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6] 기술관: 에디슨 vs 테슬라③...에디슨 자본가에 굴복, 테슬라 ‘死卽生’으로 승리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2.28 16:43
  • 수정 2023.03.1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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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의 독점야욕에 맞선 웨스팅하우스, ‘1백 년의 양강(兩强) 구도’
막 내린 전기전쟁, 사실은 협력과 공존...직류 교류 모두 살아남아
대통령들과 사귄 에디슨, ‘뉴욕 400’ 멤버였던 테슬라, 교우도 차이

조작된 재정난...에디슨 경영권을 잃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웨스팅하우스’와 승부를 가리기도 전에 ‘에디슨일렉트릭’은 매출이 떨어지고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예전 같으면 금융시장에서 얼마든지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지만, 웬일인지 자금줄도 막혀버렸다. 주식시장에서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웨스팅하우스를 꺾어보려고 모든 방법을 시도하는 동안 경영에 허점이 생긴 것이다. 에디슨은 예전부터 종종 자금 융통을 의존했던 금융계의 큰손 피어스 모건(J.P. 모건)의 제안에 따라 톰슨-휴스턴사와 합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디슨전기회사가 사라지고 새 회사는 ‘제너럴일렉트릭(GE)’이란 간판을 걸었다. 모건의 수하인 찰스 코핀이 전문경영인으로 들어왔다. 1892년 2월이니, 시카고박람회 이전에 이미 에디슨은 회사 경영의 주도권을 잃은 것이다.

뉴욕 인근 멘로파크(Menlo park)에 있던 에디슨연구소의 현재 모습. 멘로파크 전체가 에디슨전기의 실험과 제작시설이었다. ⓒwiki 퍼블릭도메인
뉴욕의(뉴저지) 멘로파크 연구소를 소개한 유명 일러스트레이트 신문의 지면. 1886년 1월 눈 덮인 전경과 연구실 모습 등이 함께 소개돼 있다. 퍼블릭도메인

순전히 에디슨의 실수 때문이었을까. 그의 실수가 있다면 테슬라와의 대결에 골몰한 나머지 자신의 회사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뿐이다. 참모들이 돈 걱정을 시작했을 때 “나는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라는 식으로 흘려듣지 말아야 했다. 회계담당자의 걱정은 그 이상으로 심각했다.

대체 잘 나가던 에디슨일렉트릭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회사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의 배후에는 투기자본(당시에는 없던 말이지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헤지펀드’)들의 음모와 공작이 있었다.

JP.모건의 수하인 코핀은 GE를 설립한 후 웨스팅하우스에도 접근했는데, 당시 웨스팅하우스가 코핀을 만난 후 다우존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의 유명 금융저널리스트 클라렌스 배런(다우존스 사장을 지냄)에게 털어놓은 얘기를 들어보면 에디슨회사가 자본에 먹힌 경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코핀은 나에게 자신이 어떻게 주식 가격을 떨어뜨려 톰슨과 휴스턴의 회사를 빼앗았는지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주식들의 가격을 일부러 떨어뜨려서 톰슨-휴스턴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에 의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지분에 비례한 새로운 주식을 받을 권리를 포기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당신의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당신을 신뢰할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코핀은 또 웨스팅하우스에게 가로등 가격 6달러를 8달러로 올려 추가되는 이익으로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줄 수 있다는 등의 조언도 했다고 한다. 모건을 비롯한 소위 ‘금융자본’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전기뿐 아니라 철도 석유 석탄 철강사업 등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발명왕 에디슨을 빛을 가져온 마법사에 비유한 1879년 뉴욕데일리 신문의 삽화(왼쪽)와 1878년 31세의 에디슨. 퍼블릭도메인

건실한 사업가 웨스팅하우스는 다행히 큰 위험을 피해 갔지만 당장 부도 위기에 몰려 있던 에디슨은 금융업자들의 음모나 신뢰성 여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GE의 출범을 보도한 업계 전문지는 또 이렇게 운을 띄웠다.

‘소문으로 떠도는 것처럼 웨스팅하우스도 조만간 새 회사에 흡수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아있는 1천600만 달러의 자금 중 상당 부분이 적당한 시기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기 위해 준비된 것으로 관측된다.’

이 기사 자체에 돈 장사꾼의 입김이 들어가 있음이 분명하다. 웨스팅하우스 자신도 처음 듣는 회사 위기설. 근거도 없고 출처도 알 수 없는 악소문을 먼저 퍼뜨려 주가를 떨어뜨린 뒤 손쉽게 권리를 차지하는 것이 1백 년 전에도 이미 검은 자본가의 수법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백했다. 장차 미국 전역, 그리고 지구촌 전체가 전기 시스템을 쓸 것을 내다보았다. 모든 전기회사를 하나로 묶어 연년세세로 무한의 이익을 독점하는 ‘전기제국’을 만들어보려는 것이었다. 이때 만약 웨스팅하우스가 에디슨처럼 두 손을 들었더라면 그들의 목적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너럴일렉트릭을 상징하는 뉴욕주 스케넥터디 카운티의 연구소. 퍼블릭도메인

‘돈보다 의리’… ‘통 큰 결단’으로 회사 살린 테슬라

탐욕스러운 투기자본의 사주를 받아 ‘조준공격’에 나선 기업사냥꾼의 공세 앞에서 웨스팅하우스는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

시장의 악소문과 돈 장사들의 공격적인 비판에 웨스팅하우스의 주주들도 불안감에 빠졌을 때, 그들은 테슬라에게 돌아가는 로열티가 장차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는 일부 언론의 부추김을 듣고, 특허사용료 계약을 파기하도록 웨스팅하우스를 압박했다. 웨스팅하우스는 로열티가 이미 판매가격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 될 게 없다고 그들을 설득했지만, 투자자들의 계속되는 압박과 불신 앞에 무언가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가 적당한 대응을 못 해 투자자들이 돈을 빼가기 시작하면, 이후 결과는 투기자본들이 의도하는 시나리오대로 되고 말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마지못해 테슬라를 방문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더 이상 투자자들의 우려에 버틸 수 없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의 결정이 웨스팅하우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 같군요.” 웨스팅하우스의 말을 듣고 테슬라는 단 두 가지를 물었다.

첫째, 자신이 계약을 포기하기만 하면 회사는 안전하게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 둘째, 회사가 유지되면 자신의 다상교류시스템은 계속하여 세상에 확산할 수 있는가. 웨스팅하우스는 회사로 존속할 수 있고, 회사가 존속하는 한 다상교류시스템은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테슬라가 결론을 내렸다.

당신은 나의 친구고,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때 나를 믿어주었지요. 당신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오. 당신의 기술자들이 새로운 흐름을 보지 못하고 반대할 때도 당신은 내 뜻을 따라주었습니다. 친구로서 나와 함께 한 것입니다. 내가 만든 시스템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당신과 당신의 회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이 계약서를 찢겠습니다.

웨스팅하우스가 보는 앞에서 테슬라는 책상 위에 꺼내놓은 계약서를 자기 손으로 찢었다.

이제 특허사용료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마십시오.

1888년 웨스팅하우스사의 회사 카탈로그(위)와 1917년 제너럴일렉트릭의 전기제품 사용 가이드 책자. 19세기 말 전기회사 업계에 투기자본에 의한 흡수합병의 광풍이 휩쓸고 간 뒤 살아남은 웨스팅하우스전기는 제너럴일렉트릭과 함께 미국 전기업계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퍼블릭도메인

계약이 이행되던 10여 년간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특허 사용료로 받은 금액은 21만 달러를 넘었다. 교류시스템의 확산과 함께 앞으로 얻을 이익이 얼마나 더 커질지를 예상하면 수백만 달러를 쉽게 넘어가는 미래 수익을, 테슬라는 우정과 신뢰의 이름으로, 한순간에 찢어버린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했고, 기업사냥꾼들의 화살을 피해 모여드는 관련회사들과의 합병을 통해 회사의 몸집은 더욱 커졌다. 이제 웨스팅하우스는 투기자본의 공격을 실력으로 물리칠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테슬라의 ‘통 큰 결단’은 제너럴 일렉트릭의 ‘전기 제국주의’ 야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후 1백 년 동안 미국의 전기산업은 GE와 웨스팅하우스가 경쟁하는 양강 체제로 굳어졌다.

‘돈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은 에디슨이 아니라 테슬라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는 자기 기술을 개발하여 실험하는 데 필요성을 느끼면 여기저기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고, 자신의 깔끔한 성격에 맞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여느 부자들처럼 돈을 쓰며 살았지만, 돈 자체에 그리 집착하지는 않았다. 여유가 있을 때는 친구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돈을 빌려주거나 지원하기도 하고 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최소한 돈보다는 우정이나 의리, 인간의 품격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연구실에 출근할 때도 반드시 정장을 차려입었고, 식당에서는 반드시 18장의 린넨 냅킨을 사용하여 나이프와 포크, 접시 등을 자기 손으로 닦고 나서 먹었다. 이 습관은 좀 강박적이기도 한데, 포크에 찍은 음식의 양이 정확하게 원하는 만큼인지를 눈대중으로 확인한 후에 입에 넣었다. 이런 습관들 때문에 그는 ‘별종의 인간’으로 보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가 ‘금성에서 온 외계인’일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의 유난스러운 습관들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다만 거창한 연구를 위하여 투자가들에게 몇만 달러나 10만 달러 이상의 큰돈을 요청하는 일은 몇 번 있었지만, 부자가 되는 일에는 큰 욕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더 들어보자.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와 처음 손을 잡을 때 기술특허의 독점 사용을 대가로 1백만 달러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사실 그만한 가치는 있는 계약이다). 그런데 테슬라가 실제로 그런 거금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테슬라가 만년에 가난하게 지내고 있을 때, 그를 만난 몇 사람은 테슬라가 지급 유효기간이 만료된 웨스팅하우스 명의의 1백만 달러짜리 수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테슬라는 실제로 1백만 달러 수표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상징적 기념품처럼 보관해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쟁 아닌 동행… 직류와 교류의 공존

1893년 시카고-콜롬비아 박람회를 통하여 에디슨의 직류와 테슬라의 교류는 치열했던 ‘전류전쟁’의 막을 내렸다. 교류의 승리. 테슬라가 에디슨을 이겼고, 웨스팅하우스가 제너럴일렉트릭을 이긴 결과다. 하지만 그것으로 전류전쟁이 끝이 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1백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 결과를 살펴보자면, 이 두 가지 전류 방식은 애당초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전력의 기본 인프라는 발전소부터 개별 세대까지 교류시스템을 통해 배급된다. 교류라야 대량의 전력을 고압으로 송전하여 손실 없이 소비자들 가정까지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들이 사용하는 대다수 전자기기는 기기에 딸린 정류 장치를 통해 변환시킨 직류의 힘으로 작동한다. 저압의 직류라야 전자기기들을 안전하고 손상 없이 오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에 들고 다니는 휴대용 기기도 모두 배터리에 담긴 직류로 작동한다. 전차, 전기자동차들도 장거리 열차가 아니면 직류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서울시 내에서만 운행되는 서울 지하철은 주로 직류를 사용하며, KTX 등 장거리를 운행하는 열차들은 교류를 사용한다. 효율과 안전성 등을 고려한 전문 기술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류와 직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거나 중요하다는 식의 비교는 현실적인 얘기가 될 수 없다. ‘좋은 전기 vs 나쁜 전기’라는 비교는 더더구나 어불성설이다.

전력공급의 기본수단이 교류로 확정된 뒤 테슬라의 기술이 들어간 교류발전기는 미국 전역에 설치되었다. 사진은 1924년 미국 워싱턴주 스카짓강에 완공된 조지댐의 발전기.
퍼블릭도메인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은 (당사자들에게는 치열한 생존경쟁에 가까웠지만)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직류 시스템을 이용해 전기·전자 기술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에디슨, 교류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테슬라 두 사람이 모두, 20세기 인류의 손에 ‘제2의 불’을 안겨준, 중대한 공로자들이란 점만은 분명하다.

에디슨 '전기자동차', 헨리 포드 '가솔린자동차'에 밀리다

아직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에디슨 만년의 사진을 보면 대통령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꽤 여러 장이다. 에디슨은 주로 성공한 기업가들과 절친했다. 그중에서도 1910~20년대 사이에는 포드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1863~1947)와 밀접했다. 60대의 에디슨은 창업에 도전하는 자수성가형 벤처사업가들의 우상이었다. 40대의 헨리 포드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이라는 면에서 에디슨과 잘 통하는 캐릭터의 사업가였다.

당시 전기자동차는 내연기관의 자동차들보다 잘 나갔다. 에디슨의 전기자동차는 이미 1881년에 첫선을 보였다. 189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마차보다 빠른 시속 30km를 달성했다. 1990년대 영국 런던을 돌아다니는 택시들은 전기차가 주종이었고, 1900년 무렵 미국에서도 10만 대의 자동차들 가운데 1/3이 전기자동차였다.

특히 택시들은 대부분이 전기차를 썼다. 그 대부분이 에디슨 기술로 만든 제품이고, 제너럴일렉트릭은 뉴욕 곳곳에 전기충전소를 세워 사용자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GE는 또 배터리 성능을 개선하여 고성능의 이차 전지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시험운행에서 이 배터리를 장착한 자동차는 한 번 충전으로 1천 마일(1,600km) 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 이 정보가 맞는지 몰라도, 사실이라면 경이로운 성능이다. 마차 수준의 가벼운 차체와 차체에 비해 큰 배터리 용량을 가정하더라도 말이다. 에디슨은 이 자동차를 1910년부터 출시할 계획이었다.

에디슨(왼쪽)이 새로운 이차 전지 개발로 한번 충전에 1천 마일을 달리는 자동차를 개발한 뒤 시험 자동차와 함께 찍은 홍보사진. 1910년 미국역사박물관 소장. 퍼블릭도메인.

하지만 계획은 틀어졌다. 에디슨전기회사의 직원으로 시작해 자동차 제작기술을 익힌 헨리포드가 독립하여 자동차회사를 세운 후 1908년, 대중적인 가격의 가솔린 자동차 ‘모델-T’를 내놓았다. 그러자 시장이 변해버린 것이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은 최초로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하는 생산라인을 설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효율적으로 조립되는 자동차는 그만큼 가격도 낮아졌고, 시민들은 대단한 부자가 아니라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이 뒤늦게 사들인 텍사스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와 연료비가 저렴해진 것도 큰 요인이었다. 에디슨의 전기차는 차량가격이나 연료 유지비용 측면에서 새로 나온 가솔린차와 경쟁할 수가 없었다. 가솔린차보다 먼저 대중화되었던 전기차가 이후 1백 년 동안이나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다.

경쟁심과 승부욕이 충만했던 30~40대의 에디슨 같으면 (테슬라에게 그랬듯) 필시 용납하지 못했을 일 같지만, 60대의 에디슨은 더 이상 싸움닭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헨리 포드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친구로 지냈다.

에디슨 자동차 왕 헨리 포드 ‘오토캠핑’을 개발하다

1914년부터 에디슨은 여름마다 헨리 포드와 함께 포드 자동차 모델-T를 타고 ‘오토캠핑(autocamping)’ 여행을 다녔다. 뉴욕 인근은 물론 캘리포니아 등 꽤 먼 거리까지 아직 초보적인 자동차에는 가혹한 환경의 비포장 시골길을 달려 산장이나 해변 등에서 캠핑을 즐겼다. 여기에 자연박물학자 겸 작가인 존 버로우와 타이어제조업자 하비 파이어스톤도 가세했다.

에디슨은 한때 부하 직원이었던 헨리 포드의 성공 후에도 기업가로서 절친했다. 그들은 1914년부터 10년 동안 포드사의 ‘모델 T’ 자동차를 타고 여름마다 오토매틱캠핑을 다녔다. 1921년과 24년에는 현직 대통령까지 캠프에 초청했다. 사진은 1921년의 캠프. 앞줄 왼쪽부터 헨리 포드, 토머스 에디슨, 워렌 하데 대통령, 하비 파이어스톤. 퍼블릭도메인

에디슨은 언젠가부터 방랑자(vagabond)를 자처했고, 포드도 그를 따라 방랑 취미를 가졌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로 시골길을 누빔으로써 대중에게 자동차의 편의성을 알리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도구와 연료를 실은 트럭, 요리사, 사진사뿐 아니라 기자들까지 초청하여 여러 대의 차량이 함께 이동했다. 자동차 자체가 구경거리이던 시절에 시골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아니면서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이를테면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에디슨과 헨리 포드, 그들이 소도시에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손을 잡거나 연설을 부탁하거나 기념 사인을 받아 가려고 줄을 섰고 지역신문은 인터뷰를 실었다. 1921년에는 워런 하딩 당시 대통령까지 캠프에 초청했을 때는 전국의 신문 헤드라인에 그들의 사진이 일제히 내걸렸으니 홍보효과는 만점이었을 것이다

많은 미국인이 모델-T 자동차를 사서 그 유명인들처럼 휴가 캠핑에 나섰다. 1924년에는 미국 전역에 조성된 오토캠핑장이 2천3백 개나 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들의 휴가는 더 이상 화제가 되지 못했고 에디슨은 이제 70대 후반이었다. 연례적인 베가본드 여행은 여기서 중단되지만, 에디슨과 포드는 미국에 글램핑과 오토캠핑의 유행을 퍼뜨린 개척자로 남았다.

에디슨은 사업가로 성공한 이후 취임한 거의 모든 대통령과 친분을 맺었다. 여름휴가를 같이 보낸 대통령도 여럿이다. 에디슨이 이렇게 ‘방랑’을 즐기는 동안, 그의 신비로운 경쟁자 테슬라는 누구와 어울리고 있었을까. 테슬라가 소속했던 ‘뉴욕 400’이라는 상류사회 중심의 소셜클럽부터 좀 알아보겠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1912년 2월 11일 에디슨의 64회 생일 기념 만찬 장면. 그의 저택을 본뜬 모형주택을 중심으로 긴 사각 테이블이 놓여있다. 퍼블릭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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