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8] 문물관: 플라스틱 탄생...문명 주역 vs. 환경파괴 '두 얼굴'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5.15 13:39
  • 수정 2023.05.1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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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싸고 다루기 편리한 자연 대체재… 과다한 생산이 환경을 위협
1907년부터 의식주부터 레저 스포츠까지 곳곳에 스며들어 ‘필수 불가결’
2천년대 한해 수억 톤 생산, 태평양 거대 쓰레기 섬 떠다녀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9세기 말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천재가 태어났다. 20세기를 이전과는 다른 문명세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천재들을 많이 소개했지만, 벨기에가 낳은 ‘리오 헨드릭 베이클랜드’(1863-1944) 역시 20세기 문명을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천재 중 한 사람이다. 

벨기에 겐트에서 태어난 베이클랜드는 겐트시립 기술학교와 겐트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약관 21세 나이에 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6세(1889년)에는 모교의 화학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비교적 순탄하게 화학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베이클랜드는 이미 화학기술을 활용한 몇 가지 발명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사진을 안정적으로 프린트할 수 있는 인화지였다.

1907년 최초의 순수 인공 합성물질 ‘베이클라이트’를 발명한 레오 헨드릭 베이클랜드. 1924년에 그를 표지인물로 선정한 타임지는 ‘불에 타지도, 녹지도 않는다’는 제목으로 플라스틱을 소개했다. 공개도메인
1907년 최초의 순수 인공 합성물질 ‘베이클라이트’를 발명한 레오 헨드릭 베이클랜드. 1924년에 그를 표지인물로 선정한 타임지는 ‘불에 타지도, 녹지도 않는다’는 제목으로 플라스틱을 소개했다. 공개도메인

사진, 금속판에서 종이로 인화하다...‘벨록스’ 최초 인화지

사진 기술은 한 세기 이른 19세기의 기술로 이미 상당수의 모험가와 예술인, 부유층들이 ‘햇빛이 그린 그림’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중화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지는 못했다. 황동이나 철판으로 만든 카메라 장비들은 무거웠고, 그것을 필름에서 현상하고 유리판이나 금속판에 (아직은 종이가 아닌) 이미지를 새겨 정착시키는 암실작업 과정은 복잡했다. 그만큼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인화과정에서 사용되는 화학약품들은 독성까지 지니고 있어 사진은 아직 전문교육을 받은 사진사들만의 몫이기도 했다.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필름을 빛에 노출하는 시간이 몇 시간, 아무리 빨라도 8분 이상이 걸리던 때다.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가 값싸고 빠르고 대량 복제할 수 있는 사진판 개발에 뛰어들고 있었다. 젊은 베이클랜드도 화학적 처리를 통해 종이 위에 사진을 새길 수 있는 기술을 연구했고, 그 결과로 24세에 기술 특허를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모교의 교수가 된 베이클랜드는 5세 연하의 셀린 스와트와 결혼하여 영국과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도 그는 주로 대학과 연구소들을 방문하며 급속히 바뀌는 과학기술 동향을 살폈다. 

뉴욕에서 컬럼비아대학을 방문했을 때, 미국 화학협회장이던 찰스 챈들러 교수(1836-1925)는 사진 사업가 리처드 안토니를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베이클랜드에게 미국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했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학자와 기술자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베이클랜드의 첫 번째 발명품 벨록스 인화지. 사진은 이를 사들인 코닥이 출시한 1920년대 제품. 베이클랜드는 이 특허를 코닥에 넘기고 백만장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Paralaloa
베이클랜드의 첫 번째 발명품 벨록스 인화지. 사진은 이를 사들인 코닥이 출시한 1920년대 제품. 베이클랜드는 이 특허를 코닥에 넘기고 백만장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Paralaloa

베이클랜드는 안토니회사의 자문역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에 머물렀다. 베이클랜드가 가진 특허의 핵심은 위험한 화학약품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빠른 속도로 종이원판에 사진을 정착시키는 기술이다. 예전까지 주로 이용되던 자연광(햇빛) 대신 인공조명을 이용하여 인화 소요시간을 줄이고 사진의 크기도 자유롭게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직 실용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안토니회사의 지원과 보수가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베이클랜드는 2년 뒤 안토니와 결별하고 화학 컨설턴트로 자립했다. 가지고 온 돈은 떨어져 가고 몸은 자주 아팠던 베이클랜드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인화지 연구에만 집중했다. 다시 2년이 흘러 결실을 보았다.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가볍고 안전한 인화지 ‘벨록스’(Velox, ‘빠르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가 탄생한 것이다. 사진에 혁명을 가져올 만큼 훌륭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경기가 좋지 않았던 탓에 특허 전체를 좋은 가격에 팔 수가 없었다. 부득이 스스로 동업자를 구해 네페라(Nepera)화학이란 회사를 차리고 직접 생산판매에 나서야 했다. 학자에서 발명가로, 다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베이클랜드가 인화지 회사를 코닥에 넘긴 후 판매수익금으로 구입한 뉴욕 융커스의 저택. 건물 안의 개인 실험실에서 신물질 연구에 몰두하여 최초의 순수 플라스틱 베이클라이트를 만들었다. 사진=미국 화학사연구소 제공
베이클랜드가 인화지 회사를 코닥에 넘긴 후 판매수익금으로 구입한 뉴욕 융커스의 저택. 건물 안의 개인 실험실에서 신물질 연구에 몰두하여 최초의 순수 플라스틱 베이클라이트를 만들었다. 사진=미국 화학사연구소 제공

새로운 블루오션 ‘플라스틱’연구에 결실을 맺다

벨록스는 생각보다 잘 팔려 교수 봉급보다는 한결 나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사진 수요가 늘면서 매출은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사업이 안정될수록 베이클랜드는 점점 화학실험실이 그리워졌다. 커다란 책상에 앉아 결재서류에 도장이나 찍는 일은 그의 적성이 아니었다.

4년째 되던 1899년, 당시 사진 산업의 강자로 떠오른 이스트먼 코닥이 벨록스에 관심을 보였다.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세계 사진 시장을 1백년 넘게 지배했던 코닥필름, 바로 그 회사다. 베이클랜드는 최소 10만 달러 이상 남길 수 있기를 기대하며 조지 코닥 사장을 만났다. 

‘20만 달러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25만 달러를 제시해서 5만 정도를 깎아주도록 할까?’
즐거운 고민을 안고 조지 코닥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사업가로서는 여전히 풋내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코닥이 내정한 금액은 베이클랜드가 상상하는 금액의 10배나 되었던 것이다. 코닥측은 1백만 달러를 염두에 두고 거기서 얼마를 깎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협상을 통해 좀 더 깎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코닥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벨록스의 특허기술과 상표권 가격은 75만 달러로 결정되었다. 요즘 시세로 환산하자면 1천배 이상을 곱할 수 있는 가격일 것이다. 베이클랜드는 이로써 ‘백만장자’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상당한 부자가 된 것이다.

베이클랜드는 회사를 넘기고 받은 돈으로 큰 창고 크기의 개인연구실을 가진 저택을 구입했다. 요트를 사서 허드슨강을 오르내리며 시골에 농장을 가꾸었고, 당시로선 흔치 않은 자동차 유럽여행도 즐겼다. 그가 나중에 회상한 대로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어 여러 해 동안 그 ‘축복과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향후 20년 동안 코닥에 경쟁이 될 만한 일은 하지 않기로 약속한 베이클랜드는 이듬해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아 독일로 건너갔다. 그는 아직 젊었고, 화학자에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 과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20세기 전야의 기술동향을 살피고 샤를로텐부르크 연구소에서 전기화학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온 그는 얼마 동안 전기화학 계통의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나이아가라폭포의 전기화학공장 건설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곧 혼자서 연구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업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 아이템이 바로 플라스틱 연구였다. 그는 벨록스 발명에서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학자로서 연구를 계속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가능하면 ‘가장 빠른 시간에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실용적 연구’에 집중하는 개인적 연구자가 한결 편안하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대학과 국가사회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분야에서 연구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개인 연구자는 곧바로 사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발명품 연구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빠르게 얻을 수 있고, 이것으로 다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차이가 ‘학자와 발명가’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것 아닐까.

베이클랜드는 곧 (아직은 플라스틱이 아닌) 합성수지 연구에 몰두했다.
1900년대 산업사회는 뼈나 돌, 종이, 천, 고무, 가죽, 수액 같은 자연물질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의 등장을 목 빼어 기다리고 있었다. 인류는 원시적부터 이런 자연물질들을 가공하여 용도에 맞게 사용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시화에 따른 대량수요, 또 새로운 기계의 등장 등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기산업과 함께 사용되기 실용적인 절연재료의 수요도 높아졌다.

이에 걸맞은 인공물질 연구가 시작된 지도 이미 수십 년이었다. 예컨대 1856년에 영국인 알렉산더 파크스는 천연 셀룰로오스를 알콜로 녹인 뒤에 가공하는 방법으로 원시적 플라스틱이라 불릴만한 고체물질 ‘파케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생산과정이 복잡하고 잘 부서지거나 뒤틀리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1869년에는 코끼리 상아를 깎아 만들던 당구공을 대체할 인조물질 개발이 현상금까지 내걸고 공개적으로 추진되었다. 많은 연구자가 뛰어들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상아는 유럽의 상류층들이 애호하는 조각 재료였다. 상아를 깎아 만든 도장이나 담배 파이프, 그 밖에도 많은 생활소품이나 조각품 등, 20세기 중반까지도 선물이나 기념용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수많은 아프리카코끼리가 희생되어 아직 19세기인 당시에 이미 코끼리 밀렵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었다.

플라스틱보다 먼저 등장한 식물성분 합성물질 셀룰로이드는 길이가 긴 영화필름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1889년 투명 셀룰로이드를 개발한 이스트만 코닥에 의해 필름전문회사 코닥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영화필름은 불에 약하여 자주 영화관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코믹 반전영화 ‘바스터스; 거친 녀석들’에서 나치의 지도부를 영화관에 가둬 몰살시키는 방편으로 극장에 모아둔 영화필름을 인화물질로 사용한다는 설정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도 영사기에 걸린 필름에서 발화한 불이 극장 전체를 태우는 장면이 생생하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 같은 과학자도 노년에 폭약 개발에서 물러난 뒤 합성수지와 인조 화이버(fiber) 연구에 눈길을 돌렸다는 걸 상기해 보면, 당시 신소재 개발이 많은 발명가에게 얼마나 첨예한 관심사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플라스틱보다 먼저 등장한 식물성분 합성물질 셀룰로이드는 길이가 긴 영화필름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초기의 영화필름은 불에 약하여 자주 영화관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코믹 반전영화 ‘바스터스; 거친 녀석들’에서 나치의 지도부를 영화관에 가둬 몰살시키는 방편으로 극장에 모아둔 영화필름을 인화물질로 사용한다는 설정을 보여주었다. 공개도메인
플라스틱보다 먼저 등장한 식물성분 합성물질 셀룰로이드는 길이가 긴 영화필름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초기의 영화필름은 불에 약하여 자주 영화관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코믹 반전영화 ‘바스터스; 거친 녀석들’에서 나치의 지도부를 영화관에 가둬 몰살시키는 방편으로 극장에 모아둔 영화필름을 인화물질로 사용한다는 설정을 보여주었다. 공개도메인

1907년 플라스틱 탄생, 용도는 무한대

그러나 아직 합성수지의 세계는 넓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베이클랜드가 주목한 것은 ‘셀락’이라고 부르는 물질이었다. 진디벌레가 나무에서 수액을 빨아먹고 남기는 배설물을 재료로 만든 수지인데, 나뭇가루 등을 섞어 열과 압력을 가하면 지금의 플라스틱 같은 성질의 천연수지를 얻을 수 있었다. 방수성도 뛰어나고 절연체로도 훌륭했다. 그러나 셀락 한 주먹을 얻기 위해 최소한 수만 마리의 진디벌레, 그것도 아열대 지역에서만 사는 ‘랙깍지 진디벌레’ 암컷의 배설물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셀락은 고작 고급 가구나 악기의 코팅제로 사용하기에도 벅찼다. 셀락과 같은 성질을 지니되 재료 공급이 어렵지 않은 합성물질이 필요했다.

베이클랜드는 벨록스를 개발할 때처럼 수년 동안 인조 셀락을 만드는 한 가지 일에만 목표를 두고 집중했다. 그동안 유럽의 화학자들이 실패를 거듭해온 페놀과 포름알데히드 조합의 기존 화학실험 기록을 살피면서 자신만의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재료의 비율과 온도 압력에 변화를 주면서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천연 셀락에 근접한 품질의 합성수지를 만들었다. 합성 비율과 방법을 조금만 바꾸어도 수지의 성질은 달라졌다. 딱딱하게도, 유연하게도, 단단하게도, 부드럽게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완전 인조 합성물질, 진정한 의미에서 지금과 같은 플라스틱이 탄생했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등장한 신물질 플라스틱은 다양한 변신 능력을 갖추고 인류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20세기 시작과 함께 등장한 신물질 플라스틱은 다양한 변신 능력을 갖추고 인류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베이클라이트는 발명가의 이름을 딴 명칭이고, 화학명은 ‘폴리옥시벤질메틸렌글리콜무수몰(polyoxybenzylmethylenglycolanhydride)’이다. 필요한 모양의 거푸집에 부어서 똑같은 모양의 물건을 얼마든지 반복해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열을 이용해 녹이고 주물을 완성하지만, 한번 완성된 제품은 웬만한 열에는 녹지 않아 이전까지의 제품들처럼 쉽게 뒤틀리거나 깨지지 않았다. 물에도 젖지 않고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전기와 화학물질에 잘 견디는 성질은 금속보다 유리한 용도를 제공할 수 있었다.

베이클랜드의 신물질은 1907년 완성되었고, 논문 발표와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1909년 12월 특허가 공식 인정되었다. 47세 되던 1910년 베이클랜드는 제너럴 베이클라이트사를 설립하여 다시 사업가로 변신했다. 초기부터 다양한 공구의 손잡이, 담배 파이프, 전기스위치, 그리고 전구소켓이나 라디오 전화기 케이스로 주목받았다. 그 외에도 베이클라이트를 기본으로 하는 다양한 종류의 플라스틱이 그의 회사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등장했다. 이후 플라스틱 계열의 합성수지가 어떤 식으로 발전되었는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그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지구를 점령’하는 수준까지 성장하고 발전되어 20세기 말에는 ‘플라스틱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44년 베이클랜드가 사망할 때까지(80세) 지구상에서는 17만 5천 톤의 베이클라이트가 생산되었고, 이것을 사용하는 상품의 종류는 최소한 1만 5천 종을 넘었다. 20세기 인류의 생활방편인 의식주 모든 분야에서 플라스틱은 전통적인 천연물질의 수요를 대체해 왔다.

개인적으로 베이클랜드는 1917년 콜롬비아대학의 특임교수가 되었고, 1919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노년에 자손들의 상속권 싸움과 사치 방탕에 골머리가 아파 스스로 은둔을 택해야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이뤘다. 제너럴 베이클라이트사는 그가 은퇴를 결심한 1939년(75세) 유니온카바이트에 매각되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취득한 특허는 1백 가지가 넘었다. 

1922년 독일 화학자 헤르만 슈타우딩거 교수(왼쪽)는 플라스틱이 고분자화합물질이라는 그동안의 추측을, 분자식을 써서 증명했다. 이후 고분자화합물질인 플라스틱과 나일론 연구는 급물살을 타고 발전하게 된다. 공개도메인
1922년 독일 화학자 헤르만 슈타우딩거 교수(왼쪽)는 플라스틱이 고분자화합물질이라는 그동안의 추측을, 분자식을 써서 증명했다. 이후 고분자화합물질인 플라스틱과 나일론 연구는 급물살을 타고 발전하게 된다. 공개도메인

나일론 등장, 서민들도 입는 ‘인조 비단’

오늘날 우리가 플라스틱이라 부르는 합성수지의 세계는 단지 플라스틱임을 알아볼 수 있는 고형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22년 플라스틱이 고분자화합물질이라는 사실이 독일 슈타우딩거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된 후 연구는 더욱더 많은 연구자에 의해 더 빠르고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30년대의 섬유 산업이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의 화학회사 듀퐁(DuPont)은 실력 있는 화학자들을 영입하는 데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했다. 실력 있는 화학자들에게 대학 봉급의 두 배에 달하는 보수와 편의제공 등을 제시하여 연구기능을 강화했는데, 실용성 있는 기술특허 하나면 투자의 수십 배에서 수백 배까지 이익을 남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 왈라스 흄 캐로더스는 내성적인 사람이어서 대학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듀퐁의 집요한 영입공세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해 1928년 듀퐁의 연구조직에 책임자로 옮겨갔다. 그의 연구팀은 3년 뒤에 네오프렌과 폴리에스터 등을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1931년). 네오프렌은 당시 공급이 달리던 동남아의 천연고무를 대신할 ‘인조고무’로서 훌륭했다. ‘천연의 것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화학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물질’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인조고무는 쓰임새가 매우 많다. 다양한 구기 종목 스포츠의 공들이 양산되고, 고무신이며 운동화바닥, 고무함지(사실은 천연고무가 아닌) 들이 이후에 등장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개발품 폴리에스터는 첫 번째 섬유가 될 뻔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뜨거운 물이나 열기에 닿으면 섬유가 녹으면서 마치 불에 녹인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수년이 더 지난 1935년. 마침내 캐로더스에 의해 첫 번째 합성섬유의 걸작이 탄생했다. 바로 나일론이다. 사람들은 폴리아마이드계의 나일론을 ‘인조견’으로도 불렀는데, ‘인공적으로 만든 비단’이라는 뜻이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철사보다 강인한’ 나일론 원사의 등장으로 인류는 의류와 피복제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후 다양한 기능성 폴리에스터 원단이 등장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거미줄보다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철사보다 강인한’ 나일론 원사의 등장으로 인류는 의류와 피복제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후 다양한 기능성 폴리에스터 원단이 등장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값비싼 비단을 사 입기 어려운 서민들도 비단 같은 촉감을 가진 원단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일론의 대중적인 제품이 1938년 뉴욕박람회에 첫선을 보였다. ‘공기 석탄 물에서 탄생한 제품으로, 거미줄처럼 가늘고 부드러우며 강철처럼 강한 원사’로 소개되었다. 게다가 진짜 비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생산가가 낮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강점이었다. 이듬해 나일론 스타킹이 출시되었을 때 시판 첫날에만 4백만 켤레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초기의 나일론은 천연섬유에 비해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이것도 점차 개선되었다. 섬유의 밀도와 코팅 조절을 통해 통기성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땀이 잘 배출되고 공기가 잘 통한다고 하여 배타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20세기 후반의 신소재 원단 ‘고어텍스’를 발명한 사람도 듀퐁사 출신이었다.

듀퐁사는 나일론과 플라스틱 사업으로 20세기에 엄청난 부를 누렸으나, 나일론 발명자 캐로더스는 그렇지 못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고 한해 전에는 40세의 늦은 나이로 결혼까지 했지만, 그 이듬해, 나일론의 놀라운 선풍을 목도하기도 전에 자기 손으로 생을 마감했다. 듀퐁의 나일론은 2차 대전 중 전선의 병사들을 위한 전투복 낙하산 등의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나일론 소재의 재활용을 위해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버리는 스타킹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던 일은 유명하다.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있는 미국 듀퐁 본사. 연구센터와 실험실 등이 소도시를 이루고 있다. 1802년 화약회사로 시작하여 종합 화학회사로 발전했다. 20세기 나일론과 폴리에스터 개발은 최대 업적의 하나였으나 화학공장 특유의 공해배출과 관련한 흑역사도 남겼다. 설립 200년을 넘긴 2015년 또 다른 거대 화학업체 다우케미컬과 합병했다. 연구시설과 판매지사 등이 70여개 국가에 진출해 있다. 공개도메인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있는 미국 듀퐁 본사. 연구센터와 실험실 등이 소도시를 이루고 있다. 1802년 화약회사로 시작하여 종합 화학회사로 발전했다. 20세기 나일론과 폴리에스터 개발은 최대 업적의 하나였으나 화학공장 특유의 공해배출과 관련한 흑역사도 남겼다. 설립 200년을 넘긴 2015년 또 다른 거대 화학업체 다우케미컬과 합병했다. 연구시설과 판매지사 등이 70여개 국가에 진출해 있다. 공개도메인

의식주부터 산업, 레저 스포츠…인체까지 지배

전쟁이 끝난 평화시대에 플라스틱은 대중들의 일상에 깊이 파고들었다. 베이클랜드의 제조공정 특허가 만료되어 나라마다 플라스틱 제조회사들이 우후죽순 등장한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의류나 이불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식기, 도마, 칼 손잡이, 각종 조리기구 등으로 식생활과도 연관을 맺었다. 프라이팬이나 냄비바닥에도 테팔-테프론이라는 플라스틱 물질이 입혀지고, 음식물을 보관하는 데는 플라스틱 그릇이나 비닐, 랩 등이 이제 필수품이다. 건축에서는 PVC가 금속을 대신하여 상하지 않는 상하수관으로 자리 잡았고, 지붕재료나 내부 인테리어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재료가 되었다.

의식주뿐 아니라 여가생활과도 긴밀한 연관을 맺었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20세기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즐길 수 있었을까. 1940년대에는 LP판이 등장하여 음반산업에 불이 붙었다. 에디슨의 축음기가 발명된 지(1877년) 70년이 지난 1948년 PVC 레코드를 개발한 콜롬비아레코드사의 등장으로 음반유통이 본격화되었으며, 195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가, 1979년 네덜란드의 필립스와 일본 소니가 합작으로 개발한 콤팩트디스크(CD)가 음반시장을 물려받아 음악보급에 기여했다. 플라스틱은 피아노 건반이나 기타줄 등 악기부품에도 사용되고, 낚싯줄, 등산과 요트 세일링에 사용되는 로프, 자전거 부품과 육상경기 도구들, 캠핑 텐트와 자동차 부품 등에도 사용된다. 레저 스포츠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된 것이다. 그 밖에 어린이용 장난감, 전자기기 및 군사용 무기부품 등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플라스틱은 1950년대 음반산업의 밑거름이 되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우주항공산업에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우주인들이 입는 우주복도 기능성 고분자합성섬유의 발달로 개발되었다. 의식주부터 레저 여가 스포츠, 과학과 산업 분야까지 플라스틱 기술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플라스틱은 1950년대 음반산업의 밑거름이 되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우주항공산업에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우주인들이 입는 우주복도 기능성 고분자합성섬유의 발달로 개발되었다. 의식주부터 레저 여가 스포츠, 과학과 산업 분야까지 플라스틱 기술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20세기 중반에는 의학 분야에도 널리 채용되었다. 성형외과를 영어에서는 플라스틱 서저리(plastic surgery)라 부른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수요가 급증한 의수 의족 등 인체 보조기구를 만드는 데 플라스틱은 무엇보다 유용한 소재였다. 이후로도 인체에 무해한 고분자 재료들은 더욱 폭넓게 의료용품과 보조 재료로서의 용도를 넓혀왔다. 가발과 머리빗 각종 액세서리 등 미용재료로도 필수적이고 플라스틱 폼과 보온자재, 페인트, 방수도장 재료 등 건축자재로도 필수적이다. 전자산업과 로봇산업, 항공우주산업도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발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플라스틱'은 넓은 의미에서 최초의 플라스틱으로 간주되는 천연수지 셀룰로이드로부터 다양한 고분자화합물질들까지를 포함하는 대표명칭이다. 요컨대 우리가 ‘플라스틱 공해’를 언급할 때는 의미상 베이클라이트뿐 아니라 다양한 셀룰로이드 제품들, 비닐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을 포괄한다. 공식 명칭으로는 페트(PET) 폴리에틸렌(PE), 폴리염화비닐(PVC), 폴리프로필렌(PP) 등등이다.

지난 1백년을 통해 인간생활의 모든 곳에 파고든 플라스틱의 강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어떤 모양으로든 성형이 쉽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이라는 명칭 자체가 성형이 가능하다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플라스티코(plastiko)에서 유래했다. 한번 만들어 놓으면 모양이 유지되고 쉽게 깨지거나 손상되지 않는다. 금속이나 유리 등을 대체할 수 있으면서도 물에 뜰 정도로 가볍고, 가공방법에 따라 두께와 질감은 자유롭게 변형된다. 녹슬거나 썩지 않고 보온단열성, 절연성, 방습성이 뛰어나다. 높은 온도만 아니라면 인체에 무해하기 때문에 음식이나 식자재를 담거나 포장하는 데에도 편리하다. 게다가 생산비용이 적게 든다. 

만일 플라스틱 비닐 나일론 같은 고분자소재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가죽이나 비단옷을 사 입을 수 없는 대다수 서민은 여태까지 거친 베옷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집안에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칫솔을 만드느라 나무껍질을 다듬거나 흰수염고래를 계속 잡아야만 했을 것이다. 식생활은 무거운 도자기나 유리, 유기 아니면 나무 그릇에 의존하느라 많은 나무를 잘라 쓰고 있지 않을까. 이것은 플라스틱이 제한된 천연자원을 보호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소비생활의 평등’에도 기여를 했다는 의미다.

태평양에 떠돌고 있는 쓰레기더미(Pacific Garbage Patch)를 나타낸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의 해양지도. 플라스틱을 중심으로 한 쓰레기 더미가 한반도보다 큰 넓이로 뭉쳐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2010년에 제작되었는데, 이후 쓰레기더미가 더 커졌다는 증거사진은 발표되지 않았다. 자료: 미 국립해양대기청. NOAA
태평양에 떠돌고 있는 쓰레기더미(Pacific Garbage Patch)를 나타낸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의 해양지도. 플라스틱을 중심으로 한 쓰레기 더미가 한반도보다 큰 넓이로 뭉쳐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2010년에 제작되었는데, 이후 쓰레기더미가 더 커졌다는 증거사진은 발표되지 않았다. 자료: 미 국립해양대기청. NOAA

인간과 플라스틱 ‘애증의 관계’…절제가 필요

그러나 강점 뒤에는 문제점도 있는 법. 21세기 인류는 엄청나게 생산된 플라스틱에서 유래된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천연자원의 대체물질로 자연의 훼손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 플라스틱이 이제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불리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플라스틱 공해’가 땅속과 바다 생태계까지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어서다.
‘썩지 않는 장점’은 쉽게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되었고, 가벼우며 물에 녹지 않는 방습성은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해양쓰레기의 문제를 야기했다. 한반도 크기의 몇 배나 되는 대양 부유물질의 중심에 플라스틱이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한동안 이 문제제기는 외면받았으나, 결국 국제사회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무렵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에 흘러 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거대한 섬이나 대륙을 연상케 할 정도로 커졌다는 사실이 항해하는 선원들이나 위성사진을 통해 공개되면서 세계인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제 국제적인 기후환경 관련 논의에서 플라스틱의 문제는 공해 배출가스 문제와 함께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다.
해법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플라스틱 소비를 줄일 방도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스틱의 제조공정에 관여해서 용도를 다했을 때 폐기가 가능한 성질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인구는 늘고 플라스틱의 용도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친환경적 제품의 비중을 늘려가되 적극적으로 소비를 줄이며 절제하는 습관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그린피스제공
인구는 늘고 플라스틱의 용도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친환경적 제품의 비중을 늘려가되 적극적으로 소비를 줄이며 절제하는 습관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그린피스제공

헨드릭 베이클랜드의 생전에 17만 5천톤의 베이클라이트가 생산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1950년대 이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17년까지 92억 톤이나 누적 생산되었다. 그중 절반이 2004년 이후 생산된 것이었다. 연간 1억 톤 수준에서 3억 톤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환경문제가 제기된 이후에도 플라스틱 생산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나게 늘어난 셈이다. 2020년에는 한 해 동안에만 4억 톤가량이 생산되었다. 플라스틱 용도의 증가와 소비인구의 증가가 원인이다.

물론 현대에 생산되는 플라스틱들은 잘 썩는 비닐이라든가 친환경 플라스틱 등 환경오염에 대비한 기능성 소재들이 대부분이다. 나라마다 플라스틱의 생산과 폐기 과정에 대한 정부의 감독이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는 플라스틱의 양적 증가는 쓰레기 문제 해결을 쉽지 않게 한다.

그린피스 코카콜라 플라스틱 제로 시위 퍼포먼스. 사진=그린피스 제공
그린피스 코카콜라 플라스틱 제로 시위 퍼포먼스. 사진=그린피스 제공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재활용(recycling)이 강조되지만, 여기에도 간단치 않은 어려움이 있다. 순수 플라스틱 자체는 인체 유해성분이 소멸되어 대개 안전하지만, 대다수 플라스틱 제품은 다양한 색소, 또는 목적별 기능을 위한 첨가제들이 들어가 있다. 유독성분은 이러한 첨가물에 의해 포함된다.

그런데 재활용하는 경우, 수집된 플라스틱들을 첨가성분에 따라 일일이 분류하지 않는 한 유해성분들이 섞여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색깔 또한 혼합되어 새로 생산되는 제품보다 선명한 색상을 갖기 어렵다. 쉽고 안전하게 재활용할 수 있는 종류는 무색투명한 페트병(PET) 종류에 불과하며 다른 플라스틱의 재활용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요즘 국내에서도 플라스틱 재활용 폐기물을 내놓을 때 색깔 없는 페트병만 따로 모으도록 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다른 이물질에 오염되어 있기 쉬운 비닐이나 플라스틱들은 대개 재활용에서 배제되어 태우거나 매립되는 게 보통이라 한다. 세계적으로 확실하게 재활용되는 플라스틱은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 가운데 20%를 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슨 방도가 있을까. 인구의 증가에도, 플라스틱 제품의 생산과 소비에도, 인류 스스로가 한도를 정해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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