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6] 기술관: 에디슨 vs 테슬라①...‘전류전쟁’ 1백년. 세상을 밝힌 두 천재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2.17 13:00
  • 수정 2023.02.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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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류냐 교류냐’ 치열한 경쟁… 시카고 박람회서 테슬라의 승리
20세기 풍미한 ‘돌파형’ 에디슨, 21세기에 조명받는 ‘예언자’ 테슬라

1922년의 토머스 앨버 에디슨과 1896년의 니콜라 테슬라. 퍼블릭도메인

나는 아주 대단한 천재 두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고, 또 한 사람은 지금 내가 당신에게 추천하는 이 젊은이입니다.

교류와 직류, 전기를 일상에 끌어들인 ‘쌍두마차’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84년 여름. 미국 뉴욕 맨해튼의 기계공장 사무실. 마흔이 안 된 나이에 벌써 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금발의 사업가는 지금 막 도착한 젊은이가 품에서 꺼내 건네준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럽 파리에 지사장으로 나가 있는 창업동료 찰스 베처러가 친필로 쓴 추천서였다.

의자에 앉아 나머지 추천의 말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업가는 37세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대서양을 건너와 지금 막 뉴욕에 발을 디딘 젊은이는 28세의 오스트리아인 기술자 니콜라 테슬라였다. 장차 지구를 화려하게 밝힐 19~20세기 최고의 두 천재 발명가가 처음으로 조우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최고의 경쟁자는 최고의 친구’라는 말이 있다. 당장은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신생기업의 창업자와 이곳에 취업하려는 일개 기술자로 만나고 있지만, 장차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힘겨운 라이벌이며 또한 서로를 가장 신뢰하는 기술인으로서 최소한 50년을 한 시대에 공존했다.

에디슨과 테슬라가 같은 시기에 공존한 것은 지구인들에게 일종의 축복이었다. 이들이 창안한 전기와 응용제품, 기술들로 인하여 인류는 이전까지 수천 년 이상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문물은 무엇이든, 이 두 사람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없다. 오늘날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전기는 모두 이 두 사람의 손을 거쳐 우리 일상에 들어왔다.

1881년 맨해튼 남동부의 괴릭 스트리트에 있던 에디슨 기계공장. 1884년에 대서양을 건너온 니콜라 테슬라가 처음 근무했던 곳이다. 70년 뒤 도시 재개발사업에 의해 사라졌다. 퍼블릭도메인

사실 전기에 대한 인류의 인식은 그 역사가 오래됐다. 고대 원시인들이 천둥·번개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졌던 것으로부터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인 탈레스가 천연 자석의 신비로운 힘에 천착했다거나, 털실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정체에 주목했다는 등의 옛날이야기는 생략하더라도 말이다.

1600년경 지구가 거대한 자석임을 알아낸 길버트(영국), 1746년 정전기를 유리병에 모아 원시적 형태의 배터리(라이덴병)를 만든 뮈센부르크(네덜란드)와 클라이스트(독일), 1752년 번개 치는 하늘에 연을 날려 벼락의 정체가 방전된 전기임을 입증한 벤저민 프랭클린(미국), 1780년 동물의 몸에서 생체전기를 발견한 물리학자 갈바니(이탈리아), 아연과 구리조각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고 그것을 보관하여 사용할 수 있는 본격 배터리의 기초를 연 1800년의 볼타(이탈리아 밀라노), 1806년 전기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빛(아크등)을 만든 험프리 데이비(영국) 등, 인류가 전기의 정체와 성질을 이용 가능한 수준까지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최소한 2백년, 길게는 2천년 이상이 걸렸다.

최초로 정전기현상에 주목했던 고대 철학자 탈레스를 전기 발견의 시조로 형상화한 조형물. 현대조각가 Louis St. Gaudens가 새긴 작품으로, 1980년대 이후 워싱턴DC 유니온역 전면에 새겨진 6개의 우화동상 중 하나다. ⓒCarol M. Highsmith Archive

20세기 세계가 ‘전기의 아버지’라 부른 에디슨과 테슬라가 한 역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난 사과나무에 최종적으로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게 한 과정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지상에 ‘불’이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인간의 손에 그 불을 쥐여준 이는 프로메테우스라고 특정하듯이 말이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인류에게 지금과 같은 전기, 직류와 교류를 각각 개발하여 안겨주었다. 그들로부터 전기는 비로소 일반 대중이 손쉽게, 그리고 널리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된 것이다.

2백년 혹은 2천년 동안 전기를 연구한 선조들

‘전기의 아버지’ 바로 윗대의, 할아버지 격인 연구자로는 19세기 영국인 마이클 패러데이와 제임스 맥스웰, 존 플레밍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800년 만들어진 볼타의 전지 덕분에 과학자들은 전기에 관한 여러 가지 안정적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20년 뒤 외르스테드(네덜란드)라는 학자는 구리 전선 위에서 나침반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전류와 자석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이클 패러데이(영국)는 굉장한 영감을 얻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자석을 전선 사이에서 움직여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연구를 거듭한 끝에 패러데이는 1831년 ‘전자기유도’ 현상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패러데이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연구 결과물은 과학자들 사이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인공적인 발전기를 만들어 전기를 얼마든지 일상적 실용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전기와 자기가 실제로 하나의 파동현상임을 확증하였다. ‘전기’ ‘자기’를 합쳐 ‘전자기’라고 표현한다. ‘전자기파’는 ‘전자파’를 수정한 현대용어다).

그는 곧 의회에도 초대받아 의원들과 수상 앞에서 직접 자석과 코일을 움직여 보이며 전자기 유도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그래도 이 작은 ‘과학 장난감’이 갖는 혁명적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 의원들은 “이 발견이 어째서 중대한 사건이라는 거요?”라고 물었다. 국왕이 물었다는 설도 있고 의장 혹은 총리대신이 물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자 패러데이는 지체 없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했다.

“앞으로는 이것으로 막대한 세금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1855년 크리스마스에 영국 왕립학회에서 일반대중을 상대로 ‘쉬운 과학’을 강연하는 마이클 패러데이. 가난하여 대학에 다니지 못하고도 독학으로 당대 최고의 과학자가 된 패러데이는 왕립학회의 의장직과 왕실이 제안한 기사 작위를 사양하고 대신 과학강연을 평생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소망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왕립학회의 크리스마스 특별강연회는 이후 170년 넘게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삽화 Alexander Blaikley, 1885. 퍼블릭도메인

 

전기의 여명기에 스타로 떠오른 에디슨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전기는 크게 직류(DC)전기와 교류(AC)전기로 나뉜다. 어느 쪽이 더 유용할까. 1880년대에 에디슨과 테슬라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전류시스템을 새로운 세계의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살벌할 정도의 대결을 펼쳤다. 어떤 전기가 표준이 되느냐에 따라 그에 따른 수많은 인프라 생산 등 막대한 시장 이익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는데, 이익에 관한 한 특히 에디슨의 집착이 컸다.

이미 자신의 공장을 가지고 세계 최초의 축음기(1877년)와 전화기(1879년), 동시에 두 개 이상의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는 전신기 등의 개발에 성공한 에디슨은 1876년 다소 실용적인 전구를 발명한 뒤 뉴욕 근교 멘로파크에 연구소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전기 인프라 판매에 나섰다. 1882년에는 전등을 전문 제조하는 에디슨전등회사도 만들었다.

멘로파크 에디슨 연구소의 실험실 내부(1880년). 퍼블릭도메인

우선 1881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전기박람회가 열렸을 때 에디슨은 무려 30톤이나 되는 직류발전기를 설치했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보통의 발전기들보다 4배 이상 큰 ‘점보발전기’에 무려 1천 2백개 이상의 전구를 연결하여 불을 밝혔다. 사람들이 에디슨 발전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연 에디슨을 위한 박람회였다. 에디슨은 박람회의 대상(大賞)에 해당하는 명예훈장을 받았다.

이 성공적인 퍼포먼스로 에디슨은 전기에 관한 한 당대의 대표적인 발명가로 떠올랐다. 그의 전기사업도 탄력을 받았다. 1882년 맨해튼 5번가에 발전소를 세워 도시 전체에 전등을 밝혔다.

1881년 국제 전기박람회가 열렸던 파리의 산업궁전 삽화. 퍼블릭도메인

조선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이듬해 마침 태평양 넘어 조선에서 건너온 외교사절들이 뉴욕의 신문물에 크게 감명받았다. 조선으로 돌아간 뒤 고종에게 건의하여 에디슨의 플랜트사업에서도 상당히 초기에 해당하는 발전소를 조선 왕궁에 유치하게 된다.

1887년 1월 마침내 에디슨회사의 발전기가 경복궁 경회루의 물을 이용하여 가동되었는데, 증기터빈을 거쳐 뜨거워진 물이 다시 연못에 흘러들자 못 속에 살던 아름다운 황금잉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과학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조선은 아직 현대과학을 이해하기에 이른 시기였다. ‘불타지 않는 조명’에다 궁중 잉어들의 떼죽음- 놀란 조선인들은 이것을 불길한 징조로 해석했다.

2015년 경복궁 복원사업과 함께 발굴된 향원정 옆 옛 에디슨전기등소(발전소) 흔적. 1887년 고종의 지시로 설치되어 1894년까지 가동했다. 에디슨다이나모 발전기 3대가 설치되어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밝힐 수 있는 용량이었다고 한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에디슨의 사업공세는 유럽에서도 이어졌다. 파리 전기박람회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에디슨은 곧 유럽시장을 노리고 파리에 지사를 세웠다. 이어서 각국 대도시마다 파리지사의 지점이나 연락소가 설치됐다. 당시 스무 살 안팎의 니콜라 테슬라가 에디슨 전기와 인연을 맺은 것도 바로, 이 사업망을 통해서였다.

1856년생인 테슬라는 예사롭지 않은 상상력과 지나칠 정도의 실험정신을 지닌 소년으로 자라났다. 몇 번이나 호기심을 향해 몸을 던지는 바람에(지붕에서 뛰어내린다든지 끓는 우유 속에서 삶아질 뻔한 일 등) 죽다 살아난 일들이 있었다. 학교와 상관없이 다양한 물리실험과 수학에 특히 재능이 뛰어났고 언어는 당대 유럽에서 통용되는 9가지의 언어를 다 구사할 만큼 특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 18세 무렵에는 1년 동안 산속에 들어가 요양생활도 해야 했다. 당시 유행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근심 가득한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아버지, 이번에 살아나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세요.” 그가 하고 싶은 일이란 부모가 바라는 신학이나 법학의 길을 포기하고 기술자가 되는 일이었다. 가난한 목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허락했다.

다행히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오스트리아 그라츠공과대학(TGU)에 전액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으로 받아주었다. 얼마나 공부와 실험을 열심히 하였던지, 지도교수 포에쉴은 테슬라가 저러다 죽지 않을까 염려했다. 오죽하면 테슬라의 아버지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테슬라에게 건강을 위하여 제발 책 읽는 시간을 줄이고 잠을 충분히 자도록 권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테슬라의 고향 스밀란(현 크로아티아 릴카)에 복원된 생가. 오른쪽에는 감리교 목사였던 아버지가 시무한 교회당 건물이 살짝 엿보인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파손된 것을 복원해 테슬라를 기념하고 있다. ⓒMaya Sim Fan 2007

테슬라는 이 시기에 헝가리 중앙전신국을 위해서도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에디슨회사의 부다페스트 전화교환국과 인연을 맺게 된다. 에디슨의 발전소와 전기시설은 아직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걸핏하면 시설에 불이 붙거나 발전기가 멎기 일쑤였다. 조선에서도 역시 전기가 멋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일이 잦아서 ‘건달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일화가 있다. 

테슬라가 몇 번, 순수한 공학도의 관심에서 고장 난 전기시설을 찾아가 고쳐준 적이 있는데 에디슨회사의 기사들도 쩔쩔매는 문제점을 단박에 잡아낼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다. 이 무렵에 전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공직자거나 부자들이었다. 테슬라의 기술에 반한 사용자들을 통해 소문이 퍼지면서 파리지사에서도 그를 주목하고 특채를 했다. 
전기와 철도는 당대의 첨단산업이었다. 에디슨전기회사는 공학도들에게 당연히 선망의 대상이었고, 테슬라 역시 에디슨회사 경력이 기술자로서의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1882년 파리 지사에 취직하여 에디슨회사가 설치한 전등이나 모터 시스템들을 솜씨 좋게 개선해 나갔다.

중요한 행사장에서 정전사고가 나서 이미 설치한 시설을 철수해야 하는 위기가 닥쳤을 때도 테슬라가 달려가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곤 했다. 지사장 찰스 베처러는 에디슨회사의 창업자 중 한 사람이다. 하루가 멀다고 발생하는 전기시설의 문제를 그때마다 마법처럼 해결하는 테슬라를 보면서 그를 뉴욕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뉴욕 본사에서도 발전기나 모터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천재적인 전기기사를 본사에 보내는 것이 에디슨 발전기가 지닌 결함들을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데 도움 될 것으로 판단했다.

두 천재, 2년 만에 앙숙이 되어 결별한다

이야기는 다시 에디슨과 테슬라의 첫 대면 순간으로 돌아간다.

테슬라는 에디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곧바로 에디슨 발전기와 시스템 문제의 핵심을 언급했다. 유럽에서 고장 난 발전기나 원동기(모터)를 수리할 때마다 테슬라는 시스템 자체에 보편적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고 나름으로 개선 방법을 생각해보곤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것을 직류 아닌 교류시스템으로 바꿀 때 문제는 더욱 줄어들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테슬라가 개인적으로 교류모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이미 공과대학 재학 중의 일이다.

1880년 에디슨이 새 연구소 멘로파크에 설치한 기차선로. 맨 앞의 기관차는 직류모터로 구동하는 전기기관차이며, 직류 전원은 레일을 통해 공급된다. 퍼블릭도메인

직류발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교류 시스템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제안은 에디슨의 성격을 완전히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스스로 ‘천재’라는 자부심이 충만했던 에디슨은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듯 버럭 화를 냈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교류는 위험한 전기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거대한 나라에 직류 공급을 시작했어. 사람들은 직류시스템을 좋아하고 있다고.

그렇다. 자존심 문제만이 아니었다. 사실 직류전기의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이미 여기저기 구축되기 시작한 직류설비를 근본부터 바꾸기에는 늦었다는 사업적인 고려도 있었다. 하지만 초면에 직류전기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 말하는 테슬라에 대하여 ‘뭔가 알긴 아는 모양이군’하는 기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베처러가 추천한 사람이니 일단 받아는 주겠네. 마침 배에 설치된 조명 설비를 고쳐 달라는 민원이 들어와 있으니 자네가 가서 한번 고쳐보겠나?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에디슨은 짐도 풀지 못한 테슬라에게 첫 번째 임무를 주었다. 테슬라는 공장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곧장 강변으로 달려갔다. 당시 에디슨의 직류 조명설비는 대양을 건너는 증기선에도 설치되었는데, 바다 위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배들은 꼼짝없이 항해를 중단하고 그에 따른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테슬라는 SS. 오레곤이라는 배에 올라가 밤새 손을 보아 새벽녘에 일을 마쳤다. 첫날부터 밤샘 작업을 하고 공장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몇 명의 회사 간부들과 함께 퇴근하던 에디슨과 마주쳤다.

“우리 파리지엥이 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군.” 
에디슨이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걸자 테슬라는 지금 막 지시받은 배 수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헤어져 지나쳐 가면서 에디슨은 동료들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허, 제법 대단한 녀석이네."

에디슨이 만든 다이나모직류발전기의 초기 버전 (1880년).
증기터빈으로 구동한다. 퍼블릭도메인

여기서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에디슨도 테슬라도, 잠을 매우 적게 자는 사람이라는 것. 오늘 밤 경우는 좀 예외적이지만, 테슬라는 새벽 세시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람이고 에디슨 또한 밤잠을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시급히 마쳐야 할 일이 생기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매달려 끝을 보고서야 쉬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의 습관이다.

근래 학자들이 말하는 ‘영재의 특성’을 들어보면, 천재성을 가진 영재들은 공통으로 잠을 적게 잔다는 항목이 빠지지 않고 들어있다.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그들에게는, 자는 시간마저 아까울 만큼 이 세상이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를 시연하고 있는 40대의 에디슨. 
Abraham_Archibald_Anderson이 1890년에 그린 유화. 퍼블릭도메인

세계 최고의 발명왕 에디슨, 그리고 신비스럽기조차 한 전기의 영재 테슬라. 천재적인 두 사람이 잘만 하면 손발이 척척 맞는 세기적 발명 동업자가 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1884년 뉴어크 공장에 나타난 테슬라는 2년 뒤 에디슨을 떠나 이듬해 자신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전기회사를 차리게 된다. 두 사람이 화합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청년시절부터 교류전기 시스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테슬라에게 문제점을 알면서도 직류를 고집하는 에디슨과의 동행은 시간낭비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테슬라에게 단호한 결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1986년에 일어났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2부. T.에디슨 vs N.테슬라 ②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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