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코로나 ‘정상회복’은 ‘인간회복’으로부터
[정해용의 以目視目] 코로나 ‘정상회복’은 ‘인간회복’으로부터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9.1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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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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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공자의 제자 자공이 초나라에 갔다가 진(晉)나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수 남쪽쯤을 지나는데 한 촌로가 바지런히 들일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노인은 밭에 물을 주기 위해 깊은 우물로 내려가 항아리로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물을 나르지만 그 일을 언제 다할까 싶다. 자공이 보다 못해 말을 건다.

“어르신. 그렇게 해서 언제 물을 다 주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두레박에 수차(水車) 같은 기계를 써서 물을 쉽게 길어 올리는데, 노인께서는 왜 그런 기계를 쓰지 않으시는지요?”

노인이 우물로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무엇으로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자공이 대답한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기물이지요. 뒤는 가볍고 앞은 무거워 손쉽게 물을 퍼 올릴 수 있습니다. 물이 끓어오르듯 빠르게 퍼 올리는 고(槹)라고 하는 기계인데 모르시는지요?”

노인은 잠시 흥분한 듯 하다가 표정을 가라앉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우리 스승에게 듣기로,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기계를 쓰게 되면 반드시 기계에 마음을 쓰게 되고, 기계에 마음을 빼앗기면 순박함을 잃게 되며, 순박함을 잃으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해져 그 마음에 도가 깃들 곳이 없게 된다 하더군요. 나는 기계의 편리함을 알지 못해서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 쓰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말을 꺼낸 자공은 문득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자>의 천지 편에 나오는 글이다. 

비유법을 좋아하는 장자의 말이니 실화인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하다. 사람이 편리함을 추구하게 되면 점점 더 편리를 추구하게 되고, 편리를 제공하는 기계나 시스템을 애지중지하게 된다. 또 그것들을 구입하고 유지하기 위해 쓰는 비용이 늘어나니 점점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돈이나 기계를 위해 살게 된다. 거기에 과연 인간다움이나 도(道)를 따를 여지가 있을까.

예전보다 분명히 풍요로워지고, 일인당 국민소득만 보더라도 벌써 10배, 50배는 늘어났는데, 어째서 행복감은 더 높아지지 않을까. 벗들과, 형제들과, 더 잘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오히려 줄어들며, 부모님을 잘 모실 여유 또한 늘지 않는 것일까.

사람이 기계를 만들 때는 노동의 수고와 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인간다운 여유가 생길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만큼 더 일을 해야 하고, 더 좋은 차, 더 빠른 수단을 구하기 위해 경쟁하느라 행복을 잃어버린다. 운 좋게도 좋은 차를 타면서 그만큼 드라이브를 즐길 여유까지 얻는 사람은 있더라도 극소수다. 대다수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고 그러느라 가족 간의 거리가 오히려 멀어졌다. 가난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누릴 수 있던 행복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자동화와 기계화는 산업화 이후 시대의 산물이다. 처음에는 편리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점차 부작용도 커졌다. 기계를 구입하고 유지하느라 아무리 돈을 벌어도 돈의 여유를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 가족을 돌볼 여유가 사라졌다.

자동화 기계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소외를 부추긴다.

디지털 세계와 쉽게 친화되는 젊은이들은 기계를 붙들고 노느라 친구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단편적으로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노년세대는 생활이 점점 불편해지며 어쩔 수 없이 소외되어간다. 은행을 이용할 때,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기계와 친숙해지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이룰 수가 없다. 인터넷으로 해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권리를 한번 취득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관문은 왜 이리도 복잡하며, 외워둬야 할 비밀번호는 왜 이리도 복잡하고 많은지. 점차 한 가지씩 포기하면서 저절로 소외되어 가는 것이 정해진 이치인 듯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제목처럼, 사회는 노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기계를 이용해 효율을 높이는 것만 생각했지, 그것이 가져올 마음의 각박함이나 인간 소외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맹목적으로 기계화 시대를 개발해온 세대가 이제 노년이 되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격이다. 그렇다고 기계화 자동화 시대에 잘 적응하는 젊은 세대의 삶에 나름의 행복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주변에 활기 넘치는 젊은이가 얼마나 보이던가. 마음이 각박해질 것을 우려해 편리한 기계를 멀리한다는 저 옛날 노인의 심려가 새삼 교훈이 된다.

코로나19를 통해 인간소외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제 ‘정상사회’로 돌아가려 한다면 인간소외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인간의 삶이 먼저 회복되지 않고는 ‘정상회복’이라는 말을 차마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그럴 능력은 둘째 치고, 우선 그럴 의지는 분명히 있는 것일까. 이게 먼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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