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6] 기술관: 에디슨 vs 테슬라②...‘전류전쟁’ 테슬라 압도적 승리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2.20 11:20
  • 수정 2023.02.20 14: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주간지 <타임>에 표지 인물로 실린 에디슨과 테슬라. 에디슨은 1925년 4월에(77세), 테슬라는 1931년 7월에(75세) 각각 표지인물이 됐다. ⓒTIME magazine. 퍼블릭도메인

테슬라 미국의 쓴맛을 보다. ‘미국식 농담’과 ‘미국식 자본주의’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어느 날 테슬라는 에디슨 사장에게 현재 발전기의 문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재설계 수준으로 개량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사이 테슬라는 에디슨과 회사 간부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선임연구원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는 어차피 시스템을 교류 중심으로 바꾸는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지금 판매하는 직류발전기라도 고장이 적고 열효율이 높도록 개량해보자고 생각을 바꾸었다. 발전기를 개량하면 수리하느라 들이는 수고도 줄고 연료비도 줄어들게 될 거라는 말에 에디슨은 쾌히 승낙했다. 말대로라면 막대한 유익이 예상됐다. 에디슨이 말했다.

좋아, 자네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보너스로 5만 달러를 주겠네.

테슬라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에디슨회사가 여러 도시에 설치해두고 있던 24대의 발전기를 다시 설계했고, 독창적인 자동조절장치들을 달아 약속한 개량사업을 완수했다.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에디슨은 5만 달러의 보너스를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묻는 테슬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테슬라. 자넨 아직 우리 미국식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5만 달러라는 구두 약속이 농담이었다고 웃어넘긴 것이다. 테슬라가 실망의 빛을 보이자 그를 승진시켜 현재 주당 18달러인 급료를 10달러씩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에디슨의 사업하는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테슬라는 일찍이 파리 지사에 근무할 때도 중대한 사고를 수습하는 대가로 특별 보너스를 약속받고 일을 해결했으나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예민하고 깔끔한 성격의 테슬라는 에디슨의 태도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서 당장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당황한 에디슨이 그의 등을 향해 ‘자넨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1886년, 때마침 미국은 불경기에 빠져들어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맨해튼 웨스트 40번가의 한 교차로에는 ‘테슬라 교차로’란 명칭이 부여돼 있다.
퍼블릭도메인

얼마 동안 막노동판의 전기기사로 떠돌던 테슬라는 곧 투자자를 만났다. 그의 실력은 이미 업계에 소문이 나 있었다. 일단의 투자자들 덕분에, 테슬라는 에디슨을 떠난 이듬해 ‘테슬라전기회사’를 창업했다. 종래의 것보다 안전하고 경제적인 아크등을 개발하여 특허를 냈다.

그런데 여기까지였다. 회사가 안정적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을 갖게 되자 투자자들은 테슬라를 차버렸다. 지금의 스톡옵션과 같은 주식지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생 회사의 주식은 돈이 되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서 밀려나 다시 여기저기 전기공사 현장을 찾아다니며 품팔이를 해야 했다. 회사 밖의 테슬라는 아직은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에 불과했다. ‘미국식 농담’보다 잔혹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쓴맛을 톡톡히 경험한 것이다.

그러다 한 해가 더 지나 전기 일을 하는 현장 감독의 눈에 띄어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다. 그가 현장 감독을 통해 소개받은 사람은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의 A.K. 브라운 사장이었다. 브라운은 이미 교류전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새로운 아이디어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테슬라라는 청년을 만나 전기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고는 곧 그의 비범함을 알아챘다. 테슬라에게 다시 재기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테슬라, 웨스팅하우스와 손잡고 앞서 가다

조금 건너뛰자. 테슬라가 사업하면서 만난 최고의 사업파트너는 조지 웨스팅하우스였다. 1867년 자신이 발명한 공기브레이크로 사업을 시작하여 이를 기반으로 전기사업에 뛰어든 웨스팅하우스는 합리적인 사업가며 발명가였다. 에디슨보다 한 살이 많고 4백여 개나 되는 자신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1886년 설립된 웨스팅하우스전기회사는 에디슨이 떠들썩하게 벌이고 있는 직류사업의 한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교류 전기에 관심이 많았던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에게 관심을 가졌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하여 교류 전기 개발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 낭만적 성격을 가진 테슬라에게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보다 훨씬 친근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테슬라와 의기투합한 교류전기 사업자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61세 때 모습(1906년). 퍼블릭도메인

스스로 사업에 성공하고 있고 자본력도 있었다.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쓰거나 하청업체와 소비자를 수탈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내는 여느 사업가들과는 정신부터가 달랐다. 공장 종업원들이 일요일 단 하루만 쉴 수 있던 당시 사회 관행 가운데서 업계 최초로 자신의 피츠버그 공장에 토요일 반 근무제를 도입한 사람이 바로 웨스팅하우스였다. 테슬라로서는 비로소 ‘믿을 만한 사업가’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더구나 목적하는 방향마저 같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테슬라는 교류 전기사업을 위하여 예전부터 메모해둔 모든 설계와 구상들, 발전기부터 변압기, 모터, 또 전기제품 등 일체의 생산판매를 웨스팅하우스에 일임했다. 웨스팅하우스로서도 탄탄한 사업기반 위에 테슬라라는 날개까지 달게 된 격이었다.

이후 테슬라가 한 일은 사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특허와 기술을 제공하며 보수를 받는 전문가의 역할이다. 자본주의의 쓴맛을 톡톡히 맛본 테슬라에게는 믿을 만한 경영주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자신만의 아이디어 세계에 치중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자유롭게 발명활동을 계속하면서 회사의 자문역으로 월 2천 달러의 보수를 받았고, 테슬라가 가진 발전기 특허에 대한 사용 대가로 전기 판매수익에서 1마력당 2.5달러의 로얄티를 받게 되었다.

분수에 투영된 니콜라 테슬라. 탄생 163주년을 맞아 자그레브의 한 분수에 그의 사진이 투영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1888년 5월 16일에는 미국 전기기술자협회에도 초대되어 자신이 공들여 개발한 교류모터의 변환시스템에 관해 강의했다. 단순히 음극 양극의 전류만으로 회전력을 얻던 단상모터에서 삼상교류를 비롯한 다상 전류 기술을 구사하여 조용하고도 강력한 회전을 얻는 방식을 처음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강의는 설명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할 뿐 아니라 아이디어 자체도 참신하고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들은 ‘패러데이 이후 전기에 대하여 이처럼 간단하고도 명료한 강의는 없었다’고 극찬했고, 이러한 평가가 매스컴에도 고스란히 소개되었다. 이 강의는 지금까지도 전기 분야에서 명강의의 고전으로 꼽힌다. 테슬라 개인으로서는 자신도 몰랐던 강의 재능을 발견한 계기였다.

1891년 7월에는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테슬라는 미국 시민이 된 것을 어떤 과학적인 영광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후에 여러 대학에서 받은 명예학위 증서들을 서랍에 대수롭지 않게 쌓아두면서도 시민증만은 사무실 안에 안전하게 보관해두었다고 한다.

에디슨의 질투 ‘전기의자 사형'제도 만들다

한편 상대적으로 교류와의 경쟁이 버거워진 에디슨은 애가 달았다. 직류와 교류의 대결은 이제 중대고비를 향하고 있었다.

한동안 뉴욕에서 길고양이나 강아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디슨이 용돈이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몇 푼씩의 보상을 주면서 사들였기 때문이다. 에디슨은 이 동물을 거리로 끌고 나가 공개 퍼포먼스를 벌였다. 에디슨은 그 불쌍한 동물들의 몸에 전선을 연결하여 1천 볼트의 전류를 흘려보냈다. 고압에 감전된 동물들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이 전기가 바로 교류입니다. 자칫하면 사람들도 이렇게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이래도 이 위험한 교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론전과 상대 깎아내리기. 에디슨다운 전략이었다. 그래도 결정타가 되지 못하자 에디슨의 퍼포먼스는 점점 도가 강해졌다. 기자들을 모아 놓고 사람보다 큰 동물, 소나 말을 감전시키기도 하고 서커스단에서 폐사 직전의 코끼리를 사들여 역시 교류전기로 안락사시키는 장면도 보여주었다.

같은 고압을 사용하는 경우 직류 또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묘히 감추면서 ‘교류 전기만이 위험한 것’처럼 선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에디슨은 이 비신사적인 난타전을 멈춰야 했지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좀 더 섬뜩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지 기상천외의 발상을 하게 된다.

당시 뉴욕에서는 사형수들을 처형할 때 교수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끔 죄수가 죽질 않아 사형방법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었다. 뉴욕 주지사가 더 인도적이고 효과적인 사형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에디슨이 적극 협조하여 1890년에 ‘감전사법’이 제정되었다. 여기에는 웨스팅하우스처럼 교류 전기를 다루면서 경쟁관계인 톰슨-휴스턴사의 역할도 있었다.

전기의자. ⓒ게티이미지뱅크

그들은 어렵사리 웨스팅하우스 제품의 교류발전 설비를 구하고 전기의자 디자인을 제공하여 그해 8월, 최초의 ‘전기의자’ 사형을 도왔다. 어떻게든 ‘웨스팅하우스 전기’가 위험한 전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역사상 최초의 전기의자 사형은 끔찍했다. 1천 볼트와 2천 볼트로 두 번에 걸친 전기처형에는 감전 뒤에야 사형수는 숨을 거뒀지만, 그 과정은 끔찍했다. 뉴욕타임즈는 헤드라인에 ‘교수형보다 훨씬 나빴다’고 비판했고, 자신의 발전기를 도용당한 웨스팅하우스는 ‘차라리 도끼가 낫겠다’며 비난했다.

시카고박람회가 ‘전기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다

에디슨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헐뜯었지만,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좀 더 정확하게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은 테슬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결정적인 승부는 ‘전기의자 사건’ 이후 3년 뒤인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가려졌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컬럼비아박람회’라고 명명된 박람회의 행사장 한 가운데 바다를 상징하는 연못에는 콜럼버스가 항해에 사용했던 산타마리아호 등 세 척의 범선이 실물크기로 재현되었다. 47개국 대표단과 2천7백만 관객들이 몰려든 박람회장 전력공급을 웨스팅하우스가 맡게 됨에 따라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전쟁’에서 테슬라의 승리가 굳어졌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퍼블릭도메인)

시카고시는 행사를 앞두고 행사장에 전력을 공급할 전기회사를 공개입찰에 붙였다. 결과는 웨스팅하우스였다. 테슬라의 빈틈없는 설계에 의해 자신들의 교류발전기로 행사에 드는 모든 전기설비와 시설을 가동할 만반의 대비가 되어 있었고 응찰 가격도 낮았다. 세계적으로 (‘조선’을 포함하여) 46개국이 참가하고 최소한 2천 7백만명이 다녀간 이 박람회를 통해 교류전기의 안전성과 실용성은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대세는 교류 쪽으로 기울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여세를 몰아 미국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폭포에 수력발전기를 납품했다. 테슬라는 어린 시절 동네 개울에서 놀면서 자기 손으로 수차를 만든 적이 있었다. 수차의 모양은 독특했다. 흔히 만드는 물레방아나 바람개비 모양처럼 날개 달린 수차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독특한 수차는 다른 아이들의 날개수차보다 더 빠르게 잘 돌았다. 이 아이디어는 후에 테슬라가 고안한 증기터빈에도 적용된다. 날개가 달리지 않은 원반모양의 테슬라수차는 회전이 너무 빨라 회전축이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강도 높은 금속재료가 나올 때까지는 오히려 발생하는 회전속도를 제어해야만 했다.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테슬라는 언젠가 나이아가라 폭포수에 자신의 수차를 달아보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전기사업자 웨스팅하우스를 만났을 때 우연히도 웨스팅하우스 역시 나이아가라 폭포를 이용한 수력발전에 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천생연분이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시카고박람회 성공의 여세를 몰아 마침내 두 사람은 공동의 꿈을 이룬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는 1899년 그의 실험실에서 무선 전력 전송을 시연했다. 퍼블릭 도메인

사실 대중적인 전력 보급에 있어 에디슨이 고수하는 직류방식 발전은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직류는 전달거리가 짧기 때문에 아무리 길어도 2km 이상을 전송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도시에 이 전기를 충분히 공급하려면 도시 거점마다 하나씩 발전소를 세워야 하는데, 발전기를 돌리는 증기기관을 가동하느라 매연과 소음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충분한 물을 확보해야 하며, 끓고 난 폐수를 방류할 곳도 있어야 한다. 반면 교류는 변압기로 전압을 충분히 올리면 원하는 거리만큼 송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직류의 경우처럼 발전소를 곳곳에 세울 필요가 없다.

소형시설에 대한 국지적 필요에서라면 몰라도, 20세기에 전기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서 기본적인 공공재가 되고 인류가 앞으로 만들어낼 모든 문명기기가 전기에 의해 돌아가게 되리라는 걸 차분히 상상해본다면, 파워플랜트는 교류가 대세가 되리라는 걸 아무도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류와 직류발전의 ‘전류전쟁’은 애당초 승부가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한 번 교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이상, 끝까지 자기주장을 관철하고 말겠다는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 끝내 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왜 고집을 꺾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에디슨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다만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을 뿐이지.

단지 체면 때문에 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듯, 에디슨은 자기 말대로 돈에 관한 곤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에디슨회사에서 에디슨이 밀려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잔혹함을 가장 미국적인 사업가 에디슨도 피할 수 없었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에디슨 vs 테슬라①...‘전류전쟁’ 1백년. 세상을 밝힌 두 천재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