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한 마디] “죽을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5분은 영겁의 시간과 같았다.”...사형수 도스토옙스키 ‘백치’

이상수 기자
  • 입력 2024.01.1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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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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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이상수 기자] 1849년 12월 22일 모스크바 세묘놉스키 사형장. 28세의 청년이 내란음모죄로 끌려와 사형집행을 선고받는다. 중앙에 기둥이 세 개 있었다. 사형수복을 입은 죄수들은 기둥에 묶였다. 맞은편에 군인들이 정렬했다. 정교회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죄수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 무슨 소용인가. 곧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텐데. 눈을 가리는 두건이 씌워졌다. 군인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철컥’, 총 장전 소리는 새벽을 깨우고 죄수들의 심장을 이미 관통했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황제의 시종무관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달려왔다. 형 집행 정지가 선포되었다. 사형선고와 사면령 사이는 20여 분이었다. 신부가 돌아다닐 때 시간은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청년은 5분이라는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5분이란 시간이 너무 긴 시간처럼 느껴져 삶의 마지막 순간이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무엇을 할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청년은 5분을 나누었다. 같이 정치범으로 끌려온 동료와 이별할 시간 2분, 자신을 돌아볼 시간 2분, 그리고 눈앞의 전경을 마지막으로 응시할 시간 1분.
-'백치'에서

동료들과 이별 인사를 하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3분 후면 무엇이 되어 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영원함을 가질 수 있지 않을 것인가! 그 영원함이 내 것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나는 찰나 찰나를 100년으로 바꾸어 한순간도 잃지 않을 것이며, 매 순간을 선물로 생각해서 허비해 버리지 않을 텐데!”
-' 백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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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쇼였다. 니콜라이 1세의 연출이었다. 애초 사형 생각은 없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처형 쇼를 통해 반체제 사상에 빠진 청년들을 훈계하고 자신의 관대함을 보이려 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한 이 사건은 청년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혹독한 시베리아 유형지에 촌각을 아껴 머릿속으로 걸작을 만들었다. 필기구가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자기 작품을 암기해 두었다. 언젠가 글로 옮기기 위해서. 그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다.

‘페트라셉스키 서클’ 사건은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여파를 두려워한 니콜라이 1세의 감시와 검열 제도의 결과였다. 체포, 혹독한 심문, 독방 수감, 재판, 처형 쇼, 유배의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곳곳에 묻어 있다. 그는 작품 ‘백치’에서 사형수가 처형 직전 5분 동안 겪는 심리변화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사건은 그를 인간 도스토옙스키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사랑하는 형, 지금, 이 순간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옹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죽음과 직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되어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어. 돌이켜 보니 비방과 실수와 나태 속에서 소중한 것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 몰라. 내 심장과 영혼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몰라…. 삶은 선물이고 행복이야. 형! 형 앞에서 맹세할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을 거야. 내 영혼과 심장을 순결하게 간직할 거야.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이것이 내 희망이자 위안의 전부야!
- 처형사건 직후 형에게 쓴 편지

마리 앙투아네트 신드롬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제물이 되었다. 단두대에 세워진 왕비. 그녀의 금발은 없었다. 온통 흰머리였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마저 바꾸어 놓았다. 갑작스럽든, 예견되었든 죽음보다 더한 스트레스가 있을까. 하지만 죽음의 그 순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삶을 더 절절히 느껴보고 싶어진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사람은 대개 죽음에 저항한다. 하지만 죽음을 수용하는 순간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삶을 즐길 수 있다. 남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야만 우리는 삶을 각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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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을 사형수에 비유한다. 인간의 실존은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형수다. 그중 몇몇이 매일 삶에서 처형당한다. 남은 사람은 그것을 지켜보면서 고뇌와 절망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인간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던져주려는 것이 파스칼의 의도는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오히려 인간은 유한함을 직시함으로써 올바른 사유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 파스칼과 도스토옙스키는 ‘순간의 영원성’을 말한다.

굳이 시한부 선고나 사형선고를 받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시한부 인생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한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각성은 모든 순간과 하루를 소중하게 만든다. 유한성의 직시는 인생의 질문을 ‘행복’으로 향하게 한다.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시도에 있다. 아르키메데스의 행복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하는 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리를 알아내려는 시도에 있었다. 그 순간순간이 없었다면 유레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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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으로 ‘사유’와 함께 ‘무한한 존재’에 대한 믿음을 든다. 파스칼의 이야기는 자칫 삶과 행복이 신앙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죽음 직시하고 포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근거는 없을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 박사는 정신과 의사면서 죽음학 연구의 대가이다. 그는 종교나 철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의사로서, 과학자로서 죽음을 관찰했다. 그는 죽음을 번데기가 나비로 탈바꿈하듯 우리의 생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라는 가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고 포용할 수 있는 통찰력을 준다. 이제 행복으로 가는 두 개의 문을 얻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직시’고 또 하나는‘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가능성이다.

처형 사건 이후 도스토옙스키에게 인생은 ‘5분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5분 동안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소중했다. 이제 삶을 허투루 살 수 없었다.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가능성은 지금의 삶을 더 소중하게 한다. 어제의 일이 오늘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생과 생은 서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5분의 삶이 하루를 결정하고 오늘의 삶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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