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㊱] 지리산 ‘화대(華大) 종주’를 꿈꾸며19...지리산을 찾은 선인들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10.06 17:53
  • 수정 2023.10.2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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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고사목.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 고사목.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조선 시대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은 꾸준히 지속되는 양상이다. 특히나 나라가 어지럽고 권력의 끄나풀이 끊어지면 더욱 많은 사람이 산속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수없는 당파싸움에 권력들은 명멸하고 하룻밤 사이에 집 안은 쑥밭이 되고 귀양을 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의 허명에 사람은 일생을 사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바람 한 자락, 미닫이문을 흔들고 간다

처마의 낙수(落水)를 받아 벼룻물 삼고, 벗들 사이에 왕복한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밤을 새운다. 내가 쓰는 덧없는 글은 갈수록 늘어나고, 어디 한군데 마음 둘 데가 없다 빗줄기 갈수록 굵어지고, 뒤란의 토란잎으로 들치는 빗소리도 더욱 높은데, 문득 귀양 간 벗이 생각난다

갈매기 소리만 높고 이 시간 파도는 더욱 높아갈 텐데 그 저승 같은 섬, 초집에 홀로 앉아 아무도 들을 이 없는 빈 하늘 올려다보며, 이 밤 벗은 무얼 하며 밤을 샐까

마음 더욱 어두워 밖으로 나오니 먹구름만 서녘으로 바쁘게 몰려가고, 빗줄기에 섞여 떨어진 미꾸라지 두 마리만 마당에서 버둥대는데 처마 속 제비 새끼들만 유형의 땅에서 밤을 샌다

- ‘위리안치’, 윤재훈

천왕봉 여름 2008. 촬영=윤재훈 기자
천왕봉 여름 2008. 촬영=윤재훈 기자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어떤 산보다도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던 두류산, 그러나 변변한 안내서조차 없을 때이니 얼마나 구름 속에 쌓여있던 신비롭고 아름다웠던 산이었겠는가. 하나 기껏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선현들이 남겨놓은 몇 편의 글이 전부였다.

지리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463년에 발간된 이륙(李陸)의 ‘지리산기(智異山記)’와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는 모양이다. 따라서 지리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김종직·김일손·조식 (1501~1572) 등이 만들어 놓은 유람록이었다.

이륙은 1459년 세조 5년에 태어나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왕명으로 도성의 지도를 작성하였다. 그가 써놓은 ‘유지리산록’을 보면 왜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천왕봉당(天王峯堂)에는 천왕의 석상이 있다. 정수리 위에 칼자국이 뚜렷한데, 왜구가 궁지에 몰리자, 천왕이 돕지 않는다고 여겨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정수리를 찍은 것이라고 한다.

사면이 다 뾰족한 봉우리로 나무 사이에 쇠를 잇고 돌을 둘러놓아 사람이 잡고 오를 수 있게 했지만, 범이나 곰 같은 맹수들은 하나같이 다닐 수가 없다. 비록 까마귀나 솔개라도 역시 다가갈 수가 없었지만, 오직 송골매는 가을이 깊어지면 내려와 앉곤 한다. 서쪽으로 이삼 리 정도 가면 석굴에 맞닥뜨리는데 오가는 자들이 이 굴을 통해 다닌다.

영신사(靈神寺) 동쪽 제단에는 가섭(迦葉)의 석상이 있는데 어깨와 팔에 불에 탄 듯한 자국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석상이 다 타면 인간 세상이 변해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것이니 매우 영험함이 있다.’

라고 했다.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의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지리산이 수백 리에 걸쳐 있어서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서쪽을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가는 사람은 북쪽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한쪽 방면으로 유람을 떠나 수십일을 돌아다녔다.

세상에서 이른바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 과연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내가 본 것을 두고 남의 말을 폐할 수는 없으나, 내가 오른 곳은 천왕봉이다. 천왕봉에 올라 바라보면 지혜롭건 어리석건, 명석하건 무식하건 간에 보는 것이 상의하지 않아도 같은 것인데, 저 승려가 본 것은 유독 나와 다르니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올라가서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는데 내가 처음에 의심했다가 결국 믿게 되었고,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가서 천하를 작게 여기셨는데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가 이 산에 오르고 나서야 성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언젠가 지팡이 짚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대고 길게 메아리쳐 보고 흉금을 헤치고 바람을 맞는 자가 있다면, 지금 나의 이 말을 가지고 질정(叱正)해 보라.

기품이 흐르는 옛집. 촬영=윤재훈 기자
기품이 흐르는 옛집. 촬영=윤재훈 기자

이 글을 읽어보며 옛 시절 우리 선인들이 생각했던 지리산의 모습과 그 생각들을 짐작할 수 있는데, 특히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후 수많은 문인에게 지리산 유람의 지침서가 되었다. 즉 지리산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텍스트였다.

아침부터 집 안이 떠들썩하다
이 집 자제가 생원시에 합격하더니
진사시까지 연거푸 합격했다
종과 몸종들은 새벽부터 바쁘고
아버지의 어깨에는 한껏 힘이 들어갔다

딸 가진 집에서는 하례품을 보내고
이 애가 우리 집을 살린 아이라고
어깨가 처져있던 가문에
모처럼 생기가 돈다
잔치에 연락받은 양반들은 하나둘 도착하고
대문 앞은 소란스럽지만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야 매번
어제와 같다

담 너머로 올라오는 고기 굽은 냄새만
고샅길로 흘러가고
코훌쩍이는 아이들만
담 밑에서 꼰지발을 든다
- ‘이륙의 집에서’, 윤재훈

노고단에 핀 꽃, 강산애. 촬영=윤재훈 기자
노고단에 핀 꽃, 강산애. 촬영=윤재훈 기자

경상북도 칠곡에 살던 이주대(李柱大, 1689~1755)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 지리산을 유람한 이가 많았으나, 특히 김종직·김일손·조식 세 선생의 유람이 가장 두드러진다.”
라고 하여, 세 작품이 지리산 유람록의 정수(精髓)임을 말하였다.

폭설, 지리산. 촬영=윤재훈 기자
폭설, 지리산. 촬영=윤재훈 기자

함양군수 남주헌(南周獻, 1769~1821)은 1807년 3월 26일 지리산 유람에 동행하였던 경상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가져온 김종직·남효온·김일손의 유람록을 빌려 읽고, 자신의 여정에 있던 사찰과 봉우리 이름을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김종직·김일손·남효온·정여창·조식 등은 조선조 문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고, 지리산 유람을 통해 서로 공감하려고 하였다. 선현들처럼 느끼고 그 존경의 경지까지 오르고자 하였을 것이다. 선현들의 유람을 자신의 유람 목적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유람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하였던 모양이다. 이는 어쩌면

“눈으로 보이는 경지를 초월하여 더 높은 정신적 가치를 궁구하려는, 
조선조 문인들의 유가적(儒家的) 인식 체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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