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화배우 김태희 2...‘청춘의 방황, 엄마 보고 싶어 배우 되다'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12.22 14:38
  • 수정 2023.12.2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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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네요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서러운 이야기도 있지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알 수 없는 그런 얘기 말이에요

- ‘둥근 사랑’, 윤재훈

영화배우 김태희. 사진=김태희 제공
영화배우 김태희. 사진=김태희 제공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엄마를 애끊게 만나고 싶어 하는 배우 김태희를 만났다. 그도 이제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왜 그리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 엄마와 헤어진 뒤 새어머니를 두 분이나 만났다. 그중 첫째 새어머니는 그가 가장 예민하던 초, 중학교 시절에 만났는데, 자신을 구박하고 때리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은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아이는 집보다 밖으로 싸돌았다.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못 받고 2학년 때부터 육상을 시작했다. 그래도 운동을 열심히 해 4학년 때부터는 오후 수업을 안 받고 학교 대표 선수로 계속 운동만 할 수 있었다. 그러다 1등도 해 아버지가 보러 오시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에 대한 운도 없었던지 중학교 때 이사하여 학교에 들어갔는데, 운동부가 없는 학교였다. 초등학교 내내 운동만 했는데, 그런 상실감에 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는 키가 작았는데 중학교 3년 동안 매년 10센티 미터 이상씩 커나가 지금 178cm인데, 중3 때 177cm 정도였다고 하니, 그때 다 커버린 셈이다.

배우의 어린 시절, 엄마의 품에서. 사진=김태희 제공
배우의 어린 시절, 엄마의 품에서. 사진=김태희 제공

집에서는 밥을 잘 못 먹고 도시락도 싸주지 않아 친구들 밥을 함께 먹거나, 뺏어 먹기도 했다. 아빠가 가끔 매점에서 뭐 사 먹으라고 돈을 주고, 가끔 형이 도시락도 싸주기도 했다.

집에는 들어가기 싫어 친구들과 운동하면서 어떻게든 먹었다. 이 친구 저 친구 집에 가거나 아니면 형네들 집 가서 먹기도 하고, 그나마 성장기에는 잘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정도 덩치기 커 가니 집에서 맞지 않게 되었다. 워낙 방황을 많이 해서 또래 중에는 싸움을 제법 했는데, 친구 중에서 제일 잘했다고 한다. 힘들게 살다 보니 악만 생겼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집이라는 데에 들어가기 싫은 곳이었으므로, 다른 애들하고는 생각부터가 너무 달랐다.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사회에서도 잘 맞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끝자락만 바라보고 산 것 같다는 그의 청춘이, 많이 아파 보인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빠 사업도 망하고 다 힘들어지니까, 그제야 이혼하고 나갔다. 고 1학년 때쯤이었으니, 거의 10년 이상을 함께 산 것 같다. 자신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이 온통 그 여자하고 싸우고 산 것 같아, 지금도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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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눈보다 예민한 촉감으로 서로를 확인한다고 합니다
점자를 만지듯 그릇을 닦지만
그것이 햇빛 아래 얼마나 눈부신지
이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 살 때 데려온 광숙이가
“어부바 어부바”하면서 등에 매달리던 기억이
평생을 두고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합니다
겨울바람에 홀로 남은 까치밥처럼
두고두고 시리다고 합니다

밤이 찾아와도
불을 켤 필요가 없는 집이지만
그래도 어두움이 싫어 항상 밝은색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생일날 환한 새 한복을 맞춰 입고
서로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가족들은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창가 햇볕 아래에서
사진에다 얼굴을 대고 아무리 뚫어져라 들여다보지만
세상은 하얀색과 검은색 두 가지로만 보인다고 합니다

네 명의 자녀를 데려다 키웠다지요
국적은 모두 한국 애들이랍니다
태어나면서 앞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았다지요
번잡한 시장통에서,
고아원 앞에서 지치게 울다가,
눈 내리는 날, 어느 부잣집 앞에서

2
그게 어디 우리들의 책임입니까
낮달을 보며 한낮을 짖던 개들도
날이 저물면 새끼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부모님은 저를 버렸답니다

제 이름은 서러운 광숙이지요
하마, 조국도 우리를 버린 게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에도 무슨 조건이 있답니까
머나먼 바다 건너 이국(異國)땅에서
둥근 사랑 하나 배웠답니다

못 본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을 버릴 수는 없는 게죠
엄마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네요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서러운 이야기도 있지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알 수 없는 그런 얘기 말이에요

어두컴컴한 공간에 홀로 앉으면
오늘도 일산시장 어디쯤 흐르는
바람을 만납니다

- ‘둥근 사랑’, 윤재훈

영화배우 김태희. 사진=김태희 제공<br>
영화배우 김태희. 사진=김태희 제공

아주머니와 맨날 싸우고 사는데 어느 날 또 때려, 그만 때리라고 서로 욕하다가 처음으로 여자를 엄청 때렸다.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모양이다. 그래도 여자가 막 덤벼들었지만 이미 중학생이 되고 덩치가 커버린 자신과는, 힘에서 차이가 나 더 이상 덤빌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나를 때리지 말라고,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도, 또 서로 욕을 하며 3년을 더 싸웠다.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거의 매일 싸운 것 같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나가지 않았다. 자신도 나가지 않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집처럼 잘 사는 것도 아닌 데, 종일 집에 붙어 있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끊임없이 집을 나가 계속 아빠와 아주머니의 싸움 빌미가 되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빠 사업도 망하고 다 힘들어지니까, 그제서야 이혼을 하고 나갔다. 고 1학년 때쯤이었으니, 거의 10년 이상을 함께 산 것 같다. 자신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이 온통 그 여자하고 싸우고 산 것 같아, 지금도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연극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빠텐더 하던 시절. 사진=김태희 제공
연극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빠텐더 하던 시절. 사진=김태희 제공

그 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이제 다 성장한 것 같은데, 또 다른 아주머니가 집에 들어왔다. 이제 19살인데, 어릴 때야 우리를 보살핀다는 이유로 새 아주머니가 들어왔지만, 이제는 우리 스스로 살만한 나이인데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아빠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가 있었다.

아빠도 순진하게 이 아주머니는 그 아주머니하고 다르다고, 또 믿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에게는 따로 자식이 있는데 만나고 싶어 해도, 자식들이 거부한다. 나는 이렇게 엄마가 보고 싶은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나중에 엄마가 보고 싶으면 자기가 찾아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왔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 많은 배신감을 느꼈다.

제대할 무렵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었고, 어머니를 만나도 내가 마땅하게 보여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를 보고 싶다는 염원에 배우에 대한 꿈을 꾸었고, 내가 화면에 나가면 엄마가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갈수록 앞날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고 그러다 보니 배우라는 꿈이 생겨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랑 안 좋게 헤어졌지만 내가 세상에 나가면 엄마를 꼭 찾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기도 했다. 나도 형도 이렇게 잘 컸다고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다.

영화 ‘한산’에서.&nbsp;사진=김태희 제공
영화 ‘한산’에서. 사진=김태희 제공

고모들은 왜 이제 와서 그런 분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못마땅해하셨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단 하나뿐인 엄마가 아닌가.

이제 배우가 되어서 내 이름이 알려지고 정 만나지는 못한다면, 간접적으로라도 나를 보고 우리가 잘 큰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배우를 시작했고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은 대학도 다니지 않고 혼자서 극단에 들어가 연극 공부하면서, 딱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 혼자서 영화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17년 차가 되고 마흔 살도 훌쩍 넘기면서, ‘한산’, ‘극한 직업’ 같은 영화도 출연했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영화의 바람’에서 바텐더로 출연해 오늘의 비전 상도 받았다.

SBS 드라마의 ‘왜 오수재인가?’에서는 형사 역할을 했으며, 각종 공중파에도 출연했다. 예능 프로그램인 정글의 법칙에도 출연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다해 놓은 촬영본이 나가지도 못한 아쉬움도 있다.

포대기에 쌓여있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nbsp;사진=김태희 제공
포대기에 쌓여있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사진=김태희 제공

세월이 지나갈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나 학창 시절이나 진로문제로 고민할 때, 이 세상에 그 누군가하고 의논할 사람이 없다는 것 앞에서, 더욱 막막했다고 한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무얼 해야 할지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엄마가 더욱 그리웠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랑 이야기도 하고 고민을 나누는데, 나는 그런 사람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서러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냥 내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어릴 때 화상을 당한 적이 있는데 병원에 간다는 소리를 못 해, 지금도 얼굴 한 부분이 약간 붉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쯤에는 뻘밭 같은 데서 놀다가 유리를 밟았는데 그 아주머니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못 해, 여름날 그냥 붕대만 감고 4일을 있었다. 그런데 발이 썩기 시작하여 아빠가 출장 갔다 와서 보고 깜짝 놀라 병원에 갔는데, 조그만 늦게 왔으면 발을 못 쓸 뻔했다고 했다.

어린아이가 아주머니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는 말도 못 하고, 밤새 아픈 발을 붙잡고 혼자 골방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안쓰럽다. 그는 그 정도로 아주머니가 싫었다. 그때가 하마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는데,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엄청 싸웠다. 아이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했냐고.

영화 ‘한산’에서.&nbsp;사진=김태희 제공
영화 ‘한산’에서. 사진=김태희 제공

그 후에도 집에 들어가기 싫으니까, 운동만 했다. 너무 늦게까지 열심히 해서 코피가 자주 났는데, 잘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랑 병원에 가서 약을 묻혀 콧구멍 안에 넣었던 기억도 지금까지 또렷하다.

그렇게 가출이 반복되면서 중고등하고 시절을 보내다 보니, 더구나 아무런 꿈이 없었다. 뭐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잘하는 것은 쌈박질밖에 없고. 그렇다면 나는 징역이라도 가서 사회악이 되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어떨 때는 차라리 깡패나 될까, 이 집에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형제를 때리지 않았다. 밖에서 싸움하고 들어와도 다른 부모들처럼 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따뜻하게 타일러 주셨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 신기했지만, 그래도 아빠가 우리를 굉장히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긋나지 않았던 것도 같다. 만일 다른 부모처럼 때리고 포기하거나 “집을 나가버려”라도 했다면, 진짜 나가서 사회 밑바닥 인생으로 빠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항상 포기하지 않고 네가 집 나가면 친구들한테 다 전화해서 막 찾으러 다니고, “태희 어디 있니” 하면서 친구들에게 묻고 다니셨다. 선생님에게도 촌지 같은 것을 주면서 제발 우리 아이 좀 학교 좀 잘 다니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정말 학교 때려치우려고 그랬는데, 그때도 아버지가 제발 졸업만 하게 해달라고 선생님에게 사정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해라,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
네가 사회에 나가서 뭐라도 하려면,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

고 애원하듯 말씀하셨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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