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ㆍ중장년 기억상실증’...닮은 듯 닮지 않은 뇌의 투쟁

이상수 기자
  • 입력 2024.03.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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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 ‘못 잊어’, 김소월

[이모작뉴스 이상수 기자] 사람은 일반적으로 3세 이전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보다 15배, 20배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같은 증상이 일어난다. 건망증이라고 한다. 모두 ‘기억상실증’이다. 다른 시기의 같은 증상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점에선 같다. 하지만 하나는 평생 사용할 뇌를 최적화하기 위한 선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능한 뇌를 사용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생후 20개월 때 놀이동산에 간 기억이 있는가. 2살 때 수두를 앓았던 기억이 있는가. 그럴 가능성은 없다. 좀 더 커서 사진을 보았거나 회전목마를 태워주었던 부모의 이야기가 기억을 만들어 낸 것이다. 3월 14일 ‘사이언스(Science)’지는 ‘유아기 기억상실증’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아기도 기억을 형성하지만, 뇌가 이를 억제한다고 했다. 출생의 정신적 경험을 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과정을 그는 “유아기 기억상실증”이라 불렀다. 그 후 연구는 프로이트가 말한 아기 망각의 목적은 몰라도 망각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인간은 3세 이전의 기억에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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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기 망각의 첫 번째 이유...더 넓은 세상을 알기 위하여

연구에 따르면, 아기의 이러한 망각은 진화적인 목적이 있다. 어린 두뇌가 사건에 적절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리고 앞으로 사용할 기억 시스템의 틀을 개발하려는 것이다.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Trinity College Dublin)의 신경과학자 토마스 라이언(Tomas Ryan)은 “유아기 기억상실증은 두뇌 발달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써, 이는 필수적이다”라고 했다.

3세 이전의 기억은 무의식에 저장된다. 유아기의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잊힌 것이다. 메릴랜드 대학( the University of Maryland)의 아동 심리학자 트레이시 리긴스(Tracy Riggins)는 기억을 억제하는 이유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게 발달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기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파악하고 더 많은 연산 능력을 발휘한다.

아기의 뇌는 무한대로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를 배우려고 애쓴다. 먼저 보편적인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기에게 개별적인 에피소드는 중요하지 않다. 아기에겐 옆집 고양이 나비보다 일반적인 고양이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2. 아기 망각의 두 번째 이유...더 많은 경험을 위해

아기는 경험을 정확하게 분류하지 않는다. 잠재된 기억으로만 있다. 아기가 위험한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에 저장되지 않고 무의식에 잠재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유사한 경험이 일어나도 바로 공포를 유발하거나 즉각적인 위험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한다.

세 살까지 아기는 뇌의 뉴런을 폭발적으로 연결하며 늘린다. 그때 위험한 것들이 일일이 기억된다면 그와 비슷한 모든 사물과 사건은 아기의 경험을 막을 것이다. 아기에게 위험은 잠재적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래서 아기는 다가오는 모든 것에 겁 없이 접근할 수 있다.

#3. 아기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린 시절의 스트레스가 심했던 아기는 해마의 성숙이 빨라진다고 연구는 말한다. 그런 아기는 ‘기억상실증’을 경험하지 않는다. 해마를 성숙시키기 위한 기억상실의 역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마의 발달로 기억력은 향상되더라도 남은 생애 동안 불안은 커질 가능성이 높다.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은 좋은 일처럼 보이지만 아기에겐 정상적인 진행이 아닐 수도 있다.

아기의 뇌는 성인의 뇌로 발전해 가는 성숙의 전 단계가 아니다. 성인의 뇌와는 다른 규칙으로 작동한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하기 위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깊은 무의식에 저장하고 의식을 비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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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장년 기억상실증...과부하로 인한 뇌 몸살

냉장고에서 휴대폰을 넣어두고 하루 종일 찾는다. 어딘가로 향했지만, 도착하는 순간 왜 왔는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내 주변인들은 너무나 상세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같은 공간과 사건 속에 있었지만, 기억의 유효기간과 내용은 모두 다르다.

기억상실증에 해당하는 영어는 ‘amnesia’다. 건망증도 같은 단어를 쓴다. 중장년의 기억상실증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뇌세포의 파괴로 기억공간이 사라져가는 알츠하이머부터 뇌 외상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까지 다양하다.

라이언 박사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심각한 뇌세포 손상을 입기 훨씬 전부터 무언가를 잊기 시작한다고 한다. 어떤 과정이 기억상실을 유발하고 있다. 그 어떤 과정이 뇌세포 손상을 가속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뇌세포가 손상되지 않았다면 기억을 회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라이언은 말한다.

중장년의 기억상실증 원인은 크게 심인성과 기질성 원인으로 나눌 수 있다. 기질성은 외상이나 알코올과 같은 약물에 의한 것이다. 심인성은 충격적인 사건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다. 알코올이나 다른 약물로 인한 것도 뿌리를 찾아가면 결국 심인성이다.

‘유아기 기억상실증’을 지난 아기는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 중년, 장년을 살아간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경험하기 위한 자발적 기억상실증은 더 많은 것을 잊고 경험하지 않기 위한 타의적 기억상실증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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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모(FOMO), 코모(COMO), 그리고 조모(JOMO)

포모는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Missing Out)’이다. 존재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이다. 남들이 나를 잊어버릴까, 내가 나를 잊어버릴까, 내가 나의 과거를 잊어버릴까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를 각인 시키기 위해,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리기 위해 나는 더 힘들어지고 그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는 나의 뇌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코모는 ‘잊힐 용기(Courage of Missing Out)’다. 내 존재의 실종을 긍정하는 것이다. 굳이 남이 나를, 내가 나를, 내가 나의 과거를 추억하고 기억할 의무가 없다. 잊힌다는 것에 용기를 갖는다. 이제 나는 껍데기뿐인 기억이 아니라 현재라는 실존에서 살아간다. 야스퍼스가 말한 ‘현존’이 아니라 ‘실존’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조모는 ‘잊히는 것이 곧 즐거움(Joy of Missing Out)’이다. 스스로 실종자가 된다. 내 존재의 실종을 즐긴다. 나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즐긴다. 잊힐 용기를 넘어서 자발적으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낸다. 기억의 피해자가 아니라 기억의 창조자가 된다. 오늘부터가 내 기억의 시작이다. 아기는 자고 나면 어제가 없다. 아기는 스스로 기억상실자가 된다. 그래서 아기는 행복하다.

너무 아픈 기억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서서히 살해한다. 그런 나를 살리기 위해 나의 뇌는 스스로 그 기억을 삭제하려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삭제되지 않는다. 그저 잘 안 보이게 마음의 지하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뿐이다. 내가 스스로 잊을 용기를 내고 더 나가 그 잊음의, 비움의 즐거움을 찾아야 아픈 기억은 지하실에서 양지로 나와 비로소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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