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18] 가면성 우울증

오은주 기자
  • 입력 2019.08.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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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민자씨는 그날 밤, 집의 식탁에서 술에 취해서 엎드려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는데 민자씨는 집에 식구들이 아무도 안 온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부모님을 뵈러 고향으로 갔고, 하나뿐인 딸은 그 좋다는 S전자에 다니는 재원이라 회사가 있는 수원에서 원룸에 살며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딸은 보통 토요일 오후에 집에 잠깐 들르곤 했는데 그날따라 오후에 서울 사무실로 외근을 나온 김에 바로 퇴근을 해서 연락도 없이 집에 온 참이었다.

민자씨의 딸 소민씨는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식탁 위에는 위스키와 물병, 빈 잔이 어지러웠다. 자신이 집에 들어섰는데도 모르고 엄마가 정신을 거의 잃다시피 한 상태로 식탁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엄마, 엄마! 이게 무슨 일이야?”

고개를 든 민자씨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눈은 충혈 되고 머리카락은 엉클어졌지만 다행히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울 딸 왔네? 이 시간에 웬일로 집에 왔니? 엄마가 오늘 술 좀 마셨어.”

“왜 엄마, 오늘 가게에 무슨 진상 손님이 있었어?”

민자씨는 10여 년 전에 남편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후유증으로 뇌졸증 증상을 얻으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게 되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벽들과 마주쳤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던 딸 소민이를 보며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 민자씨는 가장 자신이 있는 메뉴로 작은 밥집을 차렸다. 잔치국수, 김밥, 비빔밥 3가지의 단출한 메뉴지만 인근 직장인들이 솜씨를 인정해준 덕분에 빨리 자리를 잡았다.

이젠 종업원 2명을 둘 정도로 밥집은 커졌고, 대학을 졸업한 딸 소민이도 좋은 회사에 취직했고 노후생활을 위한 연금도 충분히 들어줄 정도는 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말과 보행이 불편한 상태라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민자씨는 40대 중반에 장사를 시작해 50대 중반이 된 이즈음 무언지 모르게 억울한 심정이 가득 찼다.

“소민아! 엄마가 요즘 너무 가슴이 울렁거리고 기분을 종잡을 수 없어서 동네 신경정신과에 갔더니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하더라.”

가면성 우울증? 소민씨는 굳이 설명을 안 해도 그 단어만 들어도 증상을 알 것 같았다. 지난 10년 동안 엄마가 살아온 시간의 단층을 헤쳐 본다면 그런 증상이 생길 만도 했다.

봉급쟁이 부인으로 얌전한 전업주부였던 엄마가 갑자기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웃음과 친절을 보였겠는가 말이다. 건강하고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친구들이 골프가방을 메고 나갈 때 새벽바람에 싱싱한 재료를 구하러 가락시장으로 향하던 엄마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자기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는 떳떳함보다는 고달픈 신세를 탓하는 마음이 컸을 텐데 그것을 누르고 가장이 되어 가정을 꾸려나가는 괴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소민씨는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 실컷 울어요. 손님에게 친절하게 보이기 위한 웃음이 아니고, 쌓인 괴로움을 다 떨치는 울음이요. 누가 뭐래도 엄마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멋진 여성이에요! 그리고 이젠 좀 쉬어도 되구요. 한 한 달쯤 밥집 문 닫고 저랑 여행을 떠나요. 제가 회사에서 연차휴가 다 긁어모으면 2주쯤은 될 거에요.”

민자씨는 딸의 권유처럼 일단 휴식을 하며 멀리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로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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