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㊼] 쌍계사3...쌍계사만의 독특한 구조, 금당(金堂) 영역과 대웅전 영역

윤재훈 기자
  • 입력 2024.02.16 11:11
  • 수정 2024.03.2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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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돌아가는 길’, 문정희

쌍계사 육조정상탑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쌍계사 육조정상탑전.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명찰로 손꼽히는 쌍계사는 진감국사에 의해 세워졌으며, 수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나 진감국사가 세운 이 절의 가람 구성은 ‘금당 영역’과 벽암 스님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 영역의 두 공간으로 구분되어,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중 금당 영역은 스님들만의 수행공간으로 동안거와 하안거 후 3개월씩 1년 중 6개월만 개방이 되는데, 음력 1월 16일부터 4월 14일까지와 7월 16일부터 10월 14일까지이다.

신라 성덕왕 때 삼법(三法) 스님이 당나라에 있는 혜능 대사를 만나보고 싶어 유학까지 갔으나, 이미 고인(故人)이 되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 금마국 미륵사의 규창(圭晶)이라는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육조 혜능 대사의 ‘법보단경’ 초본을 보게 되었다.

삼법 스님은 향을 사르고 공경히 앉아 단경을 읽어보니, 마치 혜능 대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구구절절 감명받으며 깨달음이 왔다. 그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수덕사4불상. 촬영=윤재훈 기자

그런데 단경의 한 구절에서 "내가 입적한 후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었다. 그것을 본 스님은 혜능 스님이 이미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내 힘으로 이 일을 도모하여, 우리나라가 만대의 복전이 되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경문에 예언도 있고 하여 엄중하게 지키고 있어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때 개원사에 용기와 힘이 뛰어난 장정만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부탁할 만한 마땅한 연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가지 못하고 그가 무척 슬퍼하고 있었다. 스님은 그에게 1만 금을 부조하였더니 그가 매우 감격해하며 장례를 치르고 다시 돌아왔다. 스님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하니, 그는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는 위험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 정도의 일을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보림사로 향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육조탑에서 정상을 모셔왔다. 그길로 밤에는 길을 재촉하고 낮에는 숨고 하여 항주에서 배를 타고 당진에 도착하여, 운암사로 돌아와 석감(石龕)에 봉안하였다.

금당(金堂), 추사의 글씨. ⓒ게티이미지뱅크

그 뒤 신라 민애왕 때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석감을 보호하기 위해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세웠다. 현재 건물 내 석감 위에 세워져 있는 7층 석탑은 1800년대에 주변에 있던 목암사의 석탑을 용담선사(龍潭禪師)가 옮겨와 세운 것으로, 그때부터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라고 부르고 있다. 후에 이 건물은 금당(金堂)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런 내력으로 불상 대신 탑이 들어와 특이한 법당이 되었다.

이 건물은 1979년에 중수된 것으로 내외부에 화려하게 단청(丹靑)을 베풀었는데, 정면에 걸려 있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조선 시대 다포계 팔작집의 구조 및 평면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동 쌍계사 승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동 쌍계사 승탑.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평하게 다져 만든 2단의 돌 축대 위에 서 있는 보물 제380호인 ‘하동 쌍계사승탑’은, 받침돌과 몸돌, 지붕돌이 모두 단면 8각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8각 원당형(圓堂型) 부도(浮屠)이다.

이 승탑은 쌍계사를 창건한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4~850)의 묘탑(墓塔)인, ‘대공탑(大空塔)’으로 추정된다. 스님을 기리는 탑비는 887년 정강왕 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885년 헌강왕 11년쯤에 조성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전체적으로 특별하게 장식적인 기교는 없고, 각 부재의 비례도 균형이 맞지 않으며, 조각도 형식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8각 원당형의 승탑 양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승탑의 하나로 평가된다.

보물 제500호 하동 쌍계사 대웅전(大雄殿). ⓒ게티이미지뱅크

쌍계사 대웅전은 통일 신라 시대 때 조성한 것을 조선 후기 때 중건했다. 하여 목조 건물 가운데 조선 시대 건축물 양식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나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삼세불상은 조성 당시 지리산 쌍계사의 신앙적 경향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722년 성덕왕 21년에 삼법과 대비 화상에 의해 처음 세워졌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처음에는 옥천사라 하였다. 그 뒤 두 개의 계곡이 만난다고 하여 정강왕[?~887]이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자세한 변동 내역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이를 벽암 선사가 1632년(인조 10)~1637년(인조 15) 사이에 다시 중창하였다. 이후 1695년에 백암 성총 선사가 중수하였고, 1735년(영조 11)에 법훈 선사가, 1850년(철종 1)에 쌍운 경찰 선사와 쌍월 필홍 선사가 또다시 중수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고산 선사가 1981년과 1987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일부 수리를 추진하였다. 1991년에는 기와 보수, 1998년에는 벽화와 더불어 마루와 벽체를 수리하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안쪽을 가린 우물천장으로 꾸며놓았다. 대웅전 안에는 3개소의 불단이 마련되었는데, 세 분을 모신 목조삼세불좌상과 네 분을 모신 사보살입상을 봉안한 주불단, 그리고 영가단과 신중단으로 나뉜다.

여기에 대웅전에는 창건 당시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되는 범종과 1799년정조 23년에 조성된 괘불이 있다.

대웅전 내부 칠존불의 모습. 보물 1378호. 디지털하동문화대전 제공
대웅전 내부 칠존불의 모습. 보물 1378호. 디지털하동문화대전 제공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돌아가는 길’, 문정희

대웅전은 1636년 인조 14년에 중건된 뒤 4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그 모습이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세월 앞에 견디는 것이 없어 기둥과 보 등 주요 부재가 이완되면서 대웅전이 앞면과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지는 구조적 변형이 진행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자 전반적인 해체 보수를 계획했고 쌍계사 측과 협의하여 2004년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2007년 완료되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500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고 보물로만 재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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