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 삶과 죽음 사이를 걸어가는 낙이망우(樂而忘憂)의 길...망우역사문화공원

송점다 여행작가
  • 입력 2023.03.07 14:07
  • 수정 2023.03.0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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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는 '노원50+ 여행작가교실'을 수료한, 시니어 여행작가들의 작품을 연재한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와 숙녀’, 박인환

(망우역사문화공원 안내 전광판_중랑망우공간망우미디어홀, 촬영=송점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안내 전광판, 중랑망우공간 망우미디어홀.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경계를 허문 아름다운 숲길

[송점다 여행작가] 세월이 얼마나 빠른가를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와서 또 한 번 느꼈다. 이십여 년 전에는 공동묘지 터에 수없이 많은 봉분만이 빼곡하게 즐비해 있던 흙길이었다. 봄에는 친구 따라 야트막한 둔덕에서 쑥을 뜯고 용마 약수터에서 약수를 길어다 먹기도 했다. 5월이면 봄꽃잔치의 여흥이 가실 즈음, 바람에 날리는 하얀 아카시아꽃이 눈 다발이 되어 발길에 치일 때쯤, 그 향기에 눈앞이 아득했던 기억이 난다.

가까이 있음에도 역사 기행이라는 명분으로 오랜만에 방문하게 되었다. 초입부터 잘 정돈된 길이 낯설고도 이채롭다. 오르막길 정상에 슈트를 잘 차려입은 말쑥한 차림새의 신사 같은 ‘중랑망우공간’ 건축물이 나타났다. 중앙 통로에 사람 얼굴의 청동 조각상 한 점이 다소곳이 산 아래를 내려보고 있다.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근대미술의 3대 거장이라 꼽히는 조각가 권진규의 ‘자소상’이다. 그는 일본에서 부인과 활동하다가 집안 사정과 예술적 탈바꿈의 내적 요청으로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권진규 작가_자소상, 촬영=송점다)
중랑망우공간, 권진규 작가 '자소상'.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성북구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손수 짓고 작품에 열중했으나, 당시 한국 미술계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추상 조각파가 대세를 이룰 때였다. 아직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라, 함께 귀국하지 못한 일본부인과 8년 만에 만났다. 그녀가 재혼한 상태여서 큰 충격과 상실감을 느꼈으리라.

유난히 자존감이 강했던 그가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 편을 가르던 당시 미술계에 뿌리를 내리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창작열을 불태웠지만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조국 화단의 몰이해로 막다른 길에 서서 버티기도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는 51세의 나이에 자신의 아틀리에서 ‘인생은 공’이라는 글귀를 적고 생을 마감했다. ‘자소상’의 얼굴은 그의 실제 삶을 빚은 양, 긴장감이 서려 보인다.

‘권진규'는 흔히 리얼리즘 조각가로 알려졌으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이었다. 그는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종래에는 이를 무화(無化)하는 작품을 구현하고자 했다’ 100주년이 지난 그를 평하는 문구가 망우묘지에 묻힌 모든 예술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하다.

벌거벗은 몸통과 가지에, 돋아있는 힘을 가진 겨울 참나무

와 같았다는 권진규의 작품을 거쳐 망우까페의 문을 열었다.

(좌) 이중섭_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우) 이중섭_흰소, 촬영=송점다)
좌) 이중섭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우) 이중섭 '흰소'.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먼저 도착한 회원 몇몇이 따듯한 라떼 한잔을 앞에 두고 정담을 나누고 있다. 깔끔한 실내의 공간에서 향긋한 커피 향의 여운이 감돌 때 벽면에 이중섭의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그 옆에 ‘흰소’작품이 걸려있다. 인간 누구나가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하는 화가는 드물다고 했듯, 그의 그림에서는 아릿한 외로움이 전해져 온다.

(이인성_가을 어느날, 촬영=송점다)
이인성 '가을 어느 날'.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맞은편에는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목은 가을날인데 그림 속의 두 여인은 젖가슴을 드러낸 상태다. 여름날 대구에서 찍은 사진 속 두 여동생의 이미지와 한적한 가을 풍경을 접목한 그림으로 두 계절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조선 황토색계통의 유화로 고갱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밝고 강렬한 색감이 특징이다. 그런데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시절 궁핍했던 민초들의 삶이 오버랩 되는 것 같아, 서늘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온다. 이 풍요가 넘쳐 주체할 수 없는 시대에.

이인성 화가는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해,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 특선을 거듭하며 천재 화가로 주목받았다. 대구 출신으로 이화여고 미술 교사를 거쳐 이화여대에서도 강사 활동을 했다.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하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추천작가로 심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던 그는 1년 후 1950년 전란 때에 39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검문하던 경찰관의 총기 오발로 근대기 회화를 정점으로 이끌던 천재 화가를 어이없이 잃게 된 것이다.

(망우역사공원 내_유명인사 안내 가벽, 촬영=송점다)
망우역사공원 내 '유명인사 안내 가벽'.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회원들이 모두 <유명인사 안내 가벽>에 설치된 애국지사와 언론인, 문화유산의 틀을 세우신 분들의 사진 앞에 섰다. 유관순, 김말봉, 도산 안창호, 태허 유상규, 위창 오세창, 만해 한용운, 권진규, 이인성, 이중섭, 소파 방정환, 목마 박인환, 백치 아다다의 계용묵을 비롯한 많은 명사가, 그들의 숭고한 삶과 시대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타깝게 스러져간 분들을 위해 짧은 묵념을 하고 오른쪽으로 시작되는 인문학 사잇길로 향했다.

조금 걷다 보니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고 노래했던 박인환 시인의 묘비가 나타난다. 전망대가 있는 데크에 그의 모던한 모습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박인환 시인 묘 앞 데크 풍경, 촬영=송점다)
박인환 시인 묘 앞 데크 풍경.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단 한 권의 시집을 내고 목마를 타고 하늘로 가버린 그의 짧은 생애를 추모하며 ‘세월이 가면’을 읊조리다,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는 강사님을 따라 회원들 모두 합창했다. 차가운 겨울의 빈 하늘에서 그가 이 노래를 듣기라도 할까.

죽은 자에게도 등급이 주어진다고 했던가. 외지의 자리 이중섭의 묘는 비탈지고 움푹 팬 내리막길에 있다. 곱게 정리가 된 봉분과 그 옆에는 후배 조각가인 차근호가 아이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깎아 만든, 조각품이 자리 잡고 있다. 조각 받침돌엔 친구인 화가 한묵이 쓴 ‘대향 이중섭 화백 묘비’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중섭을 아끼는 동료들의 그리움이 표출된 하나같이 진귀한 예술품들이다.

키가 큰 소나무 아래 동료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이제는 편히 쉬고 있을까. 검은 조각상에 탁구공만 한 구멍을 내어 그 안에 캐모마일꽃과 잎이 자잘한 하얀 국화 송이가 꽂혀있다. 가냘픈 꽃잎이 찬바람에 쉬이 얼지나 않으려나.

(이중섭 화가의 묘, 촬영=송점다)
이중섭 화가의 묘.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망우리 사잇길을 따라 여러 기를 거쳐 돌무덤의 소파 방정환을 만나고 또 길을 걷는다. 바람막이로 비닐을 빙글 돌아가며 쳐 놓은 팔각정에서 가져온 커피 한 모금과 과자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어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한 독립 유공자이며, 서화가, 언론인이었던 위창 오세창의 묘로 올라갔다. 선생은 집안 대대로 조정에서 통역을 맡아보던 역관인 동시에, 조선말의 개화 사상가인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역매 오경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세창은 많은 서화를 물려받게 되고 그에 따른 안목을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서예와 전각 감식에도 따를 자가 없어 오랜 세월 가문에서 수집한 글과 그림을 정리해 엮은 책으로 <근역서화징>과 <근역화휘> 등이 있다. 우리나라 미술사에 없어서는 안 될 자료들이다.

특히 문화재 보존을 귀중히 여긴 그는,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의 전형필에게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워 평생 그 일에 매진하게 하는 큰일을 하였다. 이것은 한국 고문화 보존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전 사재를 털어 문화 예술품을 사들이고 있었던 간송에게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고 참된 길을 열어준 스승이었다.

간송은 휘문고에 다닐 무렵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을 만났고다. 그는 곧 문화재의 눈을 길러야 한다며 위창 오세창 선생에게 데려간 것이다. 전형필은 위창을 만나 비로소 어두운 곳에서 밝은 빛을 만난 듯, 마음의 눈이 번쩍 뜨였다고 했다. 문화로서 나라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했던 위창은, 간송과 같은 젊은이에게 우리나라의 미술사적 미래를 보았으리라.

23세의 간송이 43세의 고희동을 만나고, 이어 65세의 노대가 위창을 만난 것은, 연출자가 만든 시나리오보다 완벽한 조합이라 여겨진다. 수집한 고서와 고서화를 들고 찾아와 의견을 묻는 간송을 보며, 마른 땅의 단비처럼 생의 기쁨과 문화계의 푸른 신호를 보았으리라. 위창은

자네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속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라며 그 맑음에서 ‘물 흐를 간(澗)자를, 그리고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연휴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라는 명문에서 소나무 송(松)을 써서 간송이라는 호를 선물했다.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뜻을 전하려 했음이 아니었을까.

(오세창 묘소_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촬영=송점다)
오세창 묘소,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두 사람은 뜻을 모아 성북동 산줄기에 좋은 터를 마련하여 박길용이 설계하고 위창이 ‘보화각’(葆華閣)이라는 현판을 써서 함께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춧돌에는

이곳에 모인 것들, 천추의 정화로다

라고 유물의 소중함을 전달했다. 지금의 간송미술관은 모더니즘 건축양식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유물과 전통 미술품의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인정받은 장소로, 2019년에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돈이 얼마가 되던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젊은 청년 간송이 진정한 애국자였다면, 위창은 그를 있게 한 공로자였다. 사회장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비석에는

독립선언 33인 중 열하시고 서예와 고증의 거벽을 이루시니,
평생에 남기신 위공은 비길 바가 없다

고 좌우 후면에 여초 김응현이 썼다. 묘비의 정면에 새겨진 ‘위창 오세창 묘’ 전각 글씨가 참 예쁘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전자로 쓴 글씨라 한다.

많은 명사가 묻히신 곳에 다소곳이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으련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제 망우리 공동묘지는, 60여 분의 위인이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숲길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산책하는 힐링의 장소이다.

(망우리 사잇길 안내 표지, 촬영=송점다)
망우리 사잇길 안내 표지. 촬영=송점다 여행작가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무는 길’. 망우리 사잇길에서 먼저 간 이들에게 경계가 없는 위로를 받는 듯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망우리는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왕릉 터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야 근심(憂)을 잊겠노라(忘)”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걸어가며 즐거이 깨달음을 얻으라는 낙이망우(樂而忘憂)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내리막길을 걸을 때 어디선가 작은 소고를 빠르게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사력을 다해 나무통을 쪼아대는 아기 딱따구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홀로서기를 지켜보며 녀석이 먹잇감을 포획하기를 기대해 본다. 인문학의 산책길에서 어린 딱따구리도 낙이망우의 삶을 터득하게 될 날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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