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20] 20세기 인류가 주도한 문명 전성기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6.12 14:37
  • 수정 2023.06.1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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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방사능, 공해, 온난화 등 20세기 문제 스스로 해법 제시
노벨-카네기-빌 게이츠…부호들의 기부 전통, 인류 공존에 기여
‘개혁 흐름에 저항하다 비참한 몰락 자초’ 러시아 혁명엔 큰 교훈
20세기와 판이한 21세기, 다음 세기는 더 크게 달라질 것

냉전 반세기, 역사적 과제 스스로 풀고 끝난 20세기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동서냉전 시기에 핵보유국들은 폭탄의 숫자를 늘리고 발사시설을 다른 나라가 알 수 없도록 땅 밑이나 바다 밑 잠수함에 감춰두기 위해 애썼다. 저마다 ‘극비’라고는 했지만, 세기말에 전체 숫자가 수만 개까지 존재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도 주한미군의 작은 핵무기(핵 배낭)가 배치되었다가 90년대 비핵화 정책에 따라 철수했다.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의 정상회담(1987년 12월9일. 워싱턴DC). 일련의 대화와 두 나라 공식외교 복원을 통해 20세기를 관통했던 동서냉전이 끝나고, 세계화해의 시대가 열렸다. 고르바초프는 3년 뒤 러시아연합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진=미국국립기록관리청 제공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의 정상회담(1987년 12월9일. 워싱턴DC). 일련의 대화와 두 나라 공식외교 복원을 통해 20세기를 관통했던 동서냉전이 끝나고, 세계화해의 시대가 열렸다. 고르바초프는 3년 뒤 러시아연합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진=미국국립기록관리청 제공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서로 충분히 보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2차 대전 이후 강대국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었다. ‘상호확증파괴’라는 상호위협에 의해 유지된 ‘폭탄 위의 평화’가 20세기 내내 유지되었다. 핵폭탄은 ‘사용하지 않기 위해 만드는 방어무기’라 불린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많은 핵무기가 지구의 안전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는 점과 아직 그것을 갖지 못한 약소국가들은 강대국에 의해 억울함을 느낄 때마다 핵보유에 대한 유혹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세계 핵무기 보유국의 보유 현황지도(미 과학자연맹, 2023년 현재). 공식적으로는 추정 숫자들이지만, 관련기관들이 여러 경로로 상호체크를 통해 확정하므로 신뢰성이 높다. 2023년 지도에서 북한의 핵탄두는 30개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지난해 국제기관들의 추정치는 20개 정도였다. 자료=미국 과학자연맹 FAS, 홈페이지
세계 핵무기 보유국의 보유 현황지도(미 과학자연맹, 2023년 현재). 공식적으로는 추정 숫자들이지만, 관련기관들이 여러 경로로 상호체크를 통해 확정하므로 신뢰성이 높다. 2023년 지도에서 북한의 핵탄두는 30개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지난해 국제기관들의 추정치는 20개 정도였다. 자료=미국 과학자연맹 FAS, 홈페이지

다행히도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 이후 핵 감축을 위한 보유국 간 대화가 이어지면서 90년대에는 핵무기 감축협정이 실행에 옮겨졌다. 그와 동시에 동서냉전으로 서로 왕래도 금지되었던 ‘반쪽 지구’의 체제대결도 80~90년대를 지나며 해소되었다.

1979년 미-중 국교정상화를 시작으로 1991년 러시아 소비에트가 해체되면서 냉전은 끝나고 세계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지구상에서 절반의 나라와는 왕래가 엄격히 금지되던 대한민국 사람도, 직접 적성국인 북한 외에는 그 어디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맛보았다. 국제적 변화에 맞춰 노태우 대통령의 책임 아래 중국-소련과의 잇단 정상회담과 수교가 이어지면서 순조롭게 세계화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냉전의 장벽을 허물자, 대한민국의 교역규모는 급성장을 거듭하면서 더 이상 ‘중진국’이나 ‘신흥국가’ 아닌 선진국 대열로 껑충 뛰어올랐다. 1996년 OECD에도 가입했다. 대한민국이 단기간동안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뛰어오른 이 드라마틱한 도약의 배경에 ‘냉전종식’이라는 시대적 변화가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남북한이 서로 자유왕래를 하면서 모든 군사적 위협마저 벗어난다면, 그 시너지효과는 남북 모두에게 엄청나게 나타날 것이다. 한민족은 또 한 번의 업그레이드 찬스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1990년 12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옛 소련 크렘린궁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태우 정부는 한러수교(1990.9) 남북한 유엔동시가입(1991.9) 한중수교(1992.8) 등 잇단 외교성과를 통해 대한민국도 절반의 지구 아닌 세계 전체와 왕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성과가 비약적인 무역 증가 등 국력신장으로 이어졌다. 사진=국가기록원
1990년 12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옛 소련 크렘린궁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태우 정부는 한러수교(1990.9) 남북한 유엔동시가입(1991.9) 한중수교(1992.8) 등 잇단 외교성과를 통해 대한민국도 절반의 지구 아닌 세계 전체와 왕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성과가 비약적인 무역 증가 등 국력신장으로 이어졌다. 사진=국가기록원

실제 90년대에는 마지막 남은 북한과도 정상회담에 합의할 정도로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994년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이 급작스러운 김일성 사망으로 좌절되었지만, 20세기 마지막 해인 2000년 6월13일 마침내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지도자와 악수하였다. 곧 민간인들의 북한지역 관광이 개시되고 경제교류도 시작되었다.

여기까지가 20세기 말의 장면이다. 20세기가 20세기에 팽창했던 위협을 스스로 해소하며 막을 내렸다고 할까.

돌아보니 그렇다. 지금도 인류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어쩌면 상황은 더 위험하거나 더 암담한 문제에 부딪힌 것도 같지만, 대다수 문제는 21세기에 들어와 새롭게 생겨난 문제들이다.

안보문제만이 아니었다. 지난 20세기에 핵 문제뿐 아니라, 인류의 문명발달이 가져온 환경문제,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대응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그린피스, 지구의 벗,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을 위시로 환경보호운동과 거기서 나아간 생태주의 운동은, 이것이 인간의 손으로 지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환경위기로부터 지구의 미래를 구하는 노력의 시작을 의미한다.

1972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에 의해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이 창설되었고,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1997년 교토의정서들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지난 20세기는 그 후반에 와서 핵무기 감축과 함께 극적인 문명의 전환에 주요 국가들이 합의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고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21세기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인류는 20세기 말에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행동도 시작했다.

이 점은 분명히 선을 그어 생각하는 게 좋겠다.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의 교토의정서 탈퇴(2001)와 핵무기재점검으로부터 시작해 알카에다가 주도한 뉴욕 9·11, 새로운 중동전쟁과 내전, 아프간전쟁, 트럼프 대통령 때 시작된 미-중 대립, 이후 러시아 패권주의의 재가동, 이스라엘에 의한 중동의 긴장, 일본 아베정권에서 비롯되는 일본 재무장, 한반도에서 남북한 갈등의 재점화, 필리핀과 미얀마의 정치적 후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이 모두 21세기 들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20세기에 핑계를 떠넘길 수 없다는 것이, 20세기 박물관을 마무리하면서 드는 명백한 생각이다.

1997년 12월1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 3차 회의에서 국제 사회는 기후변화에 대한 공동대응에 합의하는 ‘교토의정서’를 채택했다. 사진은 파리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 총회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1997년 12월1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 3차 회의에서 국제 사회는 기후변화에 대한 공동대응에 합의하는 ‘교토의정서’를 채택했다. 사진은 파리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 총회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에필로그① : 앤드루 카네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제 20세기 스토리박물관은 문을 닫으려 한다. 본래는 20세기를 특징지어 드러낼 수 있는 키워드 100개 이상을 하나하나 연속해 다룬다는 구상이었는데, 이제 20세기 초반의 10년여를 겨우 살폈을 뿐이다. 어떤 주제는 여전히 익숙한 것이어서 즐거웠고 어떤 것은 너무 생소하거나 놀라워서 흥미로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20세기적 요소들이 축적되어 21세기인 지금의 세계가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20세기를 분해하듯 살펴보는 작업은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다음의 22세기 이후를 전망하는 데에도 어떤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살펴야 했으나 건너뛴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이 중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만 대략이라도 더 언급해야겠다. 바로 러시아혁명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와 카네기의 도서관 및 학교건립 등 공익기부 활동을 ‘황금샤워’로 비유한 잡지 삽화. (Puck Magazine June 1, 1903. NY)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와 카네기의 도서관 및 학교건립 등 공익기부 활동을 ‘황금샤워’로 비유한 잡지 삽화. (Puck Magazine June 1, 1903. NY)

1896년 가장 많은 유산을 인류를 위해 남긴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전 재산 기부는 당대 부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생전에 “돈 긁어모으기와 아첨은 나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정신을 잘 이해한 사람 중 하나가 미국의 앤드루 카네기(1835~ 1919)였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수공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카네기는 어려서 미국에 이민한 뒤 주급 1.2달러의 면직공장 공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으나 근면 성실하고 영리하여 회사에서 인정받았고, 전보배달원을 하다가 전신기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단골손님에 의해 피츠버그의 철도회사 사무실에 스카우트되면서 경영과 투자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우연히 철도 침대차 사업에 투자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리고 철도회사 12년째에 교량회사를 설립하면서 철강 분야와 인연을 맺는데, 이때 나이가 28세였다. 이후 본격적인 철강사업을 시작하여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미국 최대의 철강업자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30년 넘게 홀어머니를 모시고 독신으로 산 카네기는 어머니와 동생을 장티푸스로 잃은 뒤 52세의 나이로 뒤늦은 결혼을 하고 10년 뒤에 외동딸 마거릿을 얻는다. 1897년, 이를 계기로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 스코틀랜드와 피츠버그를 오가며 지냈다.

뉴욕 맨해튼의 카네기홀. 카네기가 재산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지어 기부한 이 시설은 20세기 음악가 연기자들 누구나가 동경하는 최고 권위의 공연시설로 명성을 떨쳤다. ⓒ게티이미지뱅크
뉴욕 맨해튼의 카네기홀. 카네기가 재산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지어 기부한 이 시설은 20세기 음악가 연기자들 누구나가 동경하는 최고 권위의 공연시설로 명성을 떨쳤다. ⓒ게티이미지뱅크

‘카네기 철강회사’는 한때 미국 철강 생산의 1/4를 차지할 정도로 컸다. 은퇴 후인 1901년 앤드루 카네기는 JP 모건에게 회사를 매각하고 4억 8천만 달러를 받았다. 큰 부자를 ‘백만장자’라 부르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음이 분명하다.

카네기는 자서전에서 자기 인생을 가리켜 ‘인생의 절반은 돈을 벌기 위하여, 후반의 절반은 잘 쓰기 위하여 살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 후반의 삶을 통해 기업인 앤드루 카네기는 세계의 위인전에 실리는 큰 인물로 거듭났다.
1902년부터 카네기는 워싱턴카네기협회를 통해 공공도서관 건립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 2천500개의 공공도서관을 지어 기부했고, 고향인 스코틀랜드와 연관하여 영국에도 수백 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영국도서관협회는 이런 카네기의 공적을 기념하여 1936년부터 해마다 어린이 청소년 대상의 영어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카네기 메달’을 수여고 있다. 미국 도서관협회도 2012년부터 카네기 메달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뉴욕카네기협회의 후원받아 매년 픽션과 넌픽션 분야의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를 선정해 각각 상금과 메달을 수여한다.  

카네기가 피츠버그에 세운 기술연구소(1913년). 지금의 명문 카네기멜론대학교의 모태가 됐다. 퍼블릭도메인
카네기가 피츠버그에 세운 기술연구소(1913년). 지금의 명문 카네기멜론대학교의 모태가 됐다. 퍼블릭도메인

카네기는 ‘재산을 많이 남겨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도서관 기부사업 외에도 대학과 연구소 공공기관 청사 등을 자기 돈으로 지어 기부했다. 자기 재산의 90%를 이런저런 목표를 찾아 기부했다고 한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쾌척하는 식의 기부는 피했는데, 이는 맹목적인 기부는 실제 유익한 목적에 쓰이는 것보다 과시성 사업이나 사업비용 명목 등으로 허비되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글에서 그는 ‘그냥 돈만 내는 경우 실제로 목적에 맞게 쓰이는 돈은 5%에 불과하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

돈을 잘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유용한 곳에 제대로 쓰이게 하기 위해서는 철강사업 못지않은 정성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카네기는 단순한 ‘기부왕’이 아니라 ‘자선사업가’로 불렸다. 그는 지금도 명문으로 꼽히는 아이비리그의 카네기-멜론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 등 종합대학 12개, 단과대학 12개를 자기 손으로 지었고, 브로드웨이의 카네기홀을 비롯하여 문화예술분야에도 많은 기초시설과 기부를 남겼다. 

오늘날 ‘천민자본주의’의 본산이라 불리는 미국이, 그럼에도 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힘으로 사회의 근간을 지켜가고 있는 전통이 바로 카네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잔혹한 경영자’로 불리던 당대의 석유사업가 록펠러도 그를 본받았다. 근래에 자기 재산 거의 전부를 투입해 자선재단을 운영하는 빌 게이츠와 그에게 자극받아 자선사업에 뛰어든 워런 버핏 등은 그의 후예들인 셈이다. 

에필로그②: 봉건귀족들의 부패가 자초한 왕정의 몰락

20세기 초 세계 문명사회는 1차 세계대전을 치르기 전 격렬한 변화를 겪었다. 주로 1910년대에 집중된 이 변화는 가히 ‘혁명시대’라 부를 만했다.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1백년의 시련기를 거쳐 민주공화국 체제로 귀결된 뒤, 러시아혁명(1905년, 1917년), 중국의 신해혁명(1911년), 미 대륙에서의 멕시코혁명(1910~1917년), 독일혁명(1918년)을 위시한 남미대륙의 전란과 내란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격동…. 세계지도와 종족의 운명을 뒤바꿀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 집중되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쟁은 국가가 외부의 적과 치르는 싸움이고, 혁명이나 내란은 국가 내부에서 내부 세력끼리 벌이는 싸움이다. 외적의 침공이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게 하여 혁명이나 내란이 촉진되는가 하면, 내부의 혁신이 성공했을 때 그 힘을 외부로 과시하며 여러 국가 사이에서 자기 서열을 재정립하기 위하여 전쟁을 도발하기도 한다.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은 제1차 대전 중 내부의 취약하고 곪은 곳이 터져 일어났고, 19세기에 메이지유신을 먼저 성공시킨 일본제국은 그 힘을 분출시켜 조선과 청나라를 차례로 침공했다. 

동북아에서 먼저 개혁에 성공한 일본은 그때까지 옛날에 머물러 있던 조선과 청나라를 침공하여 잔인하게 짓밟았다. 1937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중국 난징을 점령하여 시민 30만을 학살하고 특수부대를 동원해 생체실험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 두 장교가 ‘1백 명 참수경쟁’에 참가하여 연장전까지 간 끝에 각각 106명과 105명을 참살했다고 보도한 일본마이니치신문 기사 (1937년 12월 13일 자)
동북아에서 먼저 개혁에 성공한 일본은 그때까지 옛날에 머물러 있던 조선과 청나라를 침공하여 잔인하게 짓밟았다. 1937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중국 난징을 점령하여 시민 30만을 학살하고 특수부대를 동원해 생체실험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 두 장교가 ‘1백 명 참수경쟁’에 참가하여 연장전까지 간 끝에 각각 106명과 105명을 참살했다고 보도한 일본마이니치신문 기사 (1937년 12월 13일 자)

한편 일본의 침공은 조선과 청 왕조의 고질적인 부패와 무능을 드러나게 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갑오개혁(1894년)과 기미독립선언(1919년), 중국에서는 청 왕조를 거부하고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두 나라의 혁명은 그러나 때가 늦었고 추진력도 약했다. 신기술로 무장한 일제의 거침없는 침공 앞에서 국권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1910년대는 세계 각국에서 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난 시기였다. 1911년 중국에서는 쑨원(孫文)이 혁명을 주도하여 청 왕조를 거부하고 중화민국의 출발을 선언했다. 사진은 광쩌우의 쑨원기념관. GNU 공개도메인 2005
1910년대는 세계 각국에서 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난 시기였다. 1911년 중국에서는 쑨원(孫文)이 혁명을 주도하여 청 왕조를 거부하고 중화민국의 출발을 선언했다. 사진은 광쩌우의 쑨원기념관. GNU 공개도메인 2005

20세기 초 여러 혁명 가운데서도 러시아혁명에 대해서는 특별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와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1904년 일본과 충돌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패했다. 이에 따라 무능한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된 러시아 제정 시스템의 곪은 속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오른쪽)와 황후 알렉산드리아,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자상하지만 유약했던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장에 좌우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출신이 불분명한 요승 라스푸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퍼블릭도메인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오른쪽)와 황후 알렉산드리아,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자상하지만 유약했던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장에 좌우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출신이 불분명한 요승 라스푸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퍼블릭도메인

1905년 1월 22일.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 농민, 그리고 황제정권의 무능함에 화가 난 시민들이 황제의 초상화와 성상(聖像)을 앞세우고 황제가 머무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황제를 믿었다. 각료들의 무능과 부팩가 문제라고 생각하였고, 황제에게 바치는 탄원서를 전달하면 백성을 사랑하는 황제가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시위대를 피하여 궁전을 떠난 뒤였고, 궁전의 경비부대는 이 순박한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놀라 피하는 군중들 사이로 기마대가 내달리며 총과 칼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5~6백 명의 시민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시위 후에도 많은 주모자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노역장으로 보내졌다. 이후 러시아 국민들은 황제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자신을 추종하는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레고리 라스푸틴(중앙 수염 기른 이, 1914년). 황후 알렉산드리아를 등에 업고 귀족들을 공공연히 주무르던 라스푸틴은 러시아 황실 몰락의 주요 원인의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 퍼블릭도메인
자신을 추종하는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레고리 라스푸틴(중앙 수염 기른 이, 1914년). 황후 알렉산드리아를 등에 업고 귀족들을 공공연히 주무르던 라스푸틴은 러시아 황실 몰락의 주요 원인의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 퍼블릭도메인

1차 대전 참전으로 국민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던 1916년 12월 30일. 일단의 귀족 청년 장교들이 황제와 황후의 정신을 사로잡고 꼭두각시처럼 부리던 요승 라스푸틴을 암살했다. 
이듬해 2월부터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니콜라이 황제가 군대를 보냈으나 군대마저 시위대에 합류했다. 3월8일, 국제 여성의 날에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이 빵과 우유를 달라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8만여 노동자들이 동조시위를 벌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근위대 기병들이 마침내 총을 발사했는데, 노동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조국 러시아’를 외치며 그대로 서서 총탄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이 러시아에서 황제정권의 마지막 날이었다. 황제는 폐위되고 정부는 와해됐다. 
와해된 봉건귀족들의 정부를 대신하여 혁명의 주체인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폭발하는 국민대중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했다.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러시아는 혼란했다.

10월에, 보다 과격한 정당 볼셰비키가 1천명의 적위대 병력으로 수도를 장악하면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들은 소비에트 정권의 출범을 선언하면서 그때까지 유폐 상태이던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족을 즉결 처분 형식으로 처형해 버렸다. ‘2월 혁명’에 이은 ‘10월 혁명’ 곧 ‘볼셰비키혁명’이라 부르는 러시아에서 마지막 혁명이었다. 그 중심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며 레닌 등이 있었다. 

1917년 10월26일. 마침내 폭발한 러시아의 노동자적위대가 황제의 겨울궁전을 향해 돌격하고 있다. 2월에 시작된 러시아 시민혁명이 10월에 가장 과격한 볼셰비키당의 집권으로 마무리되었다. 퍼블릭도메인
1917년 10월26일. 마침내 폭발한 러시아의 노동자적위대가 황제의 겨울궁전을 향해 돌격하고 있다. 2월에 시작된 러시아 시민혁명이 10월에 가장 과격한 볼셰비키당의 집권으로 마무리되었다. 퍼블릭도메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34년 전인 1883년 마르크스 레닌과 프레드리히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선언’의 서문이다. 그랬다. 벌써 수십 년째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발붙일 숙주를 찾아 유럽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마땅히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각국 정부에 배척당하며 떠돌던 차에 바로 이곳, 황제가 제구실을 못 하고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될 대로 고조된 러시아에서 마침내 굵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후 소련은 20세기 남은 기간 내내 미국과 서구를 상대로 냉전시대 양극체제의 한 극을 이끌었다.

여기에는 뚜렷한 교훈이 있다. 스스로 개혁하지 않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권력과 국가는, 더욱 폭력적일 수 있는 내란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이제 여기서 20세기 여행을 마무리한다.
20세기를 인류가 주도하는 문명의 전성기였다 한다면, 21세기는 문명이 인류를 이끌고 가는 세기가 될 것 같다. 자칫하면 이 문명, 기계문명과 인공지능에 인류는 주도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내가 기른 자식에게 미래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하듯, 장성한 인류문명이 인간의 힘과 지능을 앞지를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잘 섬길 수도 있고, 무시하며 앞서가 버릴 수도 있다. 과연 어떻게 될까. 예컨대 인공지능이 인간을 섬기는 문명을 이룰까, 아니면 인간을 소외시키고 능멸하는 문명이 될까. 그것은 얼마나 문명을 공들여 키우는지 함부로 키우는지, 인간의 '양육방식'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경제력과 건축공학의 발달에 힘입어 1931년 4월 준공된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맨해튼과 허드슨강을 내려다보는 관광객들. 이후 1971년까지 41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931년 촬영. 퍼블릭도메인

끝으로 스토리박물관에서 다루지 못하여 아쉬운 테마들을 이름만 적어본다. 이름만 들어도 한 세기의 영욕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이름들이다. 

로댕에서 시작하여 피카소, 뭉크, 클림트, 샤갈, 마티스, 프리다 칼로, 달리, 바우하우스,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얼굴 없는 뱅크시까지 20세기의 미술가들과 안토니우 가우디. 라흐마니노프로 시작하여 사라사테, 에릭 사티, 생상, 쇼스타코비치, 필립 수자, 마리아 칼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 그리고 위대한 3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음악가들. 1920년대의 재즈와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나나 무스꾸리, 에디뜨 삐아프, 폴 매카트니와 마이클 잭슨 등 대중음악가들. 릴케와 헤르만 헤세, 오스카 와일드, WB 예이츠와 TS 엘리엇, 까뮈, 사르트르, 버지니아 울프, 헤밍웨이, 솔제니친, 가브리엘 마르케스, 윌리엄 골딩 등 문인들. 매혹적인 오드리 헵번부터 리즈 테일러, 메릴린 먼로, 알랭 들롱, 이브 몽땅 그리고 통기타와 청바지 히피, 라즈니쉬, 루 살로메, 마타 하리…. 그리고 챨리 채플린, 월트 디즈니, 타잔, 슈퍼맨, 007, ET, 우디 앨런, 코엔형제, 히치콕, 스티븐 스필버그, 안드레아 마리꼬네 등 영화 아이콘들. 
페니실린, 아스피린, 호르몬, AIDS, 대체의학, 양자물리학, 칼 세이건, 스티븐 호킹, 허블 망원경, 내셔널지오그래픽, 컨베이어벨트, 햄버거, 코카콜라, 타이타닉, 록펠러, 카네기,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복제 양 돌리, 아파트, 컴퓨터, 복제 양 돌리, 로봇, 아폴로프로젝트, 시오니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IMF, 엘니뇨, 마하트마 간디, 김구, 마틴 루터 킹, 마더 테레사,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 달라이 라마, 모함마드 알리, 칼 루이스, 축구황제 펠레, 마라도나, 잭 니클라우스, 마이클 조던 등 스포츠 스타들 등등.

그동안 열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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