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⑰] 설국(雪國), 선자(仙子)령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3.08 17:44
  • 수정 2023.03.1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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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 선자(仙子)령

휘청거리던 나의 허리에 많은 구름 형상들은 머물다 가고

그 새 마을의 많은 이들도 내 발밑에서 풀꽃들처럼 피었다 졌다

어떤 이들은 내 아래에서 신(神)을 보았고

어떤 이들은 내 아래에서 첫사랑을 맺었다

나를 기댄 매화꽃도 수없이 피었다 지고

내 밑으로 아이들은 도시로 떠났다

- ‘솟대’ 윤재훈

선자령 설국. 촬영=윤재훈 기자
선자령 설국.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2월 말에 뜬금없이 선자령 눈꽃을 보러 간다고 해서 정말 그럴까 하고, 긴가민가하면서 따라나섰다. 정말로 눈이 잔뜩 쌓여 조금만 산길을 벗어나면 발목 위까지 푹푹, 빠졌다. 정오부터 눈이 20센티 이상 온다고 하더니 간간이 진눈깨비가 오다가다 해서 다행이다.

풍경이 아름다워 선녀(仙)가 자식(子)을 데리고 내려와 놀다가 시들해지면 올라갔다는 곳. 초등학교 국어책에서 배웠던 '나무꾼과 선녀' 생각이 난다. 믿거나 말거나 만들어진 전설인지는 몰라도 선자령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지자체마다 스토리 텔링 만들기에 여념이 없으니 이제는 진짜 있었던 전설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줄기이며 강원도에서 경기도 넘어올 때 거쳐야 하는 큰 관문이다 보니 대관령(大關嶺)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현지인들이 빨리 부르다 보니 대굴령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산이 험해서 대굴대굴 굴러 내려가다 보니 그렇게 불렀을까?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가로지르는 대관령 능선에 있는 선자령은, 고개라기보다 하나의 봉우리이다 보니 쉽게 올라갈 수 있다. 특히 눈과 바람,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이라는 명성이 자자하여 지금 아니면 내년이 돼야 할 것 같아 오기도 했다. 20㎝ 이상 눈이 온다는 예보도 있다.

따뜻한  어묵 국물. 촬영=윤재훈 기자
따뜻한  어묵 국물. 촬영=윤재훈 기자

대관령휴게소에 도착하니 차들로 꽉, 들어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을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입구에서부터 왁자지껄하다. 가게들도 겨울 한 철 대목을 보기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한 듯하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 국물을 비롯해 산을 막 오르는 양쪽으로 조그만 가게들이 빼곡하다.

선자령은 1,157m이지만, 대관령휴게소가 840m이니 317m만 올라가면 된다. 문득 노고 할미가 거(居)하시며, 노고단에서 산장까지 올라가던 평탄한 길이 떠오른다. 등산객은 대부분 가벼운 차림이지만, 심지어 샌들을 신고 오르는 사람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긴 능선을 쉬엄쉬엄 따라가니 초보 산행자도 아무 걱정이 없겠다. 동네 뒷산 가는 길 만큼이나 완만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산행으로 와도 좋겠다. 특히 겨울날 완만한 능선에서 썰매 타기 놀이에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예 배낭 뒤에 썰매를 매고 오르는 사람이 자주 목격된다. 

우리나라에서 선자령처럼 1,000m 이상 되는 높은 지역에서 출발하는 산행지로는 계방산(운두령,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1,577m)과 조령산(이화령, 경북 문경시 문경읍 1,017m), 노인봉(진고개,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1,338m), 함백산(만항재,강원도 태백시 1,572m), 백덕산(문재,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1,350m), 소백산(죽령, 경북 영주시 풍기읍 1,440m), 태백산 유일사 코스(화방재, 강원도 태백시 1,567m) 등이 있다. 이들 산은 1,000m 이상이지만 표고 차가 적어 산행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국사 서낭당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촬영=윤재훈 기자
국사 서낭당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촬영=윤재훈 기자

간간이 진눈깨비가 오다가 말기를 거듭하는데 이 추위 속에서도 참, 많이들 올라온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고 했던가? 인간이 산을 찾는 이유는 고요한 산속에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고요하게 하루쯤 명상이라도 들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산이 너무 시끄럽다.

온 산이 아이젠 발자국 소리로 귀가 따가워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간간이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 옆으로 지나갈 때는 지나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다. 육중한 체구의 장정이 배낭까지 메고 온몸을 실어 찍고 지나가면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정말 시끄럽다. 산짐승에게도 미안할 정도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을 파헤치며 오르락 내리락했는지, 내리막길을 그냥 내려가도 별로 미끄럽지도 않다. 하얀빛으로 대지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눈 세상은 겉보기와 달리 환경오염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산성눈이다, 그래서 정상까지 눈이 보실보실하다

고요한 설산 선자령. 촬영=윤재훈 기자
고요한 설산 선자령. 촬영=윤재훈 기자

특히 이곳은 청년들 사이에 '인천 굴업도와 제주도 비양도'를 합쳐 우리나라 3대 백패킹 성지라고 한다. 그 명성 때문인지 젊은 비박 청춘들이, 쌍쌍이 등짝에 넘치도록 짐을 짊어지고 푹푹 빠지는 선자령을 올라온다. 등에는 눈썰매를 매달고 온다. 간간이 가족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오른다..

대관령은 우리나라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다. 그것은 겨울철에 영서 지방의 대륙 편서풍과 영동지방의 습기 많은 바닷바람이 부딪친 결과라고 한다. 여기에 내린 눈이 세찬 바람에 잘 녹지 않아, 태백산, 계방산, 백덕산과 함께 강원도 지역의 대표적인 겨울 눈 산행의 명소로 꼽힌다.

사부작사부작 바람결에 일렁이는 은빛 물결과 청명한 가을 하늘, 아스라이 보이는 풍력발전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마치 신기루처럼 눈부신 풍광을 보면 산길을 오르노라면, 누구나 시인이 될 듯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남쪽으로는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서북쪽으로 오대산, 북쪽으로 황병산이 바라다보이며, 맑은 날에는 강릉 시내는 물론 동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 능선인 서쪽은 짧게 자란 억새풀로 초원을 이루며, 동쪽 능선은 수목이 울창하다.

선자령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선자령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정상은 완만한 능선이다. 산책하듯 두어 시간을 천천히 걸어왔으니, 내려가는 시간은 더 적게 걸리리라. 건너편 능선에 자그마한 건물들이 보인다. 5~6기의 하얀 풍력발전기가 거의 정지된 듯 서 있는데, 한 기는 부러졌는지 기둥만 솟대처럼 하늘로 솟아있다. 마치 옛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늘에 기구(祈求)를 빌었던 돌탑이나 솟대를 보는 듯하다.

여기 서서 기다려볼거나 
꼰지발로, 꼰지발로
그러다가 자꾸만 목은 길어지고
날개를 펴고 날지도 못한 채,
지나간 풍상만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천 년을 여기 서서 기다려볼거나
이제 물밥도 다 말라 날아가고
눈에 익던 앞산들도 자고 나면 아랫도리부터 사라져 간다
휘청거리던 나의 허리에 많은 구름 형상들은 머물다 가고
그 새 마을의 많은 이들도 내 발밑에서 풀꽃들처럼 피었다 졌다
어떤 이들은 내 아래에서 신(神)을 보았고
어떤 이들은 내 아래에서 첫사랑을 맺었다
나를 기댄 매화꽃도 수없이 피었다 지고
내 밑으로 아이들은 도시로 떠났다
어떤 이들은 나의 다리에 못 자국을 내고
어떤 이들은 나에게 큰절을 하고 갔다
태풍은 나를 안고 혼절하도록 몰아쳐도 든든히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기다렸다

정말 떠날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어쩌랴, 떨리는 生을
내 허리까지 물난리가 나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내려가고
온 밤을 해소로 울다가 은하수(銀河水)로 올라가, 반짝반짝 유영하는 친구들도 보인다
앞산의 수목들은 푸른빛으로 쑥쑥쑥쑥 자라나는데
이제 내 친구들은 부러지고, 그들의 머리는 땅에 뒹군다
그러다 별들이 뜨면,
지상에 얹힌 수만 마리의 오리들은 일제히 날아올라 큰곰, 작은 곰, 황소자리, 처녀자리, 오리온…
수많은 별자리로 오늘 밤 다시 살아온다

- ‘솟대’ 윤재훈

물밥은 제사를 지낸 후 밥과 여러 제사상 음식들을 조금씩 떼어 물에 말아 대문 밖에 내놓은 것으로, 이는 조상님과 함께 찾아온 다른 혼령들에게 주는 제삿밥이라 한다. 

선자령 정상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선자령 정상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발밑에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동해의 사나운 맞바람이 유명하다는 선자령,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바람님 한 점 없다. 나무에는 켜켜이 상고대들이 붙어 하얀 눈꽃들을 달고 있다. 산악회 회장은 이곳에 몇 번을 왔지만, 바람 불지 않는 선자령은 처음 본다고 몇 번이나 되뇐다.

정상의 돌비석 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독(獨)사진 찍을 것을 포기하고 찬바람 속에, 아침에 차 안에서 나누어준 차가워진 김밥을 먹는다. 새벽에 아내가 담아준 보온병에 물은 어느새 식어 미지근하다.

선자령 백미는 정상에 서서 바라보는 파노라마라고 하는데, 오늘은 안개가 끼여 그 즐거움은 반납하고 안갯속의 고요함을 즐겨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은 군데군데 모여서 자리를 펴고 점심들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들도 남은 김밥과 컵라면, 각종 과일, 눌찐하게 저장된 대추, 김치와 잘 삭은 파김치, 알 수 없는 고기까지, 소주와 막걸리 안주로 푸짐하다. 누군가 가져온 곶감을 몇 개 집어 먹는데, 산 정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달콤하고, 귀한 맛이 입안 가득히 전해온다..

아직도 선자령 표식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있다. 옆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와 누가 이 산꼭대기에서 음식 조리라도 하는 걸까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아마도 물만 부으면 바로 조리되는 음식들인 모양이다. 마치 찐빵집의 커다란 양은 솥처럼 연기가 풀풀 올라온다.

선자령 하산. 촬영=윤재훈 기자
선자령 하산. 촬영=윤재훈 기자

옛날 중국에서 1박 2일로 황산을 올라갔던 일이 기억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중국 청년들과 서로 의기가 통해 함께 산에 오르기로 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 며칠 동안 입산 금지가 되었다. 할 수 없이 황산 아래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을 묵으며 통제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3일인가 지나서 풀렸다. 우리는 작은 가게에서 물만 부으면 바로 뜨거워지는 인스턴트 음식과 싸구려 지팡이 등을 샀다.

그리고 거대한 황산을 오르는데, 입구에서 어느 지점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낯설게 했던 것은, 웬일인지 외국인에게 200원인가 했던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36,000원 정도 거금이었다. 지저분한 화장실에서조차 꼭 돈을 받던 중국에서 무슨 일일까, 참으로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배낭여행자에게는 너무 요긴했던 그 금액이,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선자령 설국. 촬영=윤재훈 기자
선자령 설국. 촬영=윤재훈 기자

하산을 시작하자 안개가 더욱 잔뜩 끼기 시작했다. 거의 2, 30m 앞의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산길은 건너편 대관령 양떼목장 방향으로 크게 돌아 내려가거나 우리가 올라왔던 국사 서낭당 쪽으로 빠르게 내려오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나이 든 일행들이 있어 오던 길로 방향을 잡았다. 아침부터 뱃속이 안 좋아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눈이 잔뜩 쌓여, 어디 갈 때가 마땅치 않다. 거기다 오고 가는 사람들까지 많아 참으로 난처하다. 국사 서낭당부터는 시멘트로 된 임도가 있어 좀 더 수월하게 하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적이 없는 시멘트 길은 무척 미끄럽다.

국사 서낭당은 강릉 단오제와 관련된 사당으로, 강릉 단오제(국가 무형 문화재 제13호)가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다. 매년 음력 4월 15일 이곳 산신각에서 먼저 산신제를 올린 다음, 국사 성황제에서 지내고 강릉으로 행차하면서 행사가 시작된다.

선자령 나무 터널. 촬영=윤재훈 기자
선자령 나무 터널. 촬영=윤재훈 기자

내려오는 길도 편안하다. 중간쯤이나 내려왔을까, 나무 터널이 나타난다. 금방 키가 닿아 눈이 쓸려 내려올 듯 낮다. 길은 올라갈 때보다 많이 한가해졌다. 눈도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조그만 길을 벗어나면 눈이 발목까지 푹푹 올라온다. 어디선가 하마 복수초가 노란 꽃대를 꼼지락거리며, 눈 속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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