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㊺] 쌍계사1...벚꽃내음에 혼절할 것 같은 쌍계사

윤재훈 기자
  • 입력 2024.01.03 11:15
  • 수정 2024.03.2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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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530리를 따라, 
아릿아릿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둑길을 걸었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내 머리 위에서 팡, 팡, 터지며 혼절할 듯
피어오르던 그 벚꽃 내음,
어느 논둑길에 제 무게에 못 이기고 쓰러져 있던
빨간 앵두나무에서 입이 붉도록 따 먹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던 일

혼절할 듯한 벚꽃 터널. 촬영=윤재훈 기자
혼절할 듯한 벚꽃 터널.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봄이면 섬진강을 따라 화계 장터에서 이어지는 10리 벚꽃길이 아름다운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 성덕왕 23년인 724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승려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개산하고, 진감선사가 가람구조를 갖추고 창건하여 역대 선지식들이 주석, 정진하던 대찰(大刹),

젊은 날 섬진강 530리를 따라, 아릿아릿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논둑길을 걸었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내 머리 위에서 팡, 팡, 터지며 혼절할 듯 피어오르던 그 벚꽃 내음
어느 논둑길에 제 무게에 못 이기고 쓰러져 있던 빨간 앵두나무에서
입이 붉도록 따 먹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던 일,
골목길 담장 너머 주인과 눈이 마주쳐 배시시 웃던 일,
어둑한 논에서 써레질을 하며 아직 돌아가지 못하던 농부의 노곤한 삶들.

이 주변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불일폭포(佛日瀑布)까지 가는 주변 일대가 명승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폭포에 소리쳤다.
내 생명에 울려 퍼져라.
지축을 흔드는 명동(鳴動)이여.
용솟음치는 분류의 행진곡이여.
대교향곡인 폭포여.

내 흉중에 가득 차라, 물이여, 바람이여.
부수어라, 거품을 일게 하여 세차게 솟구쳐라, 퍼부어라.
그래도 내 혼은 유유하게 모든 것을 단숨에 들이키고 웃을 것이다.

폭포여 부르짖어라!
나는 더욱 격렬하게 부르짖을 테니까!

폭포여 샘솟아라!
나는 더욱 대담하게 샘솟을 테니까!”
- ‘나이아가라 폭포’, 이케다 다이사쿠

'나이아가라'란 '둘로 나누어진 낮은 지대’라는 의미다. 그 이름 그대로 강 중앙의 고트섬을 경계로 좌우 2개의 폭포로 나뉜다. 지구 속에는 이렇게도 장대한 풍경들이 있다. 숨이 막힐 듯하다. 그러나 보다 장대한 것은 ‘혼(魂)의 우주’다.

쌍계사 대웅전, 보물 500호. 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제공
쌍계사 대웅전, 보물 500호. 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제공

쌍계총림 삼신산(三神山), 쌍계사(雙磎寺), 중국 전설상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있다는 곳.

당나라 유학 중이던 삼법 스님이 중국 선종의 꽃을 피운 무학(無學) 육조(六祖) 혜능 대사의 머리(頂相)를 모시고 이 강산으로 왔다. 그리고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에 칡꽃이 피어있는 곳’이라는 뜻인 곡설리 갈화처(谷雪里 葛花處)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은 후였다.

그러나 귀국 후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그런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니다, 지리산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해 따라갔는데,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영험한 자리, 대웅전) 자리였다고 한다. 그 자리가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직감한 스님은 대사의 머리를 평장(平葬)한 후, 옥천사(玉泉寺)라 이름지었다.

그러다 신라 49대 헌강왕 때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가 있다고 하여, 문 앞에 흐르는 쌍계라는 계곡 이름을 따라 쌍계라는 호를 내렸다. 그리고 최치원이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그 후 두 차례나 큰불이 나고 1632년 인조 10년에 벽암 각성(碧巖 覺性)을 비롯한 여러 승려에 의해 복구,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그 동구(洞口)에 들어서면 은은한 작설차(雀舌茶) 향기가 나는 듯도 한데, 특히나 이 절은 차와 인연이 깊어 인근에 차를 빚는 농가들이 있다.

실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簾)이 828년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 지리산에 심은 인연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배지(茶始培地)가 된 이력도 있다. 그 자리는 인근 계곡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이후 진감선사가 재배 면적을 늘리고 보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진감선사와 초의선사의 다맥을 잇는 법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또한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도입하여 우리에게 맞도록 고쳐서 보급, 발전시킨 해동범패(海東梵唄)의 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팔영루는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창시자'인 진감선사가 우리 민족에게 맞는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처음으로 만든, '불교음악의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 이유로 팔영루는 전례 공간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의 범패 명인들의 길러내는 교육장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여기에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쌍계사는'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라고도 일컬어진다.

불일암. 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제공
불일암. 사진=한국민족대백과사전 제공

또한 신라시대 대승인 원효와 의상이 도를 닦고 1205년 보조국사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라는 암자가 인근에 있다. 불일암을 보니 문득 ‘무소유’로 우리 사회를 맑게 하신 법정 스님이 생각난다. 스님이 17년 동안 낡은 의자에 앉아 주석(駐錫)하신 그 불일암은 이곳이 아니라, 여기에서 멀지 않은 송광사 말사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에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 법정스님 시

보물 제1311호 대웅전. 조계산 선암사
보물 제1311호 대웅전. 조계산 선암사

특히나 송광사에 가면 태고종의 본사이며 또 하나의 명찰인 선암사로 넘어가는 ‘굴목재 둘레길’을 권하고 싶다. 필자는 이 길을 숱하게 걸었다. 그 옛날 젊은 시절 여수에 살 때 좋은 산 친구 어른과 가끔씩 완행 버스에 몸을 싣고 봄볕에 졸면서 간혹 그 산길을 찾았다. 송광사에 내려 산길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에 온 듯하다. 많은 산꾼은 정상인 장군봉으로 올라가고 우리는 쉬엄쉬엄 중간에 있는 굴목재로 향한다.

나는 이 산길만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굴목재 중간쯤에 있는 ‘보리밥집’이다. 오늘 산행의 백미 중의 하나이다. 그 집에 도착하여 막걸리 한 잔 마실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침이 넘어가고,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집들이 생겨 그 옛날의 아련한 정취를 느끼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하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이 길은 선암사와 송광사의 스님들이 선문답을 깨치기 위해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했던 길이다. 편백숲을 지나면 굴목재 넘는 길까지 제법 가파르다.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숨이 턱까지 차오면 쉬고,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걷는다. ‘번뇌’를 떨치기 위해 송곳 끝을 턱 아래에 두고 화두에 들었을 경허 스님을 생각해 본다.

굴목재를 오르는 길. 곳곳에 숯가마 터가 널려 있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활활 타올랐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계산 곳곳에 숯가마 연기가 피워 올랐다 한다. 그 구워진 참나무 숯들은 순천과 보성, 벌교를 거쳐 서울까지 열차을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화전민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남북 간 대결이 극한에 치닫던 1968년 이후란다.

승선교 - 보물 제 400호. 조계산 선암사
승선교 - 보물 제 400호. 조계산 선암사

선암 큰굴목재와 송광 굴목재 사이에서 30여 년 이상 살고 있다는 조계산 보리밥집 최석두 씨는 “김신조 청와대 피습 사건 이후 공비 잡는다고 하는 바람에 화전민이 다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그가 뒤꼍으로 가 거친 손으로 무잎 몇 싹 뚝, 뚝 뜯어와 보리밥과 막걸리를 곁들어 한 끼 내준다.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황후의 밥상이다. 고즈넉한 산속에 좋은 사람과 앉아 산새 소리 계곡 물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시원하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막걸리 한 사발이 꿀맛이다. 지금은 그곳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두고두고 그분과 아름다웠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간간이 되새김질한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 등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 지평을 열어준 소설가, 조정래 작가의 아버지가 선암사의 스님이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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