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6] 기술관: 에디슨 vs 테슬라⑤...‘무선 전기에너지의 꿈’ 전기줄 없는 세상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3.27 13:34
  • 수정 2023.03.2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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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안의 기기로 세계 어디서나 교신’ 1백년 앞서 예언
광선무기, 파동치료, 에너지 전송, 외계교신 등 아직도 ‘잉태 중’

전기 에너지를 무선으로 주고받는 ‘꿈의 기술’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99년 테슬라는 콜로라도 스프링필드의 고지대에 새 연구소를 마련했다.

지진과 안개를 일으키고 번개를 불러들이는 전파연구를 맨해튼 도심에서는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테슬라는 전선을 통하지 않고 전기 에너지를 전송하는 무선에너지 전송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었다.

테슬라는 1899년 4월, 콜로라도 스프링필드의 교외에 독립된 연구소를 세워 무선통신뿐 아니라 전기에너지까지 무선으로 전송하는 기술을 시험했다. 에너지 전송을 위해 언덕 위에 세운 송출탑(왼쪽)과 전류발진장치로부터 전선 연결 없이 전기역학적 유도를 통해 점등된 조명등의 실제 사진. 발진기로부터 조명등까지 거리는 약 60피트(18m)였다. 퍼블릭도메인

무선통신과 무선 에너지 전송기술은 아주 다른 얘기다. 무선통신은 테슬라의 시기에 이미 많은 발명가가 시도하고 있었으며, 간단한 힌트만 던져줘도 금방 문제해결이 될 만큼 비교적 손쉬운 기술에 속했다. 실제로 테슬라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연구자들이 무선통신을 실용화했고, 그로부터 20~30년 사이에, 미국에만도 수백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났다.

그러나 에너지 전송만큼은 테슬라 이후 1백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각국은 전력의 장거리 송전을 위해 고압선을 유지하고 전봇대며 지하매설, 해저 케이블을 설치,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쓰고 있다. 또 실내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들은 번거로운 전기코드를 아직도 떼지 못하고 있다. 1백년 넘는 번거로움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야 겨우 코드 없는 핸드폰 충전기 같은 것이 등장했지만, 그것도 전극을 노출하지 않는다 뿐이지 기기와 충전장치를 반드시 접속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에너지 무선 전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테슬라는 1899년에 벌써 전깃줄 없이 전력을 전달하는 시스템을 연구하고 실제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스프링필드 연구소에서 테슬라는 50와트 백열등 200개를 전선을 연결하지 않은 채 불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전력 송출의 거리를 수천 킬로까지 늘려 장거리 전송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구 자기장에 에너지를 공명시켜 송출할 경우 그 전송거리는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공진작용은 그 원리상 에너지 크기를 무한까지 증폭시키는 것이 용이하므로 이 장치가 성공할 경우 발전소 몇 대 정도의 설비만으로 누구나, 어디서나, 무상으로(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무한하게 에너지를 공유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내비치기도 했다.

테슬라의 실험이 무사히 성공했다면 지금의 인류는 과연 (마치 자연의 태양 에너지 하나로 지구의 삼라만상이 생장하고 꽃피고 생태 순환을 이루어가듯) 막대한 화석연료를 불태우지 않고도 에너지 걱정 없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1900년부터 테슬라가 대서양 연안 와덴클리프에 세운 ‘국제방송탑’. 지하 40미터~지상 높이 57m. 방송과 무선통신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무한 에너지 전송이나 장차 외계와의 교신까지 염두에 둔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1917년 세상이 그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기도 전에 방송탑은 해체되어 단돈 몇천 달러의 고철값이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퍼블릭도메인
 1900년부터 테슬라가 대서양 연안 와덴클리프에 세운 ‘국제방송탑’. 지하 40미터~지상 높이 57m. 방송과 무선통신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무한 에너지 전송이나 장차 외계와의 교신까지 염두에 둔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1917년 세상이 그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기도 전에 방송탑은 해체되어 단돈 몇천 달러의 고철값이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퍼블릭도메인

스프링필드에서 순탄히 실험을 진행하고 에너지 전송기술에 확신을 얻은 테슬라는 바로 다음 해(1900년) 1월 뉴욕으로 돌아와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가슴 부푼 계획을 발표했다. 언젠가 메디슨광장 호수에서 선보인 것과 같은 무선조종 보트를 그해에 예정된 파리 만국박람회장에서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었다. 얼핏 들으면 이것은 단순한 계획 같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예전의 퍼포먼스와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다름 아니라 무선보트의 조종을 배를 띄운 연못가에서가 아니라 이곳, 뉴욕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거창한 프로젝트를 의미했다. 우선 무선신호가 뉴욕으로부터 멀리 대서양 건너 파리까지 도달하는 기술을 먼저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이를 실현할 기술이 스프링필드연구소에서 충분히 확인되었으며, 이제 필요한 시설(발전소와 송수신탑)을 뉴욕과 파리에 세우기만 하면 된다고 장담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전파송수신은 1901년에 가서야 마르코니가 구현했다. 그것도 잡음이 제거되어 믿을만한 신호가 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테슬라에 의하면 마르코니는 테슬라가 가진 특허기술 열 몇 가지를 도용한 것이었다. 또 전파에 사람의 음성이나 소리를 실시간으로 실어 보내는 라디오통신은 공식적으로는 1906년에야, 그것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구현되었다.

그 일을 테슬라는 1900년에 한꺼번에 구현하려 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이뤄낼 듯 보였다. 화이트하우스를 포함해 기대해볼 만한 큰손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사이, 가장 먼저 투자를 결심한 사람은 평소 테슬라의 실력을 신뢰했던 JP 모건이었다. 모건은 이 선제적 투자를 통해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계(라디오방송과 대륙 간 통신사업 등)의 분야에서 잘하면 최대의 지분과 우선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모건이 투자하기로 한 15만 달러는 뉴욕과 파리 두 곳의 시설을 다 완성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모건이 투자했다는, 자체가 다른 자본가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인으로서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롱아일랜드에 광활한 대지를 가지고 있던 부동산업자 와덴은 직접 돈을 투자하는 대신 자기 땅의 10%에 해당하는 20만평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외딴 삼림을 끼고 있는 곳이어서 재산 가치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바로 테슬라가 원하는 곳이었다. 테슬라는 이곳을 투자자 와덴의 이름을 따 와덴클리프(Wardenclyffe)로 명명하고 많은 자금을 들여 거대한 철탑을 짓기 시작했다. 몇 년에 걸쳐 그것은 지하 40미터, 지상 57미터의 높이로 위용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그것을 ‘국제방송탑’으로 알고 있었다. 밤이면 탑 위에 설치된 거대한 돔에서 자연의 번개보다 선명한 섬광이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곤 했다.

와덴클리프 바다 건너 파리 쪽 해안에, 그에 버금가는 타워를 더 세운다면 그의 야심 찬 꿈은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테슬라가 제안한 ‘꿈의 기술’을 실현하기에는, 아직 인류의 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테슬라의 계획이 너무 앞서나갔던 것일까. 그의 야심 찬 계획은 곧 장벽에 부딪쳤다.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군 조선소에서 테스트 중인 일렉트럼(테슬라코일) 구조물. 약 11미터 높이 타워에서 발생한 섬광이 15미터까지 뻗어나갔다. 실제 세워진 테슬라코일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지며, 시험 중인 탑 위 구(球) 안에 설치자인 에릭 오어(Eric Orr)의 실루엣이 보인다. wiki 퍼블릭도메인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군 조선소에서 테스트 중인 일렉트럼(테슬라코일) 구조물. 약 11미터 높이 타워에서 발생한 섬광이 15미터까지 뻗어나갔다. 실제 세워진 테슬라코일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지며, 시험 중인 탑 위 구(球) 안에 설치자인 에릭 오어(Eric Orr)의 실루엣이 보인다. wiki 퍼블릭도메인

1901년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영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대서양 건너에 ‘S’ 자를 뜻하는 걸 모르스 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하자 투자자들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와덴클리프 같은 거창한 시설이 없이도 무선통신이 가능한데 왜 굳이 테슬라는 막대한 비용을 쓰는 것일까. 그때까지 테슬라는 아직 에너지 전송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보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르코니의 무선만 해도 테슬라의 입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을 먼저 활용해 선수를 쳤던 게 아닌가.

급기야 테슬라가 JP 모건에게 자기 머릿속의 복안을 다 밝히면서 설득에 나섰지만, 모건은 약속한 금액조차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등을 돌렸다. 당대 투기자본의 대부 격인 모건은 이미 투자한 것을 거대한 손실로 치고 이제 테슬라의 늪에서 빠져나가기로 작정한 듯했다. 모건이 냉담해지자 테슬라가 의지했던 자금줄이 하나둘 막혀버렸다. 게다가 ‘부자들의 공황’이라는 불경기가 시작되었고, 물가 급등으로 자금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체코 프라하변전소 담벼락에 그려진 테슬라와 에디슨 그래피티. 오른쪽 옆면에는 처음으로 번개의 정체를 밝혀낸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Xth-Floor, 2021. 
체코 프라하변전소 담벼락에 그려진 테슬라와 에디슨 그래피티. 오른쪽 옆면에는 처음으로 번개의 정체를 밝혀낸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Xth-Floor, 2021. 

무기개발 거부한 에디슨, 미래무기 고안한 테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테슬라의 꿈은 자금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파리에 또 하나의 탑을 세울 엄두도 내기 전에, 와덴클리프에 근무하던 기술자와 직원, 인부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나버리고, 연구소는 정적 가운데 방치되었다. 결국 빚만 남게 되어 방송탑마저 채권자에게 담보로 넘겨주어야 했는데, 최종적으로 이 탑은 채무청산을 위해 해체되었다. 그가 일류 건축가들을 동원해 구축했던 와덴클리프 방송탑은 1917년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 폭파 해체되었다. 겨우 수천 달러의 고철값이 채권자에게 넘겨졌다. 본래 그의 땅도 아니었던 와덴클리프 영지는 땅 주인의 의사로 제삼자에게 매각되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테슬라의 꿈을 기리는 ‘문화유산’이 되었거나 거대한 인공번개를 시연하는 견학 시설로 삼을 수도 있었을 방송탑을 굳이 해체하기까지 과정에는 좀 이상한 부분도 있다. 세계 제1차대전(1914~1918)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이 타워가 독일 스파이들에게 이용되고 있다거나 외계인이 드나든다거나 하는 식의 흉흉한 소문이 출처도 없이 나돌아 민심을 불안케 했다.

만일 테슬라가 꿈꾼 에너지 무상 전송 계획이 현실이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20세기의 거대 에너지 기업들이 과연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테슬라의 끝없는 상상력과 아이디어에 매번 회의하거나 시기심으로 조롱하던 그 많은 매스컴, 경쟁자들, 과학자들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을까.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더 이상의 억측은 그만두기로 하자.

1916년 테슬라가 1천 달러도 안 되는 세금 체납으로 법정에 소환되었다. ‘테슬라가 세금문제로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발 빠르게 퍼져나가기도 했다. 누군가는 막 60대에 들어선 테슬라가 이제 모든 발명에서 손을 떼고 과학역사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테슬라가 거창한 계획을 한꺼번에 꾸미지 않고 마르코니처럼 소박한 무선통신을 먼저 완성해 세계를 열광시킨 후 다음 계획을 순차적으로 추진해 나갔더라면, 더 많은 것이 테슬라의 이름으로 남겨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테슬라는 그런 영리한(?) 계산을 하기에는 너무 순수한 성품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지난 20세기 1백여 년 동안, 가장 다양하고 걸출했던 니콜라 테슬라가 단 한두 가지 기술로 널리 이름을 떨친 발명가들보다 오히려 이름 없이 그늘에 가려졌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테슬라는 와덴클리프를 잃은 슬픔 이후에는 좀 덜 거창한, 비교적 단순하고 실용적인 아이디어들을 계속해 내놓았다. 30년쯤 후에 ‘레이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질 새로운 아이디어(마이크로파 추적장치)를 발표했고, 1차 대전이 진행되고 있는 대서양에서 독일 잠수함에 맞설 수 있는 무선 위치추적 장치와 무인 해안경비 함대의 아이디어들도 발표했다. 헬리콥터와는 다른 차원의 수직이착륙 항공기라든가 지금의 무인공격기(드론) 같은 개념의 장치들에 대한 아이디어도 발표했다. 그 아이디어들은 대체로 묵살되거나 무시되었는데, 이후 꾸준히 현실에서 기술적으로 응용되어 왔다.

만년에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료기기에도 관심을 가져 테슬라코일의 고주파 원리로 통증을 완화하는 전기요법 치료기를 개발했는데, 이 치료기는 꽤 인기를 끌었다. 테슬라의 전자기장 연구는 X-레이나 자기공명영상(MRI)과 의료장비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 테슬라가 자신의 고주파 자기공명 기술을 이용해 발생시킨 X-ray로 촬영한 왼손 투영사진. 189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의 뢴트겐이 X-ray 사진을 발표하자 테슬라는 그보다 먼저 찍은, 더욱 선명한 자신의 사진을 뢴트겐에게 보내주었다. 1900년 전후 쏟아져 나온 신세기적 발명품들 가운데는 테슬라의 원천기술을 이용한 것들이 많다. 퍼블릭도메인
니콜라 테슬라가 자신의 고주파 자기공명 기술을 이용해 발생시킨 X-ray로 촬영한 왼손 투영사진. 189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의 뢴트겐이 X-ray 사진을 발표하자 테슬라는 그보다 먼저 찍은, 더욱 선명한 자신의 사진을 뢴트겐에게 보내주었다. 1900년 전후 쏟아져 나온 신세기적 발명품들 가운데는 테슬라의 원천기술을 이용한 것들이 많다. 퍼블릭도메인

역대 대통령들과 꾸준히 교분을 맺어온 에디슨은 1차 대전 중 해군 자문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싫어하는 비폭력평화의 지지자였다. 공격무기 개발을 원하는 정부의 요청에 대하여 ‘방어무기에 대해서만’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에디슨은 평생 2천 건에 달하는 발명을 했으면서도 ‘사람을 죽이는 전쟁무기는 단 한 건도 발명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토머스 에디슨을 미 해군의 기술자문을 위한 위원회의 의장으로 위촉했다. 에디슨은 공격무기 개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요청을 수락했다. 에디슨이 해군 사령관의 안내를 받아 함정을 시찰하고 있다(가운데 정장차림). 퍼블릭도메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토머스 에디슨을 미 해군의 기술자문을 위한 위원회의 의장으로 위촉했다. 에디슨은 공격무기 개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요청을 수락했다. 에디슨이 해군 사령관의 안내를 받아 함정을 시찰하고 있다(가운데 정장차림). 퍼블릭도메인

테슬라도 기본적으로는 평화주의자다. 그의 조국. 고향 스밀란은 한때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이었고, 유고슬라비아이기도 했고, 지금은 크로아티아가 된, 약소민족 세르비안 출신으로서 ‘반전 평화’에 대한 염원은 좀 더 각별했을 것이다. 독일을 상대해야 하는 미군을 위해 전술무기 아이디어를 꽤 많이 내놓은 데에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심리도 있었을 것 같다.

테슬라의 고향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지난 세기 몇 번의 변천을 거쳐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속해 있다. 그 결과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는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테슬라를 기념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 화폐 및 조지아 기념우표. GNU free=wiki .퍼블릭도메인

한편으로 전쟁의 미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전망을 내놓았다. ‘미래의 전쟁은 화약이 아닌 전파(전자)무기에 의해 수행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사람 대신 다양한 무인 장비들끼리 전투를 치를 것’도 예상했다. 또 고주파의 광선을 사용하여 적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설비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그가 ‘광선무기’를 계획했다는 설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테슬라의 예언을 직접 듣고 그린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면 마치 ‘트랜스포머’나 ‘우주전쟁’ 같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무기와 관련된 디자인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고, 단지 설계에 그친 대다수 아이디어가 숙소호텔의 개인 캐비닛으로 들어갔다.

그 기술들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것이어서 미국 정부도 관심을 가졌다. 테슬라가 죽었을 때 연방수사국(FBI)이 캐비닛의 서류들을 놓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가져가 검토했기 때문에, 이후 이 천재가 남겨준 ‘비밀무기 설계’ 가능성과 관련하여 다양한 상상과 음모론이 꾸준히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테슬라가 장차 ‘우주시대’에 대비하여 설계했다는 ‘입자 빔’ 관련 기술들은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부쳐져 왔다.

미국 우주사령부(USSF, 왼쪽)와 러시아 우주방위군(KBP)의 휘장.

테슬라의 시야는 스케일이 좀 컸다. 자기 민족의 독립이나 세계대전 같은 전쟁에도 관심을 두고 가슴 아파했지만, 단지 그것만을 언급하거나 국가 간 전쟁에만 대비하지는 않았다. 테슬라는 인류의 전쟁이 조만간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는데, 이르면 2035년, 늦어도 2100년이면 인류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관심은 일찍부터 지구 바깥까지 향했다. 미국에서는 1985년 공군우주사령부가 발족하였다가 2018년 12월 독립된 우주군(U.S. Space Force; USSF)으로 분리되었다. 러시아도 2015년부터 국방부 산하에 ‘우주군’을 독립시켰다. 테슬라가 디자인한 미래무기들이 은밀히 연구되고 있는 곳은 바로 이런 곳일 지도 모른다.

미국의 나이아가라폭포에 최초로 테슬라의 수차가 설치된 것을 기념하여 나이아가라 주립공원에 설치된 테슬라 조각과 조형물. 1976년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미국에 선물한 것으로,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조각가 프라노 크르시니의 작품이다. 사진 ⓒDaniel Mayer 2006. via wiki 공개사진
미국의 나이아가라폭포에 최초로 테슬라의 수차가 설치된 것을 기념하여 나이아가라 주립공원에 설치된 테슬라 조각과 조형물. 1976년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미국에 선물한 것으로,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조각가 프라노 크르시니의 작품이다. 사진 ⓒDaniel Mayer 2006. via wiki 공개사진

비둘기를 사랑했던 고독한 수도자

세기의 천재들에게도 세월의 압박은 예외가 없었다. 그 무렵엔 대학마다 물리학과 공학관련 학과들이 생겨나면서 과학기술을 ‘학문’으로 다루는 과학자들이 늘어났다. 기술 현장에서 잔뼈가 굳은 에디슨이나 테슬라 같은 발명가들은 ‘물리학’이란 이름으로 이론을 연구하는 신세대 과학자들(아인슈타인을 포함하여)로부터 구세대 취급을 받았다. 신세대들의 관심은 핵융합 기술이나 양자이론 같은 것에 집중되고 있었다.

60세가 조금 넘은 무렵부터 테슬라는 사람보다는 공원의 비둘기들과 더 친밀하게 지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설계도를 그렸지만, 더 이상 이를 실험하거나 만들어볼 연구실도 자금도 없었다. 가장 흉허물 없이 지내던 마크 트웨인도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테슬라는 매일 공원에 나가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었고, 그때마다 비둘기들은 그의 손이나 어깨에 내려앉아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다.

1923년인가, 그가 사랑했던 흰 비둘기가 죽었는데, 그는 이 비둘기에 대해 ‘마치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 사랑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 녀석은 내가 어디에 있건 말건 나를 찾아냈지. 그 비둘기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르기만 하면 내게로 날아오곤 했어. 나는 그 녀석을 잘 알았고 녀석도 나를 잘 이해했지… 그 비둘기가 죽자 내 삶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았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수천 마리의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었어.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오.”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테슬라의 고향 생가 기념관 뜰에 세워진 테슬라 기념 조각상 (Mile Blaževi , 2006년). 두 손에 들고 있는 쪼개진 구는 ‘인공적인 공진작용으로 지구라도 반쪽으로 쪼갤 수 있다’는 테슬라의 말을 상징하는 듯하다. GNU free 공개사진=wiki commons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테슬라의 고향 생가 기념관 뜰에 세워진 테슬라 기념 조각상 (Mile Blaževi , 2006년). 두 손에 들고 있는 쪼개진 구는 ‘인공적인 공진작용으로 지구라도 반쪽으로 쪼갤 수 있다’는 테슬라의 말을 상징하는 듯하다. GNU free 공개사진=wiki commons

테슬라의 만년은 쓸쓸했다. 평생 독신으로 호텔생활을 했는데, 80세쯤부터는 경제적으로도 핍절했다. 비서도 없이 지내며 크래커와 우유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늘었다. 밀린 호텔비는 테슬라의 후원자들이나 그에게 빚을 진 전기회사들이 돌아가며 대납하는 식으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이 세기의 명사를 홀대하지 않으려는 호텔 측의 호의도 있었을 것이다. 1943년 1월7일 테슬라는 오랫동안 묵고 있던 ‘뉴요커호텔’ 자신의 방에서 감기기운을 보이며 홀로 누워 잠들었다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86세며, 호텔비는 여전히 수백 달러가 밀려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의존한 자료는 캘리포니아의 과학저술가 마가렛 체니가 쓴 <니콜라 테슬라>(Tesla: Man out of time)란 평전이다. 양문출판사가 한글판(2002년)을 냈다. 테슬라의 일생을 매우 잘 요약한 발문이 책 내지에 적혀 있어 옮겨본다.

‘테슬라의 꿈은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다른 행성에 존재한다고 믿는 생명체와 소통하는 것이었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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