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9] 세계대전과 핵무기 탄생비화...전쟁과 평화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6.05 14:11
  • 수정 2023.06.1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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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손보기’ 세계전쟁으로. 전사 군인만 1천만
2차 대전 빗나간 민족주의에 전 세계가 불구덩이, 과학기술 비약적 발전
13만 명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 원자탄 만들며 핵 응용기술도 개발
나치독일 로켓 과학자들 종전 후 미국 건너가 아폴로계획 주도

지구가 한 마을처럼 가까워진 100년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20세기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키워드는 ‘글로벌’이란 말일 것이다. ‘세계화’ ‘지구촌’ 같은 단어가 관련 키워드로 언급될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활달한 문화예술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교류되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시스템이 구비되었다. 지구의 이편에서 저편까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와 개인통신 등의 수단이 구축되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상상에 그치던 놀라운 변화였다. 20세기 초만 해도 외국물품 사용을 낯설어하던 인류가, 지금은 국제적 물자교류 없이는 단 하루라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력을 가늠하는 데에는 군대의 숫자나 무기 보유량보다 외국과의 교역이 얼마나 활발한가를 나타내는 무역통계와 생산지수, 재정보유고를 먼저 비교한다. 이것이 20세기 말에 도달한 인류의 발전상이었다. 이러한 소통의 자유로움은 주로 20세기 기간에 구축된 것들이다.

1872년 쥘 베른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이제 10대 소년이라도 할 수 있는 손쉬운 여정이 되었다. 인공위성의 속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람이 조종하는 시속 1천km의 제트기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는 약 40시간이면 족하다. 1995년에 기록을 위해 도전한 미군 B-1폭격기는 중간에 공중급유를 받으며 무착륙 논스톱으로 날아 36시간 13분 만에 일주를 마쳤다.

1947년 뉴욕의 팬암항공 프로펠러 항공기는 런던-이스탄불-캘커타-방콕-마닐라-도쿄 등을 거쳐 14일 만에 출발공항으로 귀환했으며, 1976년에는 제트여객기가 델리와 도쿄만 경유하여 36시간 만에 일주를 마쳤다. 1995년 에어프랑스의 초음속 콩코드 여객기는 아부다비-방콕-괌-호놀룰루-아카폴코를 경유하며 31시간에 귀환한 기록을 남겼다.

1903년 고든베넷컵에 출전했던 미국 윈튼(Winton)사의 뷸렛2 레이스카. 대회에서는 순위에 들지 못했지만, 본국으로 돌아와 출전한 경기에서 시속 130킬로를 내며 우승했다. 윈튼의 강력한 디젤 엔진은 이후 철도 기관차와 각종 동력함정, 잠수함 등에 제공되어 명성을 떨쳤다.
1903년 고든베넷컵에 출전했던 미국 윈튼(Winton)사의 뷸렛2 레이스카. 대회에서는 순위에 들지 못했지만, 본국으로 돌아와 출전한 경기에서 시속 130킬로를 내며 우승했다. 윈튼의 강력한 디젤 엔진은 이후 철도 기관차와 각종 동력함정, 잠수함 등에 제공되어 명성을 떨쳤다.

이동수단이 혁신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1900년 무렵이다.
아직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전기자동차, 가솔린을 쓰는 내연기관 자동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실용화 연구를 거듭하던 시기에 하늘을 날려는 비행기와 인력으로 달리는 자전거 연구가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좀 의외의 일이다.

길게 잡아 40~50년 사이에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등장하여 실용화되었다. 지금과 같은 모양의 ‘안전자전거’가 등장한 것은 1880년대이다. 미국에서 그 자전거를 팔아 돈을 번 젊은 사업가 윌버와 오빌 라이트 형제가 1900년부터 ‘비행기계’ 개발에 돌입하여 1903년 처음으로 자기 동력으로 공중에 뜨는 비행기를 발표했다. 조종사 외의 승객을 태우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비행을 시연한 것은 1910년 무렵이다.

이 시기에 에디슨은 한번 충전으로 1천마일(1,600km)을 달리는 전기자동차를 개발하고 있었지만, 충전 인프라의 한계 때문에 포드 자동차가 막 내놓은 모델-T 자동차에 주도권을 양보해야 했다. 미국의 포드가 대량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유럽에서는 다양한 자동차들이 본격 라인업을 선보이고 있었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자동차경주는 그 시대 최신 기술을 총체적으로 겨루는 장이었다. 자동차가 마차와 자전거, 육상선수 등과 속도를 겨룬 지 10년도 안 돼, 각국 제조사의 자동차끼리 속도를 겨루는 본격 그랑프리레이스가 1900년 봄 파리에서 열렸다. 마차나 자전거, 육상선수는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그랑프리레이스인 4회 고든배넷컵대회에서 메르세데스를 몰고 우승한 벨기에인 카밀 제나치가 결승점에 들어와 축하받고 있다. 1903년.
세계 최초의 자동차 그랑프리레이스인 4회 고든배넷컵대회에서 메르세데스를 몰고 우승한 벨기에인 카밀 제나치가 결승점에 들어와 축하받고 있다. 1903년.

미국 뉴욕헤럴드 발행인 고든 베넷이 후원하는 고든베넷컵 대회는 전체 500km 이상의 거리를 열흘 정도 랠리형식으로 열렸다. 6년간 이어진 대회에서 자동차들의 평균 주행 속도는 시속 60km에서 93km까지로 향상되었다. 구간속도 130km를 넘는 기록도 나왔다. 

이 대회에 참가했던 프랑스의 파나르는 뒤에 시트로엥과 르노트럭에, 미국 윈튼의 자동차 부문은 GM에 흡수되었다. 대신 윈튼은 강력한 디젤 엔진으로 기관차와 선박엔진 사업에서 명성을 떨쳤고, 영국의 네이피어는 항공기 엔진과 알스톰 전기기관차의 모태가 된다. 이탈리아의 피아트도 참가했다.
이밖에 굿이어 미쉐린 등 타이어회사들이 이 대회에서 자동차 제조사들과 함께 성능을 겨루었고, 대회기록을 위해 제공된 스위스 스타우퍼 시계는 ‘정밀공업에 강한 스위스’의 이미지를 굳혔다.

국경선을 다시 긋게 한 1차 대전

자동차 경주나 박람회, 스포츠 제전들이 국력을 견주기 위한 평화적 수단이라면, 전쟁은 폭력적 수단이다.

유럽에서 벌어진 첫 번째 대전은 바로 1차 세계대전(1914~1918)이다.
대개 독일이 주도해 일으켰다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또 하나의 거대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시작해 동맹국 독일제국과 오스만제국이 엉겁결에 말려든 전쟁이었다.

세르비아 사라예보에서 공격받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신문 삽화. 이 암살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1914년 7월 12일자 이탈리아의 신문. 퍼블릭도메인
세르비아 사라예보에서 공격받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신문 삽화. 이 암살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1914년 7월 12일자 이탈리아의 신문. 퍼블릭도메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천년 동안이나 북동유럽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AD 800~18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계였다. 제국이 수십 개의 군소 제후국으로 분열된 뒤에도 바로 할아버지 대까지 이어졌던 카이저시대에 미련을 갖고 ‘대독일주의(Groß Deutsche)’ 통합을 주창했는데, 북부 독일의 순수 게르만족 국가들은(프로이센 바덴 바이에른 헤센 등) 그들만의 통합을 원했다. 게르만의 ‘소독일주의(Klein Deutsche)’가 기회를 잡은 것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침공이었다(보-불전쟁, 1870~1871). 북독일 제후들은 프로이센을 도와 파리까지 반격해 들어갔다. 그러고는 파리의 베르사유궁전에서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독일제국을 선포했다.

프랑스 황제정치가 막을 내린 자리에서 독일제국은 화려하게 출범했다. 이후 빌헬름 1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신생 독일의 부국강병을 이끌어 강력한 제국을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20세기 초 유럽에 패권을 노리는 두 제국이 들어서게 된 배경이다. 당시 세계는 빅토리아여왕의 대영제국과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프랑스공화국, 그리고 바다 건너 신대륙에서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미국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혁신을 시작한 독일은 다소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다. 독일제국의 황제는 빌헬름 2세가 물려받고 있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후계자가 그들 스스로는 속국으로 여기는 세르비아를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 열혈청년의 총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프란츠 요제프1세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세르비아를 침공해 ‘유럽전쟁’이 시작됐다. 7월 28일이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한주먹에 세르비아가 항복하고 전쟁은 금방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빌헬름 2세는,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돕는다는 결정을 내려놓고 전쟁이 시작되기 전 발트해로 여행을 떠났을 정도다.

1914년 화물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독일군인들. 전쟁 초기만 해도 참전국들은 이 전쟁이 매우 짧게 끝나리라 예상했다.
1914년 화물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독일군인들. 전쟁 초기만 해도 참전국들은 이 전쟁이 매우 짧게 끝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오스트리아-독일-오스만 동맹을 견제하기 위하여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러시아제국, 그리고 공화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둘러 조직한 협상국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이 협상국에 가담했고, 전쟁이 길어지자, 전선은 더욱 확대되었다. 멀리 아시아의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그리고 참전을 망설이던 미국까지 말려들면서 ‘유럽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이 치러진 5년 동안 죽은 군인 숫자만 1천만에 가까웠고, 유럽인 6천만이 전쟁에 연루되었다.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군대가 포로로 잡은 세르비아 군인들을 사살하고 있다. 전쟁기간 중 세르비아 왕국은 85만명이 사망해 인구가 4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

이 전쟁에는 1900년 전후로 등장한 모든 과학기술이 국가의 명령 아래 동원되었다. 자동차 경주에서 경쟁했던 자동차기술은 탱크와 장갑차 생산에 동원되었고, 막 초보단계를 벗어난 항공기와 디젤함정, 무선통신 기술, 철강기술, 연속사격이 가능한 기관총, 수많은 화약과 총포들이 전쟁터에 동원됐다.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최초의 탱크. 캐나다산 마크V. (런던 전쟁박물관) - 공개도메인 2006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최초의 탱크. 캐나다산 마크V. (런던 전쟁박물관) - 공개도메인 2006 

아직 개발이 덜 되어있던 잠재적 기술까지도 동원되었다. 1915년에 독일은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잠수정을 개발해 투입했다. 물밑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는 독일군의 U-보트는 연합군에게 유령 같은 공포감을 주었다. 그러자 협상국 측은 즉시 물밑의 유령을 찾아낼 기술을 과학자들에게 의뢰했다.

1917년 독일 대양함대의 전함들. (퍼블릭도메인) 
1917년 독일 대양함대의 전함들. (퍼블릭도메인) 

이 긴급 요청에 부응하여 실용화된 기술이 바로 초음파 탐지기술이었다. 단 몇 달 만에 프랑스 과학자 랑주뱅이 초음파로 바다 밑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찾아내고 거리와 속도까지 계산해 내는 장비(소나)를 만들어 해군에 제공했다. 초음파탐지기는 전쟁 후에 더욱 발전되어 어선들이 암초나 어군을 찾는 장비로 활용되는 외에 건설 구조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초음파 자체가 가진 발열 및 진동유도 능력이 추가로 확인되어 인체나 구조물 내에서의 ‘초음파파쇄’ 기술도 개발되었다.

1917년 예루살렘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 포병대. (공개도메인) 
1917년 예루살렘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 포병대. (공개도메인)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에서는 뢴트겐의 X-레이가 수많은 부상병을 도왔고, 원시적인 플라스틱 기술로 의료보조기구들이 사용되었으며, 부상자의 국적을 따지지 않고 돌보자는 적십자운동도 발생하였다. 국제협약에 의해 조직된 국제적십자사는 ‘잔인한 전쟁을 계기로 발명된 가장 휴머니즘적인 20세기 발명품’이다. 전쟁 중 종군간호사들은 임시로 ‘붕대생리대’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미국의 킴벌리-클라크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종전 후 본격적인 일회용 생리대 ‘코텍스’를 출시했다(1920년). 아시아에서는 1963년 일본에서, 1966년 한국에서 각각 입체패턴 생리대가 처음 출시되었다.

1939년 9월1일. 폴란드로 들어가기 위해 국경 바리케이트를 허무는 독일군인들. 독일군이 이 선을 넘어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퍼블릭도메인

재래식 ‘마지노’ 장벽과 전설적인 구스타프 열차포

1차 대전의 결과로 단일 대제국은 사라지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터키) 등은 소박한 여러 나라 중의 하나가 됐다. 독일 역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뒤 무너진 게르만민족주의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한 몽상가가 나타나 독일인들에게 집단최면을 걸었다. 이 몽상가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총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의 세력변화 지도. GNU free 공개도메인

1차 대전이 끝난 1920년 처음 상업적인 라디오방송이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민간방송이 허용되자 단시간에 수백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났다. 마치 요즘 인터넷에 개인방송들이 우후죽순 개설되는 것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1930년대에는 드디어 TV방송도 시작되었다. 그 시기에 방송 기술을 가장 야심 차게 이용한 사람은 히틀러였을 것이다. 1936년에 독일은 베를린올림픽을 TV로 생중계하였다. 세계 정복의 야심을 품은 히틀러에게 라디오와 TV는 무엇보다 좋은 체제 선전·선동의 도구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히틀러와 무솔리니.

첫 번째 전쟁으로부터 단 20년 만에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일으켰다. 첫 전쟁에 비해 더 많은 숫자, 더 위력적인 탱크 전함 잠수함 대포 항공기들이 동원된 것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항공모함, 로켓미사일 같은 신무기도 등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위력적인 신무기는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미국의 원자폭탄이다. 제트엔진 전투기는 전쟁 말기에 등장하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으며, 독일이 개발을 시도한 광선무기는 실현되지 못했다.

독일공군의 대공습으로 파괴된 런던 시가지 모습(1940-1941). 독일은 이 공습과 함께 보병의 영국 상륙을 계획했으나 영국 측의 베를린 보복공격과 강력한 영국해군 때문에 전술을 바꾸었다.

전쟁 시작 전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선 수백km를 따라 장벽을 쌓고 포대를 촘촘히 설치하여 이른바 ‘마지노선(Maginot line)’을 설치하였다.

‘고대중국의 만리장성’에 비할 만한 대공사였는데, 히틀러는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 거창한 대포를 만들게 했다. 농담 같지만, 철강기술자 크루프 구스타프가 실제 그런 대포를 만들었다.

2차대전 때 사용된 나치독일의 거대 열차포. 레일 두 쌍을 나란히 깔고 열차포를 놓아야 할 만큼 무겁고 거대했다. 현대의 미사일에 맞먹는 파괴력을 가졌으나 기동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 단 한 대만 실전에 사용됐다.

대포 하나의 길이가 47.3미터, 높이 11.5미터, 중량 1,350톤, 대형 구축함에 맞먹는 전설적 크기였다. 긴 열차에 부품을 나누어 싣고 전선 가까이 접근하여 현지에 2쌍의 철로를 나란히 깔아 놓고 조립해서 사용해야 했는데, 매번 조립에만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이 ‘열차포’ 하나를 위하여 포병대원 250명을 비롯 2,500여명의 기술자, 인부, 경비병력 등이 전속되었다. 구경 80cm, 길이 32.5m의 포신을 통해 무게 7톤을 넘는 포탄 한 발을 날리면 직경 10미터가 넘는 웅덩이가 생겼다. 최대 사거리 40km 이상으로 설계됐지만 실전에서는 6~7km 거리에서 사용됐다.

1년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포가 완성된 1940년에 마지노선 장벽은 이미 전쟁터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이듬해 소련 전선의 세바스토폴 공성전에 구스타프 열차포를 끌고 가 그 위력을 시험했다. 7톤짜리 고폭탄 한 발이 떨어진 자리에는 직경 12미터의 웅덩이가 남았고, 포탄이 파고 들어간 깊이는 20미터나 되었다. 스물다섯 발의 포탄을 쏜 뒤에 세바스토폴 요새가 무너졌다. 같은 대포가 하나 더 만들어졌으나 사용할 기회가 없었고, 세 번째 포가 제작되던 중 전쟁이 끝났다. 독일군은 종전 직전 이 포들을 모두 폭파하고 설계도면도 없애버렸다.

우주가 궁금했던 로켓 소년 ‘전범’이 되다

프랑스의 마지노선 요새나 독일의 거대 열차포는, 그 위력이 어마어마하지만, 재래식 수단의 극대화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무기에 해당하는 포와 폭탄은 역시 로켓미사일과 핵폭탄이다.

마치 비행기처럼 수백 km의 장거리를 날아가 목표 지점 가서 폭발하도록 설계된 미사일은 기존의 포탄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였다. 미사일은 장거리를 날아갈 수 있도록 포탄 내부에 연료를 채우고 있었고, 또 고공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높이 쏘아 올리는 데 로켓 기술을 이용했다. 이 로켓을 만든 핵심 기술자는 갓 스무 살에 징집되어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독일 로켓연구소에 복무한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이다.

베르너 폰 브라운

폰 브라운은 독일 공무원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며 우주여행의 꿈을 키운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을 즐겨 연주했으며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다. 청소년기에 베를린공과대학에서 우주여행협회에 가입하여 로켓을 연구하면서 공개적인 발사실험을 80여 차례나 주도했는데, 이를 눈여겨본 독일육군로켓연구소의 발터 도른베르거 소장이 그를 발탁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32년부터(20세)부터 연구소와 연을 맺은 브라운은 연구소의 후견 아래 베를린빌헬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취리히공과대학(ETH)에서도 공부했다.

2차 대전 발발 후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은 ‘항공폭탄’으로 불린 V1, V2 로켓 미사일을 연속 개발했다. 1944년 V2로켓은 실전에 배치되어 3천발 이상이 런던과 벨기에 앤트워프 등을 폭격했다. 뒤에 영국 BBC방송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이 공격으로 죽은 사람은 민간인 포함 약 9천명이었고, V2개발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와 수용소 인원 등은 그보다 많은 1만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2차대전 중 독일군을 위하여 세계 최초의 로켓미사일을 개발했던 독일로켓연구소 발터 도른베르거 소장과 헤르베르트 액스터, 베르너 폰 브라운, 한스 린덴버그와 베르나르드 테스만 등(왼쪽부터). 1945년 제각기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연합군에 투항한 귀순포로 신분으로 합류하였다(4월3일). 이들은 미국으로 넘어간 뒤 미군의 미사일 개발을 돕다가 그 중 일부가 NASA 창설에 합류했다.

1944년 브라운은 로켓 프로그램을 SS에 넘기라는 게슈타포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여 체포되었다. 도른베르거 소장이 히틀러를 직접 설득하여 석방되었는데, 그 대신 뉴욕까지 날아갈 수 있는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만들라는 요구를 받았다. 2단 로켓을 연구하여 발사시험을 앞두고 그들은 차례로 잠적하여 오스트리아로 달아나 미군에 투항하였다.

과학자들이 순순히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면 히틀러는 1945년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또 히틀러가 고대하던 ‘살인광선’이나 핵폭탄이 일찍 완성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연구를 지연시키거나 고의로 실패하는 등은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방식이었을 것이다.

도른베르거와 폰 브라운을 포함한 로켓 과학자와 기술자 1백여 명이 나치 패망 후 귀순포로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이들은 미 육군을 위하여 유도미사일을 개발하다가 1958년 미 항공우주국(NASA) 창설에 주축이 되었다. 1969년 폰 브라운의 주도로 개발된 전장 110미터 높이의 ‘새턴V’ 로켓이 아폴로 11호를 달나라까지 쏘아 올리며 우주여행 시대를 열었다.

‘상호확증파괴’...전쟁을 멎게 한 핵의 위력

한편 미국에서는 나치독일의 신무기를 무력화할 또 다른 ‘과학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반대하거나 피해자로서 망명한 과학자들이 주도한 ‘맨해튼프로젝트’는 전쟁 발발 3년째인 1939년 태동하였다.

전쟁 발발 무렵까지 독일제국은 20세기 들어 활발해진 현대물리학의 중심지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발전되었지만, 아인슈타인과 대립각을 세웠던 양자역학의 쟁쟁한 학자들 다수가 독일인이거나 그 주변에 있었다.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루이 드브로이, 막스 보른, 볼프강 파울리, 에르빈 슈뢰딩거, 리처드 파인만 등등…. 그리고 핵물리학의 개척자인 프랑스의 퀴리 부부 가족까지. 국제물리학대회가 열리면 노벨상이 보증하는 이 쟁쟁한 학자들이 독일에 모여들어 열띤 토론을 벌이며 새로운 이론들을 예측하고 가다듬었다.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독일의 학문적 주도권은 오래 유지되고, 베를린은 20세기 과학자들의 수도로 확고한 지위를 굳혔을 것이다.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이 이후 영어를 배우듯 독일어를 배우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민족패권에 눈이 먼 히틀러가 이 구도를 흔들었다. 독일의 명예를 높이는 세계적 학자들을 조금도 아까운 줄 모르고 국외로 내쫓거나 일개 ‘종군 기술자’로 부리려다 집단적인 망명을 자초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쟁쟁한 학자들의 저서와 친필 노트들을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쓰레기처럼 쌓아놓고 불태웠다. 급기야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는 예술가 음악가 문인들이 줄줄이 독일을 떠났다. 직장을 잃은 기술자들을 신흥강국 미국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에 망명한 유럽계 과학자들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핵폭탄 개발을 청원하며 보낸 편지. 1939년.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이 편지 이후 미국의 ‘맨해튼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우려했던 전쟁이 시작된 후 망명 과학자들은 독일이 보유한 과학기술이 전쟁에 악용될 것을 걱정했다. 전쟁 초기 나치군이 사용한 신무기들 다수가 그동안 축적된 과학기술을 토대로 개발된 것도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핵무기였다. 아직은 이론 단계에 머무는 핵물리학을 토대로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경우, 연합국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국도 결코 그 위협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독일에 남아있는 과학자들은 그것을 개발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히틀러는 충분히 그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헝가리계 망명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이러한 경고를 전하기 위한 편지가 작성되었다. 은퇴하여 휴양지에 머물고 있던 20세기 현대물리학의 대부 아인슈타인이 서명하였다. 미국은 아직 이 전쟁을 ‘유럽전쟁’이라 부르며, 그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던 탓에 F. 루즈벨트 정부는 편지를 받고도 즉각 움직이지 않았다. 전쟁 중인 독일이 과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핵무기를 쉽게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바로 일본 함대에 의한 진주만 기습사건이다. 진주만이 초토화된 바로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아침. 안보관련 비상회의와 함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할 암호명 ‘S-1위원회’가 워싱턴DC에서 긴급 소집됐다. 긴급 예산 편성과 사전 준비를 거쳐 6개월 뒤 뉴욕 맨해튼에 공식 사무실이 차려졌다. JR오펜하이머, 존 폰 노이만 등 핵물리학자들이 군사 지원단과 함께 ‘맨해튼프로젝트’를 가동하는 순간이었다.

1945년 7월, 앨러모고르도 사막에서 핵폭발 실험이 끝난 뒤 맨해튼프로젝트 관계자들이 폭발물을 설치했던 철탑이 녹아내린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에는 방사능 피폭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 가운데 군복을 입은 레슬리 그로브 육군장성 바로 옆에 밝은색 모자를 쓴 사람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1945년 7월, 앨러모고르도 사막에서 핵폭발 실험이 끝난 뒤 맨해튼프로젝트 관계자들이 폭발물을 설치했던 철탑이 녹아내린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에는 방사능 피폭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 가운데 군복을 입은 레슬리 그로브 육군장성 바로 옆에 밝은색 모자를 쓴 사람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 결과 56개월 뒤에 두 가지 핵폭탄이 탄생했다. 플루토늄탄인 내폭형 ‘팻맨’과 우라늄-235를 이용하는 포신형 ‘리틀보이’가 그것이다. 이 사업에 동원된 인원은 자그마치 13만 명이나 되었다. 사업비용으로 20억 달러에 가까운(1945년 기준) 예산이 곳곳에 공장을 짓거나 핵연료를 구입하고 인력을 운용하는 데 투입됐다. 우라늄 원광 3천여 톤이 체코, 콩고, 캐나다, 콜로라도 등 4곳의 광산으로부터 공수되었다.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설비에 필요한 6천 톤의 은(銀)은 연방은행에서 빌려 사용했는데, 당시 시세로 72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실제 사용된 은은 그 배가 넘는 1만 4천 톤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최초의 원자폭탄이 완성되기까지 연구 실험 및, 연료와 부품 제작 등을 나눠맡았던 ‘맨해튼프로젝트’ 관련 시설 지도. 미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모두 위장 간판을 달아 비밀리에 운영되었다. Y-구역으로 불린 로스앨러모스 기지가 핵심시설로, 여기서 완성된 핵분열 우라늄탄의 폭발실험(트리니티작전)은 1945년 7월 인근 사막지대인 앨러모고르도(뉴멕시코주)에서 성공리에 이루어졌다.

한편 맨해튼계획과 연관된 첩보부대가 유럽에서 숨 막히는 활약을 펼쳤다. 독일의 핵 개발상황을 탐지하고 그들이 미국보다 먼저 성공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실제로 나치군을 위하여 가동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중수로가 노르웨이에서 발견되자 요원들은 이를 파괴하고 운반선을 침몰시켰다.

동시에 국내 프로젝트팀 내에서도 첩보활동을 펴 경쟁국인 소련에 중요한 정보를 누설한 요원들을 색출하기도 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한 메인캠프 테네시주의 Y-2 우라늄농축시설. 퇴근하는 직원들 뒤로 울타리에 ‘보안유지’를 강조하는 경고포스터가 붙어있다. 대부분 직원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한 메인캠프 테네시주의 Y-2 우라늄농축시설. 퇴근하는 직원들 뒤로 울타리에 ‘보안유지’를 강조하는 경고포스터가 붙어있다. 대부분 직원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영국이나 소련 등 동맹국 측에 고의로 핵 관련 정보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의 목적은 단순히 사적 이익을 취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원자폭탄은 절대적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지구상에서 강력한 미국만이 독자적으로 보유한다는 것은 곧 ‘절대국가’의 탄생을 의미할 것이다. 적어도 역사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몇몇 나라들이 그것을 보유한다면, 누구도 함부로 공격하거나 짓밟지 못할 것이다. 상당수 과학자가 세계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이런 우려에 공감하고 있었다.

“먼저 공격하는 나라가 곧 보복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면, 누구도 먼저 공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상에서 전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던 알프레드 노벨이 기대한 평화유지론이다. 그가 만든 다이너마이트로는 전쟁억지력이 될 수 없었지만, 단 한 발로 다이너마이트 수천~수만 톤의 위력을 내는 원자폭탄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전쟁억지력이 성립되었다.

완성된 원자폭탄의 첫 실험. 폭발장면.
완성된 원자폭탄의 첫 실험. 폭발장면. 1945년 7월 앨러모고르도사막 

‘팻맨’과 ‘리틀보이’ 두 개의 핵폭탄이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침략국 일본의 도시 두 곳에 떨어지면서 사람들은, 그리고 과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이 폭탄이 적국에만 위험한 무기가 아님을 실감했다. 단 한 발로 대도시 하나가 초토화되고 무사히 살아남은 시민들 사이에서는 뇌가 자라지 않은 채 출산하는 소두증 아이들이 다수 태어났고, 20세기 말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후유장애를 앓았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수년 안에 소련이나 영국과 프랑스 중국 등 동맹국들이 모두 핵을 보유하게 되자 미국은 다른 나라의 핵 보유를 막으려던 전략을 바꿔 현실을 인정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상대가 핵 공격을 감행한다면 남아있는 핵무기로 즉시 반격하여 상대방도 절멸시킨다는 전략이다. 세상은 이를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라 불렀는데, 얼마 뒤 소련도 이 정책을 받아들였다. 즉, 어느 쪽도 도발할 수 없는 견제상황이 된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간 직접 충돌은 없지만, 지구가 반쪽이라도 난 것처럼 냉랭하기 그지없던 50~80년대 ‘냉전(cold war)’기의 배경이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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