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56] 노모 속의 젊은 엄마

오은주 기자
  • 입력 2021.04.0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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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2019년 조연현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저기다, 이제 다 왔다. 용인의 한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정미씨는 숲속의 통나무집 앞에다 차를 세웠다. 통나무집 문 앞에서 87세의 노모가 합죽이 웃으며 정미씨를 반가이 맞아준다. 언니가 세 자매와 친정어머니가 1박2일 동안 숲속 통나무집에서 먹을 음식을 그야말로 바라바리 준비해가지고 왔다. 지금 정미씨의 나이 55세, 언니는 두 살 위고 동생 은미는 53살로 두 살 아래이다. 세 자매가 모두 50대로 갱년기를 겪을 나이인데 엄마가 계시니 그 앞에서는 내색을 못하고 그냥 ‘젊은것’이 되는 묘한 경험을 하고 있다. 쪼글쪼글한 엄마의 얼굴에 비하면 한참 젊기는 하지만 사회에서야 완전히 아줌마인데, 자매들만 모이면 엄마는 딸들을 젊은것들이라고 표현해서 강제로 다시 어린 딸들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세 자매가 한 자리에 모이면 자랄 때 이야기가 넘쳐나고, 자연히 엄마는 자신이 등장하는 추억 앞에서는 기억을 소환하며 즐거워했다.

정미씨의 엄마는 그 시대에 딸만 셋을 낳아 시댁에서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지금 엄마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바껴서 요즘은 딸만 셋인 나를 다들 부러워들 해. 나도 이런 시절이 올 줄 몰랐지 뭐냐. 사위들도 다 좋아서 나는 열 아들 가진 사람들 이제는 하나도 안 부럽다”

그렇게 사위들을 친아들마냥 여기는 엄마가 얼마 전에 특이한 부탁을 해왔다. “나, 니네들하고만 여행 가보고 싶다.” 정미씨 세 자매하고만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정미씨는 갸우뚱했다. 맏사위는 듬직하다고, 둘째 사위는 싹싹하다고, 막내사위는 바라만 봐도 좋다고 하던 엄마가 왜 딸들하고만 여행을 가자고 하시는지. 암을 앓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병수발에 지쳤다가 이제 몇 년이 흐르니까 아버지의 존재가 그리워서 그러신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 이상한 게 아버지의 자리가 그리울수록 남자인 사위들하고 같이 여행을 가야지 왜 딸들하고만 가자고 부탁 아닌 부탁까지 했을까.

엄마의 부탁을 받은 언니는 엄마가 옛날에 자랐던 시골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자연 속에 지어진 휴양림 속 통나무집을 예약했다. 언니가 준비해온 고기와 해산물로 이른 저녁부터 바비큐를 해먹으며 마신 맥주 탓인지 자못 거나해진 세 자매는 ‘과수원길’이란 노래까지 합창으로 불렀다. 그때였다. 엄마가 박수를 치며 활짝 웃음을 터뜨린 것은! 게다가 숲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신 엄마는 기분이 좋은지, 바비큐의 불꽃 탓인지 얼굴이 달뜨고 한결 젊어보였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위들도 다 좋아하고 같이 여행가면 즐겁지만 요즘은 왠지 내 딸들하고만 같이 있고 싶었어. 너네들이 이렇게 같이 노래를 하니까 내가 젊었을 때 두 칸짜리 집에서 올망졸망한 세 딸들 키우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구나, 담에 또 오자 응?”

정미씨는 그때사 엄마의 깊은 마음을 알아챘다. 엄마는 오롯이 자기 자식들하고만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젊은 시절과 같은 풍경 속으로 되돌아가고픈 모양이었다. 90세를 앞두고 언제까지 맑은 정신으로 자식들과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초조함도 있는 것 같았다. 정미씨는 이렇게 노래 부르는 어린 딸로 계속 남아 있게 앞으로도 길게 더 살아달라고 엄마의 손을 지긋이 잡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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