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㊾] 쌍계사5...“중생이 아프면, 하느님도 아프다", 쌍계사 팔상도(八相圖)

윤재훈 기자
  • 입력 2024.03.13 17:28
  • 수정 2024.03.29 15: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깜짝 놀란 소
길길이 뛰더니,
산문으로 들어가
십우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흰 소를 찾아서', 윤재훈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게티이미지뱅크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아버지 현종의 이른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필자는 왕조 국가의 허약성과 민중의 삶을 위한 안전장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의 대통령제에서도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어떻게 요행히 시대가 맞아 그 준비와 인성이 전혀 되지 않은 군주를 뽑아 민주주의를 후퇴하게 만들고 국민을 허탈하게 만드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 어떤 흠결성이 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중류의 인간적인 모습마저 발견할 수 없다면 국민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12살 아이에게 수많은 민초의 생사여탈권을 맡겨, 그가 끌어 나갈 수 있게 하겠는가? 그래서 플라톤도,

우리가 정치에 무감각할 때, 
우리보다 더 못한 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했다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대한민국, 각 부분에 수많은 전문가가 포진해 있는 나라, 평생 자신의 욕망만 쫒아 편협되게 살아온 정치인들의 역량은 한없이 왜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치우친 생각으로 달려가는 폭주열차는 민중들이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잡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주 태봉산 정상에 있는 숙종대왕 아지비 앞면, 1661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공주 태봉산 정상에 있는 숙종대왕 아지비 앞면, 1661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그대가 세상을 떠난 뒤로
불현듯 벌써 봄이 돌아왔네
심원(공주의 정원)의 나무들이 쓸쓸하고
봉각(대궐)의 티끌이 서글프네
꾀꼬리 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밝은 달에 배나 마음이 아프네
후덕해도 보답이 없었으니
추억함에 슬픔이 더욱 새롭네

- ‘봄날에 누이를 그리워하다’, 숙종

조선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 수록한 관찬한 총 104권으로 된 시문집. ‘열성어제’에서 숙종이 누이인 명안 공주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영조의 아버지이며 조선왕조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수난이라는 불운을 깨부순 유일한 왕, 다혈질이고 냉혈했던 숙종. 장장 46년 동안 매우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군주, 왕비를 네 번 들였고, 다른 국왕들과 달리 정치적 사건의 해법으로 자기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왕.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인정한 모양이다.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도 가능했지만 바로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그 어린 나이에 곧바로 친정(親政)을 한 왕. 조선 왕조에서도 매우 특이한 경우였지만 이는 정통성을 떠나 숙종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이나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대적인 환국은 현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숙종 6년인 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갑술환국)이 있었으며, 경종 때의 1721년 (신축환국), 영조 3년 1727년 (정미환국)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피의 정치 보복 정점은 숙종 때에 이르러서이다.

숙종이 환국을 남용하여 다른 당들은 역적이나 소인배들이라고 죽이고, 자기네들끼리만, 충신, 군자라며 흑백 논리와 정치적 보복으로 정국을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환국을 즐겨 사용했던 군주, 처음으로 환국이란 개념을 도입한 군주. 그래서 '숙종 시대' 하면 '장희빈' 외에도 '환국'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숙종 자신도 환국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주와 세도정치로 나아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하동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하동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바람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나 싶더니

솔방울 하나
툭, 하고
소 등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소
길길이 뛰더니,

산문으로 들어가
십우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흰 소를 찾아서’, 윤재훈

그 피의 흔적이라도 씻기 위해서였을까? 숙종 14년인 1688년에 쌍계사 팔상전의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八相殿 靈山會相圖)’가 만들어진다.

조선 후기의 불화로 보물 제925호로 지정되었다. 4천왕·4보살, 6제자, 4분신불(分身佛)과 타방불(他方佛), 4구의 팔부중(八部衆), 이청문중(二聽聞衆) 등이 본존불 좌우에 2열 종대로 배치되어 비교적 단순한 구도를 보여준다.

비단 바탕 채색(采色)에 세로 403㎝, 가로 275㎝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이 불화는, 화면을 압도하는 중앙의 본존불과 비교적 굵직하게 묘사된 협시보살상들 때문에 협시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중앙 상단부에 꽉 차게 묘사된 본존불은 건장하고 풍만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는 원만상(圓滿相)으로, 조선 후기 불화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특징이다. 육계(肉髻)는 뾰족하고 계주(髻珠)는 큼직한 것으로 청주 보살사 괘불(掛佛, 1649년)이나 화엄사 괘불(1653년)의 본존불과 흡사하다.

영산회상도 아래에 있는 시주자들 명단.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영산회상도 아래에 있는 시주자들 명단.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얼굴은 네모상에 가까우며 풍만한 데다 눈, 코, 귀, 입 등이 작고 부드러운 원만상을 이루고 있다.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벗은 상체 역시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풍만함을 자랑하고 있으며, 당당한 체구의 형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본존불의 풍만한 형태는 보살이나 기타 협시상들에게도 그대로 표현되어, 전체 불보살들이 환하고 원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색채도 이러한 형태와 더불어 밝으면서도 부드러운 중간 색조를 사용하였으며, 본존의 옷깃이나 옷 무늬 등이 17세기 중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본존불이나 기타 보살들의 형상에서 오랜 구도와 가난으로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뇌하는 석가모니 부처 모습이나 보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약간 이질감이 든다.

중생이 아프면, 하느님도 아프다는데

어찌 부처와 보살들의 모습은 저리 풍만하고 편안할까?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오시는, ‘도솔래의상’ 모습.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오시는, ‘도솔래의상’ 모습.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산방에 오래된 방석 하나
고승 대덕을 두 분이나 낳았다는데
봄볕 아른거리는 날
나도 그 위에
가만히 앉아보면
민들레 한 송이쯤은
피워낼 수 있을 것 같아

- '산방(山房)의 방석 하나', 윤재훈

팔상도는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것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 법당에 걸 수 있도록 한 불화를 말하는데, 종이 바탕에 채색되어 있다.

쌍계사 ‘팔상전 팔상탱(八相殿 八相幀)’은 조선 후기인 1728년 영조 4년에 일선(一禪), 후경(後鏡), 명정(明淨), 최우(最祐), 원민(元敏), 처영(處英), 신영(信英), 영호(永浩) 등 8명의 불화승(佛畵僧)이 조성하였다.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5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그 여덟 장면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설산수도상,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설산수도상,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兜率來儀相)’이다. 구름 위의 월륜(月輪) 가운데 육아백상(六牙白象)을 탄 보살상과 그를 둘러싼 보살중·천중(天衆)의 도상이 화폭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어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의 구도나 표현된 내용 등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인물들을 작게 묘사하고 구름과 산, 그리고 나무들을 빈 공간에 배치하여 그렇게 번잡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즉 인물들은 비록 작지만 모두 개성 있는 표정, 분명한 형태 등으로 비교적 아름다운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는 부처님이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고뇌의 이 땅에 출생하는 모습이다.

태자가 성문 밖으로 나와 중생들의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다.’ 이윽고 그 사바세상을 견딜 수가 없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뼈를 깎는 고행이 시작된다.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이다. 산과 나무, 강물과 구름이 각 장면을 적당히 구획하였고 그런 배경 아래 작은 인물들이 비교적 제자리를 차지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더구나 밝으면서도 선명한 채색으로 장엄하게 부처의 일생을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이제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당면하여‘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으로 물리치는 과정이다.

드디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득도(得道)하여 성불에 이르렀다.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이다. 그리고 마침내 ”생도 환희, 사도 환희“이다. 부처님이 쌍림수 아래에서 이 지상에서 삶과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이다.”

쌍림열반상.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쌍림열반상.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팔상도의 각 장면은 건물, 구름, 나무, 산을 이용하여 구분을 짓고, 화면마다 아랫부분에 그림의 내용과 내력을 밝혀놓아 이해하기가 쉽다. 8폭으로 되어 있으며, 가로 약 160.7~169㎝, 세로 약 177.5~181㎝ 크기이다. 이 팔상도는 화면이 꽤 큰 편으로, 상당히 복잡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장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수목의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이 팔상탱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과 내용, 장면 구분법, 인물과 건물의 배치와 표현 등 전체적인 구성법에서 보면, 1725년에 조성되어 보물 제1368호로 지정된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에 있는 「송광사 팔상도」]와 거의 같고, 색채만 약간 다를 뿐이어서 이를 모본으로 삼아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709년에 조성되어 보물 제1330호로 지정된 「예천 용문사 팔상탱」과, 1719년에 조성된 운흥사의 팔상도 등과 함께 부처님의 탄생에서 중생들의 생로병사를 겪으면서 지나가는 인생사의 행로와 그 열반까지 고난의 수행과정을, 가열차게 따가가 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 공간감과 색채의 조화 등이 뛰어나고 수목의 표현이 매우 자연스러워 일반회화와의 관련성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도 지대하여, 현존 최고 수준의 팔상도로 평가받고 있다.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