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㉜] 지리산 ‘화대(華大) 종주’를 꿈꾸며15...지리산에서 흘러내린 조선 사림(士林)의 푸른 정신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9.18 11:49
  • 수정 2023.09.28 01: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두류산 깊고 저녁 구름 낮은 곳
온 골짜기와 온 바위들이 회계산같네.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숲 너머에선 부질없는 흰 원숭이 울음소리뿐
- ‘두류산 깊고 저녁 구름 낮은 곳’, 이인로

김일손의 ‘탁영금’. 사진=문화재청 제공<br>
김일손의 ‘탁영금’. 사진=문화재청 제공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사림(士林)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말한다. 조선에 언로(言路)를 맡은 선비들이다. 왕에게 직언(直言)를 마다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역린(逆鱗)를 건드리기도 해야 한다. 이 둘을 대간(臺諫)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사극을 보면 ‘대간은 탄핵(彈劾)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다. 여기에 홍문관을 하나 더 넣기도 한다. 조선 사림 정신의 핵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는 이런 대간들이 없는 어지러운 시대이다.”

탁영 김일손(1464~98)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죄로 무오사화 때,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한다. 형벌을 당할 때, 그의 고향에 있는 냇물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 3일 동안이나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그 냇물은 붉은 시내라는 뜻의 자계(紫溪)라 불렀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다시 불러낸다. 연산군이 폐군으로 물러난 중종반정 이후 신원 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중종 때 직제학, 현종 때 승정원 도승지, 순조 때 이조참판에 각각 추증되었다. 경상북도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경상남도 함양의 청계서원(靑溪書院),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비록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조선 중앙 정계를 이끈 ‘사림(士林)’의 명맥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능숙하게 연주해, '탁영문집'을 남겼다. 특히 그가 남긴 거문고를 탁영금이라 불렀는데 귀중한 유물이 되었다. 거문고 앞면 중앙 부분에 탁영금(濯纓琴)이라는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학(鶴) 그림이 하단부에 그려져 있는데, 앞면과 뒷면에 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거문고는 조선의 선비들이 유교 경전과 함께 항상 가까이 두었다. 김일손의 호는 탁영(濯纓)으로 ‘갓끈을 씻는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쓴 어부사(漁父詞)에서 따온 문구이다.

창랑의 물이 맑다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다면
내 발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이 글은 초나라 조정에서 쫓겨난 굴원이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하자,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읊조리고 간 부분이다. 이는 곧 세상의 청탁에 따라서 몸가짐을 달리하라는 뜻으로, 세상이 흐리다면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라는 뜻으로 자주 인용된다.

지리산의 솔바람 소리. 촬영=윤재훈
지리산의 솔바람 소리. 촬영=윤재훈 기자

김일손은 기개 있는 선비의 대명사이며, 탁영금은 533년 전인 1490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립 대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988년 보물 957호로 지정되었는데 옛 선비들이 사용한 현악기 중 유일하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문고를 만든 과정에는 풍류가 넘쳐 흐른다. 김일손은 거문고를 깊이 사랑했다. 평소 마음에 드는 거문고를 가지고 싶었던 김일손은 한 노파의 집 앞을 지나다가 사립문의 문짝이 오래된 오동나무인 것으로 보여, 주인에게 물었다. 노파는 100년 정도 된 것인데 이제 부엌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했다. 다른 한 짝은 이미 땔감이 되었다.

김일손은 그 문짝을 얻어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거문고를 만들고 이름을 '문비금(門扉琴)'이라 했다. 그리고 화가 이종준에게 부탁해 학을 그려 넣었다. 고구려 왕산악이 처음 거문고를 만든 후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고사가 그 순간 떠올랐을까? 지금도 탁영금의 밑바닥에는 문으로 쓰이던 때의 못 구멍 세 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의 후손이 고이 간직하다가 1997년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했다.

탁영금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악기이지만, 역사의 구체적인 흔적을 뚜렷이 남긴 젊은 선비의 기개가 담긴 정신적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가장 훌륭한 바이올린을 남겼다는 이탈리아의 현악기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의 걸작보다 훨씬 일찍 만들어졌고, 그것이 범접하지 못할 아름다운 스토리까지 담고 있다.

지리산 능선을 타고 거문고 가락이 춤추는 듯하다. 촬영=윤재훈
지리산 능선을 타고 거문고 가락이 춤추는 듯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김일손이 그 오동나무 문짝으로 만든 탁영금을 타 보니 소리까지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기분이 동했는지 다음과 같은 시(詩)도 남겼다.

만물은 외롭지 않으니 마땅히 짝을 만나게 되지만
백 세의 긴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만나는 것도 어려우리
아, 이 오동나무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서로가 기다린 게 아니라면, 누구를 위해 나타났겠는가.

거문고는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연주되는 악기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성정을 다스리는 선비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명주실 여섯 줄이 꼬아져, 가야금처럼 손가락으로 뜯어서는 제대로 소리조차 낼 수 없다. 술대로 힘차게 내리쳐야 특유의 깊은 소리가 울려 나오는데, 현악기이지만 음색은 타악기 적이다.

지리산의 기원. 촬영=윤재훈
지리산의 기원. 촬영=윤재훈 기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이 지리산에 오른 후에 그의 제자들이 다투어 지리산을 오른다. 점필재는 ‘책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한 채 입으로 글자만 읽는다’는 의미로 ‘책을 건성건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뜻을 역설(逆說)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제자인 남효온(南孝溫)은 매월당 김시습, 구봉 송익필과 함께 산림삼걸(山林三傑)로 15년 후 지리산에 등반하고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를 남긴다.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지리산을 거닐며 남긴 기행문이다.

'지리산일과'는 1487년(성종 18) 추강(秋江) 남효온(1452~1492)이 34세가 되던 9월 27일에 진주의 여사등촌(餘沙等村)을 출발하여

산청 단성-단속사(斷俗寺)-백운리(백운동)-덕산사(德山寺)-삼장(내원암)-보암(普菴)-중산리-향적암(香積菴)-천왕봉(天王峰)-영신봉-빈발암(貧鉢菴)-의신암(義神菴)-내당재-칠불사(七佛寺)-목통골-반야봉-노고단-봉천사(鳳天寺)-화엄사(華嚴寺)-구례-화개-쌍계사(雙溪寺)-불일암(佛日庵)-사자암(獅子庵)-묵계-오대사(五臺寺,옥종궁항)-단성                                          (秋江集 6권)     

으로 해서 10월 13일 다시 진주의 여사등촌으로 돌아오기까지 17일 동안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것이다

지리산 화엄사.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 화엄사.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지리산일과'는 다른 여행기와 달리 절경에 대한 감상보다는 여정 및 유적에 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유람 성격의 기행이라기보다는 충실한 고적 답사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내용 중에는 천왕봉·의신암·운상원(雲上院)·극륜사(極倫寺)·화엄사 등에 얽힌 마야부인(摩倻夫人)과 의신조사(義神祖師), 초료조고개(鷦鷯鵰岾초료조재), 옥보고(玉寶高), 송나라 인종(仁宗)의 애비(愛妃), 연기(緣起) 등의 설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단순한 소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근거를 토대로 실상에 접근하려 하고 있다.

신선들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의 소재지를 추정함에 있어서도 자신과 동행하였던 의문(義文)이라는 중의 견해와 이인로(李仁老)의 시 '유지리산(遊智異山)'의 내용을 토대로 단정 짓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雙磎寺)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이오?”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을 3, 4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두류산 깊고 저녁 구름 낮은 곳
온 골짜기와 온 바위들이 회계산같네.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숲 너머에선 부질없는 흰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은 저 멀리이니
이끼 속에 어렴풋이 네 글자 적혀 있네
처음으로 신선계가 어느 곳인줄 물었지만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 사람을 헛갈리게 하네.

頭流山逈暮雲低
두류산형모운저
萬壑千巖似會稽
만학천암사회계
策杖欲尋靑鶴洞
책장욕심청학동
隔林空聽白猿啼
격림공청백원제
樓臺縹渺三山遠
누대표묘삼산원
苔蘚依俙四字題
태선의희사자제
始問仙源何處是
시문선원하처시
落花流水使人迷
낙화류수사인미
『東文選』 卷之十三

* 회계산(會稽山): 사안(謝安)이 은거했던 곳이다
* 三山: 신선이 산다는 세 산을 말함

라 하였으니, 석문 안 쌍계사 앞이 여기가 아니겠는가. 쌍계사 위 불일암(佛日庵)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고 하였다. 이인로(李仁老)가 도가(道家) 세계의 이상을 찾기 위해 지리산(智異山)에 노닐면서 지은 시인 듯하다.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