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을 기억하다①]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중종이 잠든, 정릉(靖陵) 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4.28 11:39
  • 수정 2023.05.0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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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광화문 연가’, 이문세

정릉. 촬영=윤재훈
정릉.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강남에 금싸라기 땅 위에 자리 잡은 두 명의 조선 왕과 한 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찾아간다. 이 비싼 땅 위의 넓은 초록의 공간, 왕릉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녹지가 가능했을까, 고맙기까지 하다.

그런데 녹지 철망을 돌아가면서 아무래도 눈에 익다. 언젠가 와본 듯하다. 가만히 보니 언젠가 한 번 다녀간 곳이다. 그런데 그때는 눈만 왔고 오늘은 필요에 의해서 공부를 미리 하고 온 것이 다르다.

그것이 패키지여행과 배낭여행의 차이점이다. 오랜 시간 세계배낭 여행을 하면서 그런 점들을 뚜렷하게 느꼈다. 내가 가보고 싶은 나라와 장소를 지도에서 직접 찾고 그곳에 관해 공부하고, 교통수단과 숙소를 예약하고, 뙤약볕 아래 땀을 흘려가며 두 발로 걸어 다닌 여행지는 몇 년이 지나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수첩에 적어둔 약간의 기록과 사진만 보면 그때의 기억들이 고구마 순에 매달린 열매처럼 줄줄이 붙어 나온다. 더구나 돌아와 여행서로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된다.

“기록이 기억을 이긴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촬영=윤재훈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촬영=윤재훈 기자

조선왕조에는 42기의 왕릉이 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왕릉의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이란의 사막 도시 테라즈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낙쉐 로스탐Naqsh-i Rustam>을 떠올렸다. 절벽 안에 잠들어 있던 5기의 왕들, 범인(凡人)의 접근과 도굴을 막기 위해 새들이나 날아와 앉을 수 있는 장소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네 왕릉은 모두 땅 위에 존재한다. 좌청룡, 우백호와 배산임수(背山臨水), 최고의 풍수 터에 수많은 백성의 피와 땀으로 늠름한 왕릉을 만들었다. 그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40기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역성혁명으로 무너뜨렸던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그의 첫 부인이면서 5명의 왕자의 어머니였던, 태조비 신의 황후가 잠들어 있는 제릉이 있다. 위치는 개성시 판문구역 대련리이다.

그녀는 6남 2녀를 두었으며 두 명의 아들이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과 세 번째인 태종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391년 공양왕 3년 조선 건국 10개월을 앞두고 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생전에는 큰 대우를 받지 못했으나 태조 이후 대부분 왕이 그녀의 자손들이니, 역사 속 승자는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아니라 신의왕후가 아닐까. 특히 신의왕후의 집안인 청주 한씨 조선 왕비들은 거의 대대로 아들을 낳았다. 여기에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 한씨는 신의왕후와 마찬가지로 조선 중, 후반기 왕비 중 가장 많은 아들인 6명이나 나아 왕실을 튼튼하게 했다.

왕릉에만 있다는 금송. 촬영=윤재훈 기자
왕릉에만 있다는 금송. 촬영=윤재훈 기자

여기에 비해 신덕왕후는 불행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계보다 21살 연하인 여인, 10대에 혼인하여 장남인 이방우보다 2살 어리다. 조선 최초의 왕비이며 이성계와 운명적 조우는 우물가였다. 호랑이 사냥을 나온 이성계가 목이 말라는지, 우물가로 달려왔다. 마침 한 낭자가 물을 긷고 있는데,

“낭자, 지나가는 길손인데, 목이 말라 찾아왔소. 물 한 바가지 줄 수 있겠소.”

말발굽 소리와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사내의 목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물을 한 바가지 떠, 휘늘어진 버들잎 한 줌을 훑어 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성계는 이 무슨 짓인가 하고, 여인네를 책망했다.

“아니, 목이 말라 달려왔는데, 이 무슨 망측한 짓입니까”

낭자는 갈증으로 먼 길을 달려왔는데, 급히 마시면 탈이 생길 것 같아 천천히 불어 마시라고 그랬다고 수줍게 대답한다.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내, 내심 감탄하여 찬찬히 살펴보니 미색이 대단해 한동안 넋을 잃었다. 거기다 지혜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사내의 마음이 동하기는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강 씨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 설화와 똑같다. 두 사람 다 나라를 세운 시조의 두 번째 부인이며 지방의 세력 있는 호족의 딸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하여 와전된 것이거나 많은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구조의 버들잎 설화가 함께 연결된 것일 수도 있다.

“진실한 역사는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항상 권력을 잡는 자에 의해서,

그 시절 세력자들의 탐심에 의해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목숨을 내놓고 사초를 기록하는,

그런 의협심을 발휘했으리라.”

정릉에 있는 석물들. 촬영=윤재훈 기자
정릉에 있는 석물들. 촬영=윤재훈 기자

그 후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 1396년 9월 15일 신덕왕후는 태조의 곁을 떠났다. 몹시 애통해하며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조석으로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었다. 그리고 절이 완성되자마자 능과 절을 돌아보는 게 일상사가 되었다. 그 후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과 저녁 시간을 보냈고 그녀의 능에 제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를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라 때에도 그녀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수저를 들었다. 참으로 애틋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능인 정릉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에 있었다. 이미 고려 시대부터 도성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으나,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경복궁 바로 옆에 가까이 두고 보기 위해서 ‘10리 밖, 100리 안’이라는 원칙마저 어기고, 원찰로는 흥천사(興天寺)까지 세운 것이다.

불교가 왕권의 비호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이므로 권위는 내세우는 데는 불교가 유교보다 더 유용했으니, 모두 왕후와 세자의 권위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포석일 수도 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파붇힌 난간석주. 촬영=윤재훈
권불십년(權不十年), 파묻힌 난간석주.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그녀의 최대 실수는 아마도 후처이면서 왕비가 된 어정쩡한 위치에서, 장자도 아니고 가장 막내인 방석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 욕심이 결국은 호전적인 다섯 번째 아들인 정안대군 이방원의 분노를 사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그런 그녀는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현 덕수궁 돌담길 옆에 있는 정릉의 지명을 제공했지만, 태종의 원한은 마음속에 사무쳤나 보다. 묘지를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하고, 얼마나 증오했으면 석물들이 광통교 다리에 거꾸로 파묻히게 방치했으며, 지금까지 세인의 발길 아래 짓밟히고 있다. 묘지도 후궁 격으로 격하되어 이장되었다가 현종 대에 겨우 왕비의 예로 복권되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광화문 연가’, 이문세

신의왕후는 태조와 더불어 조선왕조의 건국 시조이며 혈통 상으로 봤을 때도 정종부터 순종까지 26명의 왕은 전부 그녀의 직계후손이다. 추존된 왕들 5명까지 포함하면 31명이니 사실상 조선왕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전주이씨 대다수가 그녀의 직계후손이라 보면 된다.

왕릉의 철쭉. 촬영=윤재훈 기자
왕릉의 철쭉. 촬영=윤재훈 기자

오른손을 쓰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도는 게 편하다. 세 개의 왕릉 중 쉬엄쉬엄 공원길을 따라 정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수유, 목련, 벚꽃, 진달래들이 지고 있는 능에는 한창 철쭉이 만발하기 시작한 데, 그 빛이 여느 곳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선연하게 보인다. 세 명의 부인과는 헤어져 있지만, 부모님과 지척에서 같이 모셔진 왕.

중종은 한 울타리 안에 잠들어 있는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성종 25년에 진성대군으로 봉해졌던 세자, 1506년 9월 18일 자의든 타의든 충주 부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성희안 등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 세력들은 세검정에서 모의하고 창의문으로 해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중종은 연산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는데, 연산군은 비록 배다른 형제였지만 수시로 중종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저를 지어준다거나 양식들을 보냈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 앞에서 모든 것은 부질없나 보다.

연산은 조선 역사에서 단종과 더불어 최고로 불행한 역사 속 인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신하들이 눈을 흐리게 하고, 여인네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주지육림으로 세월을 보냈던 왕, 천하 간신배였다는 임사홍과 그의 자식 임숭재가 여인들을 데리고 와 그의 총기를 흐리게 하고, 결국은 폐군으로까지 몰고 간 장녹수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불행한 남자.

어머니였던 윤 씨는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고, 부인도 폐비가 되고, 자신마저 폐군이 되어버린 불행하고 쓸쓸했던 왕,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세자는, 왕위에 오른 후 그 사실을 알고 불행의 문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임사홍의 4남이었던 임숭재는 성종의 후궁 명빈 김 씨의 장녀 휘숙옹주의 남편인데, 그녀와 결혼하여 풍원위가 되었다. 그 후 채홍사로 활동하며 조선의 많은 미녀를 연산군에게 가져다 바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 임금의 행사에 맞먹을 정도로 사치스럽게 다닐 정도였다.

특히 연산군의 총애만 믿고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게 한 조정의 신하들을 모함하여 파면시키거나 곤장을 쳐 죽게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간들이 임숭재를 탄핵했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대간들을 질책하고 벌을 주었다. 그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05년 젊은 나이에 일찍 병으로 죽었는데 유언도,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전하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만이 한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중종반정 이후 부관참시 되었으며, 아버지 임사홍이 중종반정 후 처형된 걸 보면 병으로 안 죽었으면 아버지와 함께 처형됐을 것이다.

홍살문과 정릉. 촬영=윤재훈 기자
홍살문과 정릉. 촬영=윤재훈 기자

19세의 나이에 반란이 일어나고 그 세력들의 옹립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11대 국왕, ‘중종’, 그는 지지기반이 태생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훈구세력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대부분 쥐고 있었으니, 논공행상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첫 희생물로 첫 번째 아내인 단경왕후 신 씨를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비시켜야 했다.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수근는 단경왕후의 아버지이자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의 오빠였다. 엄청난 권력의 집안이었다. 부인은 권람의 딸이였는데, 그녀의 집안도 대단했다. 할아버지는 영의정까지 지낸 신승선이였으며, 할머니는 임영대군의 딸인 전주 이씨로, 권람은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세조의 쿠데타에도 가담하여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궁궐에 입성한 인물이다.

신수근의 혈족은 꾸준히 이어져 충무공 남이 장군과는 동서지간이다. 재주가 넘쳤던 남이 장군도 역사 속 불행한 인물이다. 단 4명을 뽑은 무과에 18세의 나이에 당당히 급제했지만, 26세의 젊은 나이에 반란으로 몰려 효수(梟首)를 당한다. 불과 8년의 기간에 조선 최연소 공조판서와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 ‘북정가’, 남이

신수근에게도 이 피비린내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있었을까? 1506년에 훗날 중종이 되는 신수근의 사위인 진성대군을 옹립하는 반정을 일으킬 때, 박원종의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 여동생의 남편이 왕인데 어찌 그런 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하여 "세자가 총명하니 믿어보자."라고 거절했는데, 막상 중종반정이 성공되고 3형제는 유자광 일파에게 살해당한다.

그의 말년이 불행하기도 하지만, 권력의 암투가 잔인하기만 하다. 당대 왕비의 아버지인데, 반정을 거절했다고 전 집안을 쑥대밭으로 멸하는 비정한 조선왕조의 인간군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야사에서는 이때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당신은, 누이(폐비 신씨)와 딸(중종비 단경왕후)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합니까?‘

라고 물었다고 한다. 여기서 신수근은 누이를 선택했다. 궁궐 밖으로 쫓겨난 왕비는 인왕산의 치마바위에 올라가 치마를 펼쳐놓고 앉아있으면, 중종은 그것을 애타게 궁궐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세월 잃은 까치 한 마리. 촬영=윤재훈 기자
세월 잃은 까치 한 마리. 촬영=윤재훈 기자

중종의 인간 됨은, 중종실록 27권, 중종 12년 1월 20일 병신년, 1517년 명나라 정덕(正德) 12년에 기록된, '조강에 나아가 <예기>를 진강하다. 공서린 등이 전의 일을 논하다'에 보면,

“조강에 나아갔다. <예기>를 진상하였는데, 검토관 조광조가 ‘백성은 임금으로 마음을 삼고 임금은 백성으로 몸을 삼는다.’라는 말에 따라 아뢰기를,

"임금과 백성은 본래 일체(一體)로서 마음과 몸은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으니, 임금은 마땅히 백성을 어린애처럼 보호하여 그들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그들의 몸을 자기 몸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는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니, 마땅히 교화로 인도하여 따르지 않는 사람이 교화를 따르도록 해야 하는데, 후세에는 교화시키지도 않고 먼저 형벌과 법을 쓰니, 잘못 선도하여 따르게 하는 본의가 없다." 하매, 장령 공서린(孔瑞麟)이 아뢰기를,

"민심의 좋지 못함이 요사이 더욱 심하여 종이 주인을 죽이고 아내가 지아비를 죽이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옛사람들은 비록 수령의 직에 있더라도 오히려 악을 방지하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더구나 위에서 어찌 마음 쓰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서린과 정언 황사우(黃士祐)가 전의 일을 극력 논하였으나 중종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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