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을 기억하다④] 문화의 황금기,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의 성종 선릉4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5.30 14:26
  • 수정 2023.05.3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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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려무나, 꼭 가야 하겠느냐?
아니 갈 수는 없겠느냐?
까닭 없이 여기 있기가 싫어졌느냐?
아니면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몹시 애달프구나,
가려고 나서는 그 까닭을 알려나 주려무나
- ‘있으렴 부디’, 성종(成宗)

마른 하늘에 내리는 비. 촬영=윤재훈
마른 하늘에 내리는 비.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갑자기 파란 하늘의 한쪽으로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실비가 내린다. 설마 눈물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망연한 생각이 든다. 어찌 설명해야 하나. 원래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묘역이었으나 성종의 능자리로 정해지면서, 다른 곳으로 옮긴 후 들어온 왕, 어쩌면 멀쩡하게 있던 묘를 옮기고 들어와서 흘리는, 토신들의 눈물은 아닐까?

그는 단종을 폐위시킨 역모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7대 왕 세조 수양대군의 손자이며, 왕으로 추존된 의경세자 덕종과 인수대비 소혜왕후 한 씨의 둘째 아들이다.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 윤 씨의 명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 시절 문인들이 시조작품 등으로 공공연히 무인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함경도 영흥지방의 소춘풍(笑春風)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선상기(選上妓)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궁중의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성종은 대신들에게 그녀의 기재를 자랑하며 즉석에서 시조를 짓게 하였다. 이 권주가는 해동가요(海東歌謠)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다.

요순 태평 시대 어제 본 듯한 당송 시대 오늘 본 듯
예부터 사물 이치 밝으신 선비를 그냥 두고
제 분수 똑똑히 모르는 무사를 어이 내가 따르리

이 시조를 들은 무신들이 불쾌해하자 웃으며 바로 다음 시조를 지었다

앞 말씀 농담이오니 내 말씀 허물 마소서
문무가 같은 줄 나도 조금 아옵니다
어째서 용맹스러운 무사를 아니 따를 수 있겠습니까

이 시조를 들은 무관들은 흡족해하였으나 무관들이 삐지려고 하자, 다시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

제도 큰 나라요 초도 역시 큰 나라다
조그만 등국이 제나라와 초나라 끼였으니
차라리 다 좋은 일이라 제도 섬기고 초도 섬기리라

이 시조까지 모두 듣고 난 문관과 무관들은 모두 기뻐하며 기생 소춘풍의 재능을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왕 앞에서도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을 마음대로 희롱하며 대담함과 순발력 있는 재치, 그리고 연회까지 기분 좋은 분위기로 이끌며 즐거움까지 더한 기지가 일품인 기녀 시조 특유의 멋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성종 왕릉의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성종 왕릉의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있으려무나, 꼭 가야 하겠느냐?
아니 갈 수는 없겠느냐?
까닭 없이 여기 있기가 싫어졌느냐?
아니면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몹시 애달프구나,
가려고 나서는 그 까닭을 알려나 주려무나

- ‘있으렴 부디’, 성종(成宗)

여기에 성종의 인간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한다. 고향의 노모를 봉양하고자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는 유호인( 好仁)을 성종이 극진히 만류하면서, 신하에게 보내는 애틋한 마음마저 잘 나타나 있다.

특히나 ‘잡으며, 어쩔 수 없이 보내는’ 이 시 속에는, 임금이라는 절대 계급을 떠나, 효(孝)와 의(義), 신(信) 등의 절대 우선 가치를 공유하는 수평적 동질성의 품격까지 보인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서 성리학, 서화, 사예(射藝)에까지 능한 성종은, 정5품 홍문관 교리였던, 그의 사직이 못내 아쉬워하며, 향리인 의성 현령직인 종6품에 제수한다. 이 직급도 만만치 않은데, 과거에서 전체 수석 한 장원급제자에게만 내리는 최고 직급이었다.

특히나 조선 시대에는 3대에 걸쳐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에서 퇴출해 양인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나이 40~50에 이르러서라도 어떻게든 향시(초시) 등에라도 급제해야만 했다.

성종은 짧은 시 속에서 네 번이나 연발되는 의문구로 이별의 아쉬움을 더욱 간절히 나타내고 있는데, 직설적인 표현으로 임금이 지켜야 할 여러 법도를 벗어나 인간적인 인정미까지 넘친다.

성종릉 정자각. 촬영=윤재훈
성종릉 정자각. 촬영=윤재훈기자

성종은 우리 역사에 치적이 많은 임금으로 속하는데, 세종과 세조 때에 촉발된 초기의 문물제도와 법령들도 정비했다. 성종 5년인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1474년에 대전속록(大典續錄) 1492년에 완성한다. 여기에 1481년에는 여지승람(輿地勝覽), 1484년에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오예의(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고, 국가의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를 완성, 반포하는 등 많은 역사적 서적을 간행한다.

또 독서당(讀書堂), 양현고(養賢庫) 등을 설치하여 학문을 권장하며 젊은 선비들을 양성하고, 성균관에 전결(田結)과 서적을 내려 교육과 문화진흥에 힘썼으며, 기존의 훈구세력과 국정의 균형을 이루려고 했다.

여기에 성종은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바로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라고 불린 임금이기도 하다. 낮에는 ‘문화의 황금기’를 이룰 정도로 요 임금과 순임금처럼 정사를 돌봤지만, 밤만 되면 걸 임금과 주 임금처럼 주색잡기를 밝혀서 왕후 3명과 후궁 14명 사이에서 16남 15녀, 30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다. 왕은 38세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1494년 조성되었다.

무소불위의 임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할 수 있었던 시대, 팔도에서 가장 좋은 음식과 약초는 모두 궁궐로 모이고 왕의 변(便)은 매일 어의가 검사했건만, 정(精)을 상실해 가는 사내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약이 무효했으리라

여기에 끓이지 않은 권력에 대한 암투, 수직상승에 대한 양반들의 비원(秘願), 자기 딸이 성은을 입기 위해 간택에 목매달고 있었으니, 그 숨은 이야기 들은 후인 듯이 짐작할 뿐이다. 태종 이방원도 자식을 많이 둔 왕으로 12남 17녀를 두었으며, 왕자를 가장 많이 생산한 왕으로는 18명을 낳은 세종대왕이다.

성종의 능에는 정릉에는 없었던 수라간과 수복방이 있다. 정자각 뒤로는 신로가 있는데 왼쪽으로 ㄱ자로 꺾이면 성종 능으로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꺾이면 정현왕후 능으로 올라간다.

무성한 왕조의 이야기들이 들판에 널린 풀꽃들 같다. 촬영=윤재훈
무성한 왕조의 이야기들이 들판에 널린 풀꽃들 같다. 촬영=윤재훈 기자

성종 시대에는 조선이 대표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폐비 윤 씨의 일이다. 그녀에게 결국 사약이 내려지고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것은 피비린내 사는 사화의 전초전을 예비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정상적인 왕위를 누리지 못하고 중종반정을 당하게 된다. 이것을 옆에 누운 세 번째 계비인 중종의 모후 정현왕후 윤 씨가 허락하고, 한 울타리 안에 잠든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은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왕릉이 철저히 도굴된다. 이 사실을 선조도 몰랐고 조선군도 몰랐다. 이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선조 26년의 일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의병장 김천일이 수도 탈환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관악산에 주둔하고 있던 4월이었다.

급히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특공대를 조직해 현장을 조사했다. 선조는 관찰사 성영의 급보를 받고 4월 13일 날 알게 된다. 선조는 3일간 애도를 표하며 대신을 파견해 현장을 확인하게 한다.

“이 도적을 잊고 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천리가 없어지고, 인륜이 무너지게 되어 장차 다시는 사람 축에 들지 못할 것은 물론,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니, 자애로움을 베풀어 긍휼히 여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는 탄원서를 명나라에 보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원수를 갚아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왕릉의 기품. 촬영=윤재훈
왕릉의 기품.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선정릉은 일본군이 주둔 중인 한양 주변이라 현장조사가 매우 힘들었다. 김천일은 신임하던 이준경이라는 장교를 중심으로 30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였으며, 길 안내는 서개똥이라는 병사가 맡았다.

무덤 안에서는 시체가 한 구 발견되었지만 이미 승하한 지 50년이 지나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재궁(梓宮, 관)도 불에 타 유골들을 모아 1593년 국장을 다시 치렀으니, 성종과 중종은 두 번 죽은 셈이다. 첫 번째는 자연사였지만 두 번째는 시체가 불타 없어진 타살에 가까웠다. 세 군데 모두 유해는 없었다. 친족이 타살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자는 이런 가르침을 내렸다.

자하가 공자에게 묻기를 ‘부모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잠자고, 벼슬하지 않으며, 원수와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한다. 만약 원수와 시장이나 관청 같은 곳에서 만나면 무기를 챙기러 가지 않고 즉시 싸울 수 있어야 한다.’했다.

자하가 다시 묻기를‘청하여 묻습니다. 형제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원수와는 같은 나라에서 함께 벼슬하지 않으며 임금의 명령으로 출사할 경우에는 비록 원수를 만나더라도 싸우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자하가 또 묻기를 ‘가르침을 청합니다. 백부나 숙부 또는 종형제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앞장서서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본인이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면 무기를 잡고 뒤에서 도와야 한다.’했다.

- '예기(禮記)', 단궁

왕릉의 밤. 촬영=윤재훈 기자
왕릉의 밤. 촬영=윤재훈 기자

숲속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자그마한 건물이 있는데, <선정릉 역사문화관>이다. 너무 규모가 작아 귀엽기까지 하다. 내부에 특별한 진열품 같은 것은 없고 대부분 사진으로 채워져 있는데,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이 왕릉의 내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밖은 어둡지만 하절기라 관람시간이 8시로 늘어나 아직 한 시간여 남았다. 그런데 관리인 아저씨는 늦게 온 관람객이 불편한지 뭘 물어봐도 쳐다보지도 않은 체, 말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난다. 그동안 즐거웠던 마음에 약간 가시는 듯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만사유심조(萬事有心造)인걸, 마음속에 우담바라는 아니더라도, 작은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은 영속되리라. 길을 따라 땅바닥에 조명을 해두어 은은한 분위기까지 난다.

선정릉 재실. 촬영=윤재훈 기자
선정릉 재실. 촬영=윤재훈 기자

이제 주위는 거의 어두워진 것 같은데, 강남의 한복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 돌아가니 <제실>이 나온다. 어둠이 내린 마당은 단아하다. 담 밖으로는 누군가 지나가는지 가느다란 말소리가 들린다.

이 금싸라기 강남 한복판에 왕릉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숲속이 조성될 수 있었을까, 그 옛날 한적한 장소에 풍수를 골라 왕릉을 만들고 묻힌 자들은 이렇게 변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러나 그 덕분에 도심 안 이런 멋진 휴식공간이 되어 후세인들에게 푸른 공기를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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