모든 것이 얼떨떨하다. 모두 트렁크를 찾아 떠났는데 롤러가 서도록 내 트렁크만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사무실에 가서 공안에게 물어보니 다시 롤러가 돌고 이내 내 트렁크만 썰렁하게 나온다. 홀로 장기 베낭여행을 떠나온 내 모습과 닮았다.

출구로 나왔지만 버스 타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마침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가씨에게 물으니 운 좋게도 조선족 아가씨다. 엄마랑 함께 누군가를 마중 나온 것 같은 순박한 17세 소녀는 친절하게 나를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안내해 준다. 3, 40여분 동안 손님을 기다리던 버스는 드디어 출발한다.

버스에서는 여전히 6년 전 열차로 중국을 횡단할 때처럼 큰 소리로 전화를 받고 강한 액센트를 집어넣어 하는 말소리들로 소란하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이런 풍경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이 나라의 다른 문화이니 즐겁게 체험하자. 특히나 중국어는 4성의 악센트가 있어 더 시끄러운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말이 올라가야 할 부분이 있으니.

친근해 보이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아가씨에게 숙소의 위치를 물으니 휴대폰으로 정성스럽게 찾아보고, 한글과 중국어를 변형해 가며 기어코 찾아갈 수 있게 해주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이전 여행에서도 자주 느꼈던 것이지만, 중국에서 길을 모르면 아가씨들에게 물어보면 정말 친절하게 알려준다. 나는 지난 여행에서 눈물 나도록 친절한 아가씨들을 여러 명 만났다.

(칭다오의 동백. 촬영=윤재훈)
(칭다오의 동백. 촬영=윤재훈)

문명이 더딜수록 사람들이 친절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심성은 더욱 급해지는 모양이다. 손 안에 스마트폰이 생긴 뒤로 현대인은 더욱 바빠졌다. 나만의 세상에 빠져 있으면 굳이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아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따라 더불어 사는 친근함은 더욱 요원해지고, ‘히꼬 꼬모리’나 싸이코 같은 정신질환자들은 더욱 많아지는 추세이다. 철면피(鐵面皮) 같은 극악한 범죄가 서슴치 않고 일어나며, 도덕 불감증의 사람들까지 생겨나는 무서운 세계이다.

아이들은 이제 태어나면서 휴대폰을 만지고 사니, 기성세대들의 왜곡된 영상물에 그대로 노출되어 산다. 마음대로 성인물을 접근하고 불안정하게 배운 성인식은, 성(性)을 물질을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여 아무 죄의식 없이 착취하려 한다. 특히 그 중심에는 뒤틀린 성인들이 있다.

어디를 가나 청춘들은 잠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같이 앉아 있지만 각기 딴 세상에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생각들을 하며, 몸만 같은 장소에 있는 셈이다. 잘 쓰면 생활에 편리한 도구가 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단절은 갈수록 가속화 되고 있다.

갈수록 핵가족이 늘어나고 거기에 홀로족이 600만 가구에 육박한다고 한다. 마지막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로서, SNS에 대한 나름의 대책이 진즉부터 필요한 시기이다.

(이 바다를 쭉 가면 고국이 나올 것이다. 촬영=윤재훈)
(이 바다를 쭉 가면 고국이 나올 것이다. 촬영=윤재훈)

스마트 폰을 시작한 뒤로 눈이 가장 혹사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눈동자를 한 곳에만 집중하고 깜박이지도 않은 채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으니, 몸은 굳어지고 안구건조증에 취약해 진다. 자신도 모르게 거북목이 되어가며, 계속해서 잘못된 자세로 앉아 있으면 척추 측만증까지 온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난다.

우리의 생활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오다 보니 ‘전자파’는 잊혀진 이야기처럼 되어가지만, 그 피해는 아주 심각하다. 다만 재벌들의 횡포 아래 잠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편리함에 익숙해지다 보면 우리는 금방 그 폐해를 잊어버린다. 그런 문명의 이기(?)는 항상 두 개의 가면을 준비한다.

특히 해외여행 할 때는 아주 요긴하게 쓴다. 자료를 찾거나 외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 나라 언어를 다 해석해 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장소를 찾고 예약을 할 때도 편리하다. 몸에서 최소 1m 이상 떼어놓은 그 방법 외에 어떤 대안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문득 ‘그리움이 없어져 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편지를 보내놓고 몇날며칠을 기다리던 그런 안타까움은 이제 먼 나라 유물이 되어 버렸다.
집에 돌아오면 맨 먼저 우체통을 열어보고, 텅 빈 우체통 앞에서 실망하던 그런 일은 이제 없다.
청소년들은 그런 시대가 아예, 있었던 줄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면 정신과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조심스러워 진다. 낯선 이국땅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오직 혼자서만 모든 것을 다 해쳐나가야 하니 말이다.

“고국에서도 이렇게 ‘나를 내려놓은 하심(下心)의 마음’으로 살면, 다툴 일도, 답답할 일도 없겠다.”

(쑨원(손문)의 호를 딴 중산로에 1891년 개원한 반점이 고풍하다. 촬영=윤재훈 )
(쑨원(손문)의 호를 딴 중산로에 1891년 개원한 반점이 고풍하다. 촬영=윤재훈 )

공항에서 칭다오의 중심지인 '중산로'까지는 30여 분쯤 걸린다. '중산(中山)'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이며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쑨원(손문)의 이명이며, 1911년 중국의 4대고도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성공시킨 혁명가이다. ‘민족, 민권, 민생’를 모토로 하는 삼민주의를 주창하여 공산당에게도 추앙받은 인물이며, 장제스로 이어져 대만을 건국한 중국 국민당도 만들었다.

그는 1912년 임시 대총통이 되어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정하고,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삼았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임시정부 앞에는 아직 굳건한 청나라가 있었고, 그것을 무너뜨리기에는 그들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그래서 청나라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에게 청을 설득하여 퇴위를 시키면, 그에게 대통령 지위를 양보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가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고, 1912년 멸망하게 된다.

수많은 직위를 오르내리며 거대한 대륙에서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가던 그의 노정이 보이는 듯하다. 또한 쑨원은 우리의 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 창립에도 커다란 일조를 하였다. 그 공로로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 받았다.

중산로에서 버스를 바꿔 타고 10여분 지나니 바다가 보이고 중국에 온 실감이 난다. 6인실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나니 안심이 된다. 발아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은 낮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 혼자뿐이고, 휴게 공간은 넓다. 파도에 반짝거리는 은빛 물결이 장관이다.

아내가 새벽에 싸준 김밥과 삶은 계란을 먹는다. 시금치 때문인지 약간 시큼한 맛이 나지만 정성이 뜨겁게 새록새록 하다., 저녁까지는 해결할 수 있겠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36, 5키로의 눈부신 바닷길, 그 길을 따라 산보 나온 많은 현지인들이 보인다.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잠시 고국에 대한 생각을 놓고, 이곳에 집중하리라.

(간판도, 현수막도, 버스정류장도, 식당의 메뉴도 다 한국말이다. 촬영=윤재훈)
(간판도, 현수막도, 버스정류장도, 식당의 메뉴도 다 한국말이다. 촬영=윤재훈)

이번이 두 번째 나오는 세계여행길이다.

첫 여행에서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단둥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우리 동포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로 올 수 있는 최단 거리다. 낯 설은 이국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그들의 내밀한 삶의 모습이 궁금했다.

단군의 역사가 물처럼 흘러가는 그 땅에서, 해동성국 발해를 세웠던 대조영과,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말발굽소리가 아직 깃들여 있을 것 같은 압록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그리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제의 극악한 탄압과 궁핍에 견디나 못해 중국으로 시베리아로 국경을 넘었을, 동포들의 곡진한 아픔들이 궁금했다.

<단동 새벽시장>, 따뜻한 해장국에 언 몸을 녹이며 생계를 이어가던 동포들, 압록강가에 나갔다 우연히 만났던 초등학교 여교사와 엔지니어와 시간을 보내고,
자잘한 수풀에 둘러싸여 이제는 현지인들이 앉아 담배를 피우다, 성터에 꽁초나 부비고 가는 장소로 전락해버린 찬란했던 고구려의 성터, <지안>,
온 시내의 간판들이나 나풀거리는 현수막, 심지어 버스정류장의 표시, 음식점의 메뉴까지 다 우리 국어로 되어있던 조선족의 고향 <연변>,
마을길에서 만나 동포는 기어코 명동학교와 윤동주 시비까지 나를 안내해 주고, 자기 집으로 끌고 가더니 뜨거운 밥과 반찬을 해주었다.

부인은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갔으며, 약간의 중풍기가 있는 어머니는 거동조차 힘들었다. 자신도 위장이 안 좋다고 하면서 힘없는 표정을 짓는다. 5학년짜리 딸이 하나 있는데, 연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공부를 잘한다고 한다. 그의 따뜻한 마음에 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엌과 방이 함께 있고, 그 옛날 우리의 시골집에 있었던 농과 찻장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촬영=윤재훈)
(부엌과 방이 함께 있고, 그 옛날 우리의 시골집에 있었던 농과 찻장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촬영=윤재훈)

해란강에 윤동주의 시가 강물처럼 흘러 다니던 그리운 <용정>, 일송정 가의 푸른 소나무.
리 국토의 끝단, 민족의 성산 백두산, 그 아래 이도백하 마을.
심야버스를 타고 도착한 <심양>, 버스 안에서 만난 동포들과 이국에서 말이 통하고 그들을 따라 들어간 사우나에서 함께 자고.
동포들의 시장 낯익은 글씨와 간판들. 그렇게 우리와 같은 성씨를 가진 피붙이들의 흔적을 찾아 옛 만주 땅을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수많은 동포들을 만났다. 그들과 맺은 인연들은 두고두고 나에게 소중하게 남아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며, 조금이나마 동포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여행사에서 한 달짜리 사업용 비자를 끊어주었다. 여행용 비자는 3개월인데, 나는 그만 들 뜬 마음에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당겨 베이징에서 몽골 울란바토르로 가는 국제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일정은 [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⑪] ‘베이징에서 울란바토르까지, 국경열차를 타고’에 잘 정리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석탄도시 다퉁의 ‘원강석굴 대불’. 촬영=윤재훈)
(세계문화유산인 석탄도시 다퉁의 ‘원강석굴 대불’. 촬영=윤재훈)

몽골에서 내려오면서 ‘다퉁’을 들렸다.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둔황의 막고굴과 뤄양의 룽먼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 중의 하나인 <윈강(원강) 석굴>이 있다. 그곳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10미터도 더 넘을 것 같은 대불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절벽에는 암굴들이 산재해 있다. 거대한 붓다들 앞에 서면 저절로 묵언(黙言)이 되었다.

다시 돌아온 중국의 성도 <베이징>, 이제 나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로질러 실크로드를 따라 횡단할 것이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바라볼수록 정이 드는 옛 도시, <핑야오 고성(古城)>, 동주와 후한 그리고 육조시대 등 13개 왕조의 도읍지이며 룽먼석굴로 유명한, <뤄양(낙양洛陽)>,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황조(皇朝)의 수도였으며 진시황릉의 수호병마들이 즐비한 <시안(長安장안)>, 시성(詩聖) 두보의 고향 <청두>에 끝없이 펼쳐지던 대나무밭.

꽃잎 한 장 떨어져도 봄이 가는데
모진 바람에 꽃잎 흩날리니 서러운 인사여
지는 꽃 탐하는 것도 잠깐 사이려니
서럽다 하여 어찌 술 마시길 꺼릴 소냐…,
- 두보의 ‘곡강(曲江)’ 중에서

그곳에서 하룻밤 동안 야간버스로 달려 도착한 석림의 고향 <쿤밍>.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국경도시, 나는 거대한 대륙의 끝에서 작은 다리를 건넜다. 이른 아침 다리 위에는 ‘농라(삿갓)’를 쓰고 양쪽에 바나나를 가득 담은 채 바구니를 흔들거리며 달려오거나, ‘아오자이’을 입고 맘껏 몸의 곡선을 뽐내며 자전거를 타고 오던 여성들을 보았다.

검문소에서 그동안 아끼며 요행히 간수하던 등산용 칼을 빼앗겼다. 비행기나 기차를 타는 것도 아닌데, 국경을 넘기만 하면 집집마다 그 보다 더 큰 칼들도 많을 텐데, 왜 압수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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