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신(新) 보도지침’으로 언론대응 방식 역주행하는 서울시 출연기관

윤철순 기자
  • 입력 2021.06.10 13:11
  • 수정 2021.06.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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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윤철순 기자] 서울시 출연기관의 언론대응 방식이 우려된다. 조직원의 대외 언론 활동을 통제하다 못해 언론사 편집 방향이나 기자의 취재 내용까지 ‘사전 검열’하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신 보도지침’ 행태를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 봄.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 일환으로 군부 정치의 정당화 여론을 위한 언론 회유 공작을 기획했다. 보안사 ‘언론반장’ 이상재에 의해 실행된 이 공작은 추후 언론 장악 용도로 사용됐다. 이른바, ‘K공작계획’이다.

그 해 늦여름까지 추진된 K공작은 933명의 언론인을 날렸고, 11월의 언론사 강제 통폐합에 이어 한 달 후 만들어진 언론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언론통제 방안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들은 효과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정부의 대언론 창구를 문화공보부로 일원화하고, 언론 협조체제 및 조정체제 목적의 ‘보도지침’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각 언론사에 기사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작성, 시달했었다.

이들은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관계없이 방향과 내용,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해 보도 가부(可不) 지시를 내렸다. 심지어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 몇 단, 제목과 사진까지 편집권 전반에 간여했다.

며칠 전 취재차 서울시 출연기관인 ‘서울시50플러스재단’ 관계자를 만났다. 취재에 홍보팀 관계자가 동석할 것이란 얘길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취재지원과 협조를 위해서’라는 취재원의 전언을 존중해 별 생각 없이 응했다.

그러나 취재시작 전부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석한 홍보팀 관계자가 “기사의 ‘테마’를 어떻게 잡을꺼냐”며 따지듯 물어 온 것이다. “그걸 왜 답해야하냐”고 반문했더니, 원활한 취재지원을 위해서란다.

또 취재원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가로채며 “이런 질문은 (우리 직원이)답변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답변이 어려운 질문을 직원에게) 물어보는 것 같아..(곤란하다)”며 취재원을 대신해 답했다. 직원들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심산이다.

섬뜩했다. 공공기관 홍보팀의 언론대응방식이 참으로 대담했다. 기록으로만 접하던 신군부의 보도지침이 기시감처럼 생생히 소환되는 것 같았다. ‘눈길’만 잘못 굴려도 ‘젠더(gender)’ 폭력 범죄로 몰릴 수 있는 요즘 세상이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하에서나 있을법한 해괴한 일이 21세기 백주대낮에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도 천만 서울시민을 위한다는 서울시 출연기관에서 말이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폭력이 빠졌을 뿐이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공공기관의 대언론 행태는 역주행 중이다. 대외적으로 공개된 공공기관 자료의 정책적 가치를 시민에게 알리고자하는 취재조차 이런 식이라면 안 봐도 뻔하다.

설령, 보도되지 못할 내용이 공개 자료에 있다 해도 그건 그 나름대로 감수해야할 문제다. 그럼에도 소속 직원(취재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관리, 통제하는 방식으로 언론 접촉을 막겠다는 발상은 필경 부메랑이 될 것이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1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서울시(출연기관)의 언론대응 방안이 이렇게까지 무모할까. 안타깝고 참담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행태가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조직구성원들조차도 이런 ‘통제’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욕망의 연대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이 됐든 ‘일단 숨기고 보자’는 식의 집단 사고(思考)에 매몰된 것처럼 느껴져 불쾌하고 불편했다.

정권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서울시정을 한쪽에서 너무 오래 운영한 것은 아닌지. 비록 1년 임기지만, 시장이 바뀌었다. 오세훈 시장은 자칫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작은 것부터 꼼꼼히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 8일 오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보도지침 원본 사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증식'에 참석해 보도지침 사건 폭로 이유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 8일 오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보도지침 원본 사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증식'에 참석해 보도지침 사건 폭로 이유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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