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6] 기술관: 에디슨 vs 테슬라④...천재 '99%의 노력이냐, 99%의 발상이냐'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3.20 13:16
  • 수정 2023.03.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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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 고압 전류 손으로 만지고 번개, 지진, 안개까지 일으켜
테슬라의 독신 고수에 과학기술계 ‘제발 결혼을‘ 사설까지
노벨상 무산…‘공동수상 누가 거부했나’ 의견 분분

우아한 상류사회 ‘뉴욕400’의 회원이 되다

1889년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계약, 1891년 미국 시민권 획득,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박람회에서의 승리, 이듬해 나이아가라폭포에 수차설치 등, 테슬라는 명성을 떨치며 승승장구했다. 1897년 웨스팅하우스에 대한 특허권 사용 계약서를 찢어버린 뒤에도 10여년은 경제적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유럽 귀족사회를 연상시키는 1900년쯤 ‘뉴욕400’ 멤버들의 거실 모임. ‘사교계의 여왕’ 캐롤라인 애스터(가운데 서 있는 이)의 초대를 받는 것은 곧 뉴욕 주류사회의 편입을 의미했다. 퍼블릭도메인
유럽 귀족사회를 연상시키는 1900년쯤 ‘뉴욕400’ 멤버들의 거실 모임. ‘사교계의 여왕’ 캐롤라인 애스터(가운데 서 있는 이)의 초대를 받는 것은 곧 뉴욕 주류사회의 편입을 의미했다. 퍼블릭도메인

그는 당시 뉴욕 상류사회에서도 성공적인 주류사회(inner circle)의 사교클럽인 ‘뉴욕 400(포 헌드레드)’에도 받아들여졌다. 이 사교클럽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업가, 정치가, 전문직업인, 문화·연예인들 가운데서도 중요 회원들의 초대를 받은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었다. 일 인당 수천만 달러의 재산을 가진 초 상류사회의 가족들이 주도하는 이 그룹에는 당대의 3대 갑부 중 하나인 철도사업가 밴더빌트(George W. Vanderbilt), 부동산 갑부며 호텔사업가 애스터(Astor) 가문, 사업가며 자선가인 비숍(Heber Reginald Bishop)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기사 명단에서는 JP.모건의 딸 안네 모건도 포함되어 있다. 뒤에 인권운동가로도 활약한 안네 모건은 테슬라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영화 의 한 장면. 선객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제이콥 애스터(당시 47세)가 정장을 차려입고, 탈출하는 지인들과 작별하고 있다. 옆에는 또 다른 사업가 벤자민 구겐하임.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해 구명정을 양보하고 배에 남은 제이콥은 캐롤라인 애스터의 아들이자 ‘뉴욕 400’의 운영자였다. 그의 유산으로 하버드대학교에 도서관이 세워졌다. 영화장면 캡쳐
영화의 한 장면. 1912년 당시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 선객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제이콥 애스터(당시 47세)가 정장을 차려입고, 탈출하는 지인들과 작별하고 있다. 옆에는 또 다른 사업가 벤자민 구겐하임.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해 구명정을 양보하고 배에 남은 제이콥은 캐롤라인 애스터의 아들이자 ‘뉴욕 400’의 운영자였다. 그의 유산으로 하버드대학교에 도서관이 세워졌다. 영화장면 캡쳐

‘뉴욕 400’의 모임은 당대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던 캐롤라인 애스터가 주도했다. 그들은 무도회를 열거나 예술품의 경매행사 등을 열었다. 그때마다 기부금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이나, 도움이 필요한 해외구호 등의 자선사업에 힘썼다. 멤버들이 돈을 모으거나 혹은 개인 단독의 재력으로 병원과 학교를 짓기도 했다. 그들은 이것으로 남북전쟁 이후 새로 구축되는 미국사회의 새로운 질서에 모델을 삼고자 했다. 그들은 나름 유럽의 귀족사회와 같은 사회 주도층이면서 동시에 엘리트의 품위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공개되지 않은 초대 조건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미국 시민이 된 테슬라는 이런 클럽에 초대받아 당당히 주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에디슨이 주로 정치인(예컨대 현직 대통령들)이나 성공한 기업가들과 교류하며 사업적 영향력을 키우려 했던 교우방식과는 꽤 달라 보인다.

2백만 볼트 전류를 몸에 두른 ‘전기의 사나이’

테슬라는 자신의 발명품을 선보이는 이벤트를 종종 열었다. 이 파티에는 장차 투자자가 될 수도 있는 ‘뉴욕 400’의 멤버들도 간혹 초대되었다. 가장 열성적으로 참석한 사람은 당대 유명 작가인 마크 트웨인과 저널리스트 로버트 존슨 등 몇 사람이다. 마크 트웨인은 60대, 테슬라는 이제 40세 전후로 적지 않은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친구처럼 지냈다.

뉴욕 맨해튼 사우스5번가 33번지, 니콜라 테슬라의 놀이터이자 발명실험실인 테슬라연구소가 있는 곳이다. 1890년쯤일 것이다. 세상이 어두워진 자정에 맞춰 테슬라의 연구소에는 영국인 저널리스트 촌시 맥거번과 마크 트웨인, 영화배우 조셉 제퍼슨 등이 2층의 연구실로 들어섰다.

수백만 볼트의 전류를 이용하여 초고주파로 유도한 인공번개가 작렬하고 있는 테슬라의 연구실(실제 사진). 테슬라는 늦은 밤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이런 장면을 보여주곤 했는데, 간혹은 땅을 진동시켜 인공지진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웃들의 항의로 이런 실험이 불가능해진 무렵(1889년) 테슬라는 콜로라도 스프링필드에 독립적인 연구소를 마련했다. 퍼블릭도메인
수백만 볼트의 전류를 이용하여 초고주파로 유도한 인공번개가 작렬하고 있는 테슬라의 연구실(실제 사진). 테슬라는 늦은 밤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이런 장면을 보여주곤 했는데, 간혹은 땅을 진동시켜 인공지진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웃들의 항의로 이런 실험이 불가능해진 무렵(1889년) 테슬라는 콜로라도 스프링필드에 독립적인 연구소를 마련했다. 퍼블릭도메인

밤잠이 없는 테슬라는 대개 밤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곤 했는데, 특히 이날은 어둠 속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줄 참이었다. 방문객들이 매번 어떤 기대를 했는지는 맥거번 기자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테슬라의 연구실을 방문할 때는 먼저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사방이 이상한 기계들로 가득 찬 방 안을 상상해 보라. 거기에 키 크고 호리호리한 젊은 과학자가 나타나 손가락을 ‘툭’ 튕기면 갑자기 불덩어리 공(fire-ball, ‘미트볼’이 아니다)이 그의 손바닥 위에 생겨난다. 그는 그것을 손에 가만히 쥐고 있다가 자기 옷 위에 갖다 대기도 하고 방문자의 무릎 사이에 떨어뜨려 보기도 한다. 무엇이 타거나 누군가 화상을 입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불공을 나무 상자에 집어넣으면 이글거리는 불꽃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보는 사람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불공이 사라지고 방안이 캄캄해지자 테슬라는 말한다. 
“이제 대낮처럼 환한 빛을 만들어드려야겠네요.”

1894년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테슬라(뒤쪽)가 만들어낸 ‘불공’을 손에 쥐고 있는 마크 트웨인. 12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였다. 퍼블릭도메인
1894년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테슬라(뒤쪽)가 만들어낸 ‘불공’을 손에 쥐고 있는 마크 트웨인. 12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였다. 퍼블릭도메인

갑자기 연구실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찬다. 나름대로 지적 호기심이 많은 손님이지만, 그들은 이 빛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전등이 개발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테슬라가 빛을 밝힌 이 공간에는 전등이 하나도 없다. 어둡던 공간이 조명등 하나 없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것이다. 테슬라는 이 퍼포먼스를 유럽 순회강연 중에도 선보였다. ‘기이한 사람’ ‘금성에서 온 외계인’ 같은 별명과 추측이 그의 이름에 붙어 다닌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1894년 7월  신문 인터뷰기사에 게재된 아서 브리스번 작가의 테슬라 일러스트. 테슬라 코일에서 발생시킨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접촉하여 일으킨 코로나 방전으로, 무수한 전기불꽃이 테슬라를 감싸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퍼블릭 도메인
1894년 7월 신문 인터뷰기사에 게재된 아서 브리스번 작가의 테슬라 일러스트. 테슬라 코일에서 발생시킨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접촉하여 일으킨 코로나 방전으로, 무수한 전기불꽃이 테슬라를 감싸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다음에 테슬라는 전기가 흐르는 철판마루 위에 올라선다. 조금 전 이 실험판 위에서, 그는 단 1천 볼트의 전류로, 작은 실험동물이 감전되어 죽는 실험을 보여주었다. 전압은 1천 볼트에서 시작해 무려 2백만 볼트까지 올라갔다. 테슬라의 몸에 전류가 흘러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의 몸이 전기불꽃 가운데 서 있는 듯 선명한 실루엣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놀라서 멍하게 바라보는 맥거번을 향해 테슬라는 손을 내뻗는다. 손끝에서 번개광선처럼 플라즈마 불꽃이 피어나 온다. 테슬라가 마루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온 뒤에야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의 긴장을 눈치챈 테슬라는 웃으며 말했다.

“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놀이 같은 거죠.”

그리고 테슬라는 이 ‘고전압 놀이’의 원리를 손님들에게 귀띔한다. 전압이 높더라도 주파수가 아주 높으면 전류는 피부 바깥을 타고 흘러가기 때문에, 인체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실험이 아니었다. 물론 손님 중 자원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테슬라의 변압장비는 최대 1천만 볼트까지 구현했는데, 그의 사후 연구를 계승했던 제자 로버트 골나는 ‘프로젝트 테슬라’란 연구에서 2천2백만 볼트의 전압을 얻었다고 한다.

최초의 리모컨, 무선통신 등 전파의 원리에 통달

여기서 중요한 용어가 귀에 들어온다. ‘주파수’라는 말이다. 무선통신이나 리모컨 등에 익숙한 지금 사람들이야, 주파수는 매우 익숙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자기의 파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주파수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테슬라 한 사람뿐이었다.

물론 전파가 활용되기까지 브레멘의 호이겐스, 영국의 마이클 패러데이, 제임스 맥스웰, 독일의 하인리히 헤르츠 등 수많은 과학자의 발견과 연구가 이미 1백년 넘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을 마침내 실용화하는 단계에서 테슬라는 마치 뒤늦게 나타난 비밀의 열쇠지기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난제를 시원시원하게 열어젖혔다.

테슬라는 모든 전류에서 전파가 발생하며, 그 전파는 무한대까지 퍼져나가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일정한 신호를 보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지구는 거대한 자석이면서 또한 전기가 통하는 전도체로서 그 전파를 주고받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도 알았다.

1915년 전미 라디오엔지니어협회의 두 번째 연회에 참석 중인 테슬라(뒤쪽 서 있는 줄 오른쪽에서 7번째). 전파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당시 전기전자엔지니어협회의 라디오분과는 별도의 협회로 분리되었다. 퍼블릭도메인
1915년 전미 라디오엔지니어협회의 두 번째 연회에 참석 중인 테슬라(뒤쪽 서 있는 줄 오른쪽에서 7번째). 전파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당시 전기전자엔지니어협회의 라디오분과는 별도의 협회로 분리되었다. 퍼블릭도메인

오늘날 무선통신의 최초 발명자로 꼽히는 마르코니(이탈리아, 1896년)의 무선통신도 실은 테슬라의 결정적인 아이디어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테슬라가 독자적으로 무선전신의 이론을 완성한 것이 1893년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코니 이후 30여 년 사이에 (중파, 단파)라디오며 TV 같은 전파 미디어들도 생겨났다. 전파와 무선통신 분야에서 테슬라의 기여는 절대적이다.

무선 전신의 개발 과정에서 초기 개발자들은 전선 가닥 하나를 땅에 접속시키는 ‘접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전파가 공간을 날아가 상대 쪽에 연결된다는 개념만으로는 이 필요성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테슬라는 일찍이 지구의 표면이 전도체 역할을 하며 이 때문에 전파를 전달하는데 접지가 필요하다는 (단지 과전류의 방출이라는 목적뿐 아니라) 것을 밝히기도 했다. ‘지상파’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공공 성격의 방송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고 있으나, 본래 기술용어로서는 지표(땅)를 통해 전달되는 전파(ground wav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1898년에 테슬라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신기한 구경거리 하나를 대중 앞에 선보였다. 호수 위에 작은 모형보트를 띄워놓고, 혼자서 자유자재로 수면을 돌아다니는 무선 원격조종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그의 손에 조종간이 들려 있었지만, 전선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야 무선조종 보트나 자동차 같은 것들이 아주 흔한 장난감이지만, 1900년 이전의 대중에게 무선기술은 마법처럼 보였다. 전파를 이용한 무선조종 기술에서 후일 우리 일상에 아주 흔해진 적외선이나 전파 리모컨(RC)이 시작되었고, 21세기에는 블루투스라 불리는 무선기술로 발전되었다. 최초의 목격자들은 문화충격을 느꼈겠지만, 테슬라에게는 초보적인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가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개인용 기기 하나로 지구상 어디에 있든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게 될 것이라는 테슬라의 예언은 1백년이 지나 현실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류가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개인용 기기 하나로 지구상 어디에 있든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게 될 것이라는 테슬라의 예언은 1백년이 지나 현실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테슬라는 장차 사람들이 전파를 통하여 지구 어디에 있든 실시간으로 서로 호출하거나 정보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것도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기기 하나면 된다고 말했다. 1990년 무렵, 그러니까 테슬라의 예언으로부터 정확히 1백년이 지나서 사람들은 개인용 휴대폰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21세기에 와서는 개인의 모바일 장비로 무한대의 공동지식(메타데이터)에 접속하는 기술도 실현되었다. 그는 대체 얼마나 먼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일까.

자신이 개발하여 납품한 군사용 이동식 서치라이트를 확인하고 있는 노년의 에디슨(왼쪽)과 자신의 연구실에 특별히 제작 설치한 고주파, 고전압 발생장치(테슬라코일) 앞에서 생각에 잠긴 테슬라. 퍼블릭도메인
자신이 개발하여 납품한 군사용 이동식 서치라이트를 확인하고 있는 노년의 에디슨(왼쪽)과 자신의 연구실에 특별히 제작 설치한 고주파, 고전압 발생장치(테슬라코일) 앞에서 생각에 잠긴 테슬라. 퍼블릭도메인

날려버린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의 기회

테슬라가 만약 자기 기술마다 특허권을 가지고 일일이 사용료를 받기로 했다면, 그야말로 지구촌 최고의 부자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절차를 싫어하는 테슬라는 굳이 소송이나 이의 제기를 하지는 않고, 자기 기술이 여러 발명가나 사업가들에 의해 실용기술로 실현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기 기술이 인류의 행복을 위한 문명발전에 아무런 제약 없이 널리 활용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를 살리기 위하여 특허권사용료 계약서를 찢어버릴 때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뒤에 무선통신 기술의 특허권과 관련하여 마르코니와 테슬라가 미국법정에서 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에디슨은 이탈리아인인 마르코니를 간접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슬라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에디슨으로부터 효과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테슬라에 대한 에디슨의 견제는 집요하고 꾸준하게 이어졌던 것 같다. 10년 넘는 긴 싸움이 이어진 결과 1943년 미국연방대법원은 테슬라의 무선통신 특허가 앞선 것으로 인정된다고 최종 판결했다. 테슬라가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해였다. 어쩐 일인지 대부분의 교과서나 백과사전은 무선통신의 최초 발명자가 마르코니라는 기존의 내용을 바꾸는 데 게으름을 피웠다. 하지만 정확한 결론은 ‘테슬라가 발명자’라는 것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이 80회 생일에 부인 미나 밀러와 함께 축하케이크를 자르고 있다(1927). 이 생일 이후 에디슨은 노환상태로 들어가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퍼블릭 도메인
토머스 에디슨이 80회 생일에 부인 미나 밀러와 함께 축하케이크를 자르고 있다(1927). 이 생일 이후 에디슨은 노환상태로 들어가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퍼블릭 도메인

에디슨이 68세, 테슬라가 59세 되던 1915년 가을.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세상은 두 사람의 수상자격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달려간 <뉴욕타임스> 기자의 질문에 테슬라는 ‘에디슨은 열 개 이상의 노벨상을 받아도 되는 인물’이라며 공동수상을 수용할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에디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의 수상은 무산되고, 노벨상은 영국인 로런스 브래그 부자에게 돌아갔다. 이에 대해 노벨상위원회는 전통적인 규정에 따라 아무런 해명도 내놓지 않았지만, 뒷소문이 무성했다. 두 사람 중 한쪽이 공동수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에디슨이 먼저 거절했는지 테슬라가 먼저 거절했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앙숙관계의 두 사람이 노벨상조차도 ‘함께’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리라는 데 대해서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쯤 테슬라는 비축했던 돈이 다 떨어져 연구 활동은 물론 평생 지속해오던 호텔생활조차 외상에 의지하고 있을 때다. 만약 노벨상을 받았다면, 그 상금으로 경제적 고통도 상당히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정황으로 볼 때 테슬라가 경제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에디슨이, 먼저 수상을 거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했다. 에디슨의 집요한 앙심 때문이든, 테슬라의 강한 자존심 때문이든 둘 다 가능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에디슨의 사업가적 욕망과 집요한 독점욕은 이 밖에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예컨대 당시 뉴욕에서 영화산업을 독점하기 위하여 군소 영화제작자들을 괴롭히는 바람에 많은 제작자가 서부로 건너갔다. 그래서 오늘날 ‘할리우드’ 탄생의 비화는 ‘뤼미에르의 영화’ 편(20세기박물관 3 참조)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에디슨의 다양한 집요함 가운데서도 테슬라를 향한 견제는 특히 길었다. 반면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끝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일을 벌이는 데에만 골몰했다. 결혼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JP모건의 딸 안나 모건이나 매력적인 피아니스트 마거리트 메링톤 등 주위에 괜찮은 여성들이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그들과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되지 못했다. 테슬라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안나 모건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테슬라의 독신주의는 국내외 과학기술계의 관심사였다. 오죽하면 기술 전문지 <일렉트릭컬 리뷰>가 ‘이 뛰어난 과학자가 처해있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테슬라가 결혼하게 되면 과학계 전체는 물론 특히 그 스스로가 지금보다 훨씬 윤택해질 것이다’라고 결혼을 촉구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완벽할 수 없으면 하지 않는다’는 그의 사고방식은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확고부동했다. ‘연구와 가정생활을 동시에 잘 해낼 수는 없을 것이므로.’

천재들…99%의 노력이냐, 99%의 발상이냐

테슬라와 에디슨.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덧붙여야겠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은 다소 지나친 영웅심과 불도저 같은 성격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세계위인전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발명왕’이란 이름만큼 문명발전에 기여한 공이 지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발명품들이, 과연 ‘순수한 최초일까‘라는 시비는 자주 있다. 발명품 가운데 누군가 이미 개발을 시작한 것에 자기 아이디어를 얹어 완성하는 식의 ‘재개발 발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한 사람이 평생 1천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획득한다는 것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송화기와 수화기가 분리되지 않아 실용성 낮은 벨의 전화기를 개량하여 대중화에 성공한 전화기도 그렇고, 필라멘트가 빨리 타버려 대중화하기 힘들었던 백열전구에 진공기술을 접목한 발명이 그렇다. 이미 발명품이 있었더라도 에디슨의 기술이 접목되어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된 ‘재발명’의 공로는 절대 작지 않다. 축음기처럼 예전에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는 창의적 발명품들도 꽤 있었다.

에디슨이 발명하여 멘로파크에서 최초로 불을 밝힌 백열전구 1호. 에디슨박물관 소장. wiki=GDFL 공개사진
에디슨이 발명하여 멘로파크에서 최초로 불을 밝힌 백열전구 1호. 에디슨박물관 소장. wiki=GDFL 공개사진

백열전구를 개발할 때의 이야기다. 그가 진공의 전구 속에서 40시간 동안 끊어지지 않는 탄소 필라멘트를 완성하여 최종의 우승자, 즉 ‘전구 발명가’의 영예를 차지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그의 ‘우승’ 비결은 엄청나게 부지런한 ‘개미형’ 연구자라는 데 있었다. ‘이것은 어떨까’라고 영감이 떠오르면 그 즉시 실험했다. 시행착오를 불사한 수만 번의 시험 끝에 남보다 먼저 최선의 재료를 찾아낸 것이다.

에디슨이 남긴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탄생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 스타일에서 나온 말이다.

그에 비해 테슬라는 극단적으로 다른 스타일이었다. 영감이 떠오르면 머릿속에서 먼저 상세한 설계도를 구상한 뒤, 단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림과 함께 그 원리를 깔끔히 옮겨 적었다. 그것을 바로 시제품으로 만들어보면 거의 오차 없이 그가 예상한 대로 작동했다고 한다. 그런 테슬라에게 수없이 시행착오를 무릅쓰는 에디슨의 방식은 대단한 시간낭비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아야 한다면 에디슨은 아마도 꿀벌처럼 부지런히, 지푸라기를 하나하나 집어 올리면서 바늘을 찾을 때까지 조사를 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약간의 이론과 계산으로 추정하면 99%의 수고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 광경을 안쓰럽게 지켜볼 수밖에.’

테슬라의 말이다.  단 한 장의 종이에 완성도 높은 설계도를 그려내는 테슬라의 주변은 기본적으로 깔끔하고 단출했다. 연구실에 출근할 때도 정장을 차려입고, 깔끔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18장의 냅킨으로 자신의 접시와 포크, 식탁을 꼼꼼히 닦아내고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깔끔을 떠는 테슬라는 언제 먹고 언제 씻었는지 모른 채 수많은 파본 속에 묻혀 일하는 에디슨에 대해서는 ‘결혼이 필요한 타입’이라고 수긍했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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