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을 기억하다②] 역사의 라이벌, ‘중종과 조광조’, 정릉(靖陵) 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5.04 16:13
  • 수정 2023.05.2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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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도학(왕도) 정치의 개혁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나 자신의 뜻대로나, 

중종은 한 번도 정국을 제대로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이상이 있습니까? 

어떤 전통이 있습니까? 

과연 이 시대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조선 왕들의 거처, 창덕궁. 촬영=윤재훈
조선 왕들의 거처, 창덕궁.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왕위 초반, 중종의 권위는 실추되고 권신들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공신 지정이나 공훈까지도 마음대로 하는 파탄 지경까지 이르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느끼자, 중종까지도 갈아치울 수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치며 위협했다.

정통성이 허약한 왕은 즉위 이후 연산군 시절의 온갖 폐단들을 수습하려 노력하였으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전통적인 왕위 계승으로 오른 게 아니라 신하들이 주도한 쿠데타를 통해 추대된 왕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도학 정치의 조광조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유부단과 뒷걸음질로 점철되었다.

이후 이들을 견제해 보려고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들을 중용했다. 선비들은 요순시대를 꿈꾸며 청렴결백한 이상 정치를 해야 한다며, 중종을 설득했다. 기묘사화로 윤원형, 심정 등 훈구 세력 공신의 방자함을 견제하기 위해, 중종은 그들의 선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깨끗한 젊은 사림들의 등용과 왕권을 유지해야 하는 중종의 생각과는 갈수록 거리감이 커졌다.

조선의 수많은 벼슬아치 같은 잡상들. 촬영=윤재훈
조선의 수많은 벼슬아치 같은 잡상들.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당시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서화담 등 조선 유학의 거두들이 이미 원숙(元塾)의 경지를 뽐내고 있었고, 회재 이언적, 사암 박순 등 중견은 물론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이산해, 류성룡 등 신진 사림들까지 잉태되고 있었던 시대였다. 권력의 이동추가 관학 훈구파(기성세력)로부터 신진 사림파(신진 세력)로 이동하는 과도기였다.

왕권도 이미 바닥을 쳐서 김공저(金公著)와 이과(李顆)의 옥사 등이 일어났다. 김공저의 옥사는 의관인 김공저와 서얼 박경(朴耕) 등 일부 신진 사림들이 박원종, 유자광의 반정 후 행태에 분노해, 일부 정국공신을 제거하려 했다.

이과의 옥사는 중종 시대 처음으로 일어난 왕을 노린 역모였다. 정국공신으로의 책봉을 기대했는데 급이 떨어지는 원종공신으로 봉해지자, 공을 세우고도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한 일부 무장들과 종친들을 끌어들여 견성군을 옹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변자가 있어 모두 실패하지만, 중종반정 직후에 불안정한 정국과 공신들의 뛰어나지 못한 장악력 때문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권의 위상을 보여준다. 고변자들에게는 공훈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함께 처형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과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 봄날 떨어지는 벚꽃 마냥

세월을 희롱하며 일희일우(一喜一憂)를 거듭하고 있다

창덕궁의 후원. 촬영=윤재훈
창덕궁의 후원. 촬영=윤재훈 기자

재위 중후반부터는 중종의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중종 4년(1509)에 박원종과 2년 후에 유순정, 1년 후에 성희안 등 반정의 핵심인물이 잇달아 병으로 죽으며, 중종의 운신 폭이 넓어진다. 중종 8년(1513)에는 박영문과 신윤무가 무신들을 배척하는 문신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다, 이것을 들은 관노 정막개가 고변하면서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는 등 차례차례 역사에서 물러난다. 국방 분야는 정국공신의 관할이었으며 토지에 기반한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정국의 주도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무려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지난 1515년, 중종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치세를 열어보고자 했다. 그런 중종의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조광조였고 그는 도학 정치의 이상을 가지고 신 씨 복위권과 관련해 처벌을 주장하는 노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는데, 이는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중종과 뜻과 맞았다.

조광조는 소위 신진 사류라 불리는 성리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여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왕이 바꿔야 나라와 백성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경연에서 자기 생각을 전파하며 개혁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신임은 전폭적으로 매우 높아 조광조가 여진족 문제에 대해서 무리수를 뒀고 정광필과 무신 유담년에게 논박을 받았음에도, 그의 의견을 중론으로 채택할 정도였다. 소학(小學)을 보급했고, 오랫동안 사장(시나 문장) 중심주의로 진행해 왔던 과거 제도를 혁신적으로 없애고, 현량과를 실시했다. 사실 현량과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종의 조광조와 신진 사류에 대한 신뢰도는 강고했다.

조광조를 등용한 시기에 향약을 전국적으로 권장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고, 다양한 책들을 발간했으며, 

전라도, 평안도, 강원도에 양전 사업을 시행하고, 

북방의 진들을 보수하였다.

후원의 고적함. 촬영=윤재훈 기자
후원의 고적함.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반정을 주도했던 훈구파들은 자신의 권력이 침해될까 우려했고,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들과 대립했다. 이후 사림들의 소격서 혁파와 위훈 삭제(가짜 공신의 명단 삭제)까지 진행하자, 결국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조광조는,

'세종과 성종이 성군이었으나, 

선대가 혁파되지 않았으니, 이유가 있다’ 


라는 논리였다. 당대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던 세종과 아버지 성종을 논했으니, 역적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다. 현량과 역시 의도는 좋았으나 오랫동안 시행해 왔던 과거 제도의 향수가 남아있었으며, 사림 세력이 확대대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종 자신도 처음과는 달리 지나치게 이상주의로 흐르는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권위도 도전받고 있다고 느꼈다. 왕권 수호는 버릴 수 없는 이씨 가문의 오랜 전통이었을 것이다. 결국 1519년 중종은 기묘사화를 일으키며, 신진 사림들을 숙청한다. 위훈 삭제 직후의 일이다.

야사에서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 씨가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 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말을 써 개미들이 파먹게 한 뒤, 나뭇잎을 왕에게 바쳤다 그러면서 조광조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벌레들이 꿀이 묻은 부위만 먹는 게 아니라 나뭇잎 전체를 파먹거나, 나뭇잎은 남겨두고 꿀만 빨아 먹기 때문이다. 결국은 중종이 윤허하고 훈구 세력 대신이나 남곤 같은 온건 사림이 거든 사태가 아니었을까? 특히 병조판서 홍경주는 중종의 면전에서 쿠데타 등을 협박하며, 기묘사화를 압박했다는 설도 있다.

지존에 도전하면 곧 죽음이다. ‘장영실전’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지존에 도전하면 곧 죽음이다. ‘장영실전’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KBS가 방영했던 ‘역사의 라이벌’ 편을 보면, 끝내 요순시대 이상 정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조광조가 감옥에서 왕에게 보낸 저고리에 쓴 편지를 있다.

“정은 넘치고 말이 막혀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라고 읊조린다.”

그러나 중종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세력이 너무나 커 버렸다. 왕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기 집안의 천 년 왕위 계승이 지상에 목표가 아니었겠는가? 그것 앞에서는 세상의 어느 가치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한낱 필부(匹夫)의 생각이 앞서지 않았을까?

“반정을 부정하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를 내칠 것을 결정한 중종은 영의정, 병조판서 등의 주청으로, 사사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의 이상을 귀히 여기는 신하들의 강력한 주청으로 귀향으로 감형되어 전남 화순군 능주면으로 유배된다. 이제 다시 권력은 중전의 아버지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대신들이 장악하고, 그가 혁파했던 모든 것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삭제된 반정 대신들의 공훈은 다시 복적되었으며, 

과거를 대신하던 현량과는 폐지되고 

세종과 성종의 잘못을 말했던 소격서까지 복원된다.”

조선시대 귀양은 권력의 끝이었다. 촬영=윤재훈 기자
조선시대 귀양은 권력의 끝이었다. 촬영=윤재훈 기자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 등 지지하던 세력들은 모두 물러나거나 파직되어 그를 구명할 사람들이 다 없어졌을 때, 의금부에 갇혔을 때부터 꼭 한 달 만에 조광조는 사약을 받는다. 중종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를 이용하고 권신들을 내칠 때는 비정했다. 조광조는 감옥에서,

“내 관을 짤 때는 얇은 나무로 만들어, 먼 길을 가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게 하여라.”
라고 했다. 마침내 그에게 죽음의 명이 떨어졌다.

“권력을 지키기 위한 왕의 선택은, 꼭 옳은 것만을 취하지 않았다.”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내 집 같이 걱정하며, 밝고 밝은 햇빛은 세상을 굽어보는데 거짓 없는 이 마음을 어이 내어 비추리”

“왕도는 천도다. 조광조는 늘 그렇게 역설하며,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곧 왕의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현실정치에서는 늘 하늘의 도리보다는, 땅 위에 법칙이 우선하는 것 같다.”

창덕궁의 주궁, 인정전. 촬영=윤재훈 기자
창덕궁의 주궁, 인정전. 촬영=윤재훈 기자

왕권을 지키기 위한 중종의 선택 역시 달랐다. 그 선택이 재위 35년 옥좌를 지켜냈고, 한 사람은 4년이라는 짧은 관직 속에서 독배를 마셨다. 조광조는 경기도 용인군 선산의 차가운 땅속에 묻혔다. 하지만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이름은 더 오래 남아 선조 대에 복권됐고, 영의정에 추정되어 문묘에 배향까지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300여 군데나 기록되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이상이 있습니까? 어떤 전통이 있습니까? 과연 이 시대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이후에도 중종의 시대는 옥사와 피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조광조의 도학(왕도) 정치의 개혁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나 자기 뜻대로나, 중종은 한 번도 정국을 제대로 끌어나가 본 적이 없었다.”

1519년 기묘사화는 속전속결로 진행되면서도 그 과정에서 상당히 잡음이 많이 일어났고, 심정 등 관료와 홍경주 중심 정국공신들까지도 조광조를 죽이는 데 반대했다. 남곤 역시 처음에는 방관하나 싶더니 조광조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행동에 경악하여 관직을 버릴 각오로 반대했다. 중종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조광조 반대파와 일반 신료들까지 반대하는 등 대다수였다.

특히 남곤과 정광필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포기할 강수까지 둘 정도였다. 심정조차도 죽이지 말라는 대신들의 뜻에 따라 달라고 발언하는 등, 중종 외에는 누구도 조광조를 죽이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세월은 하릴없이 빨리도 흘러가며, 인걸(人傑)은 다시 오기 어렵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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