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입니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던 내게 또렷하게 들려온 의사의 목소리는 의례적인 것이었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감기 몸살이 아니에요?코로나 양성이니까 처방전 받아서 약국에 가시면 됩니다.코로나라구요?한 사흘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집에 있던 종합감기약을 먹었지만 차도가 없어서 병원을 찾은 것이었는데 의사는 대뜸 진단키트를 들이밀었다. 면봉이 콧속을 쑤시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말로만 듣던 코로나 검사였지만 양성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나라에서 지정한 고령자 축에 속했기 때문에 3차까지 백신을 접종했고, 집밖을
심 권사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한다. 기도 제목이 많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일본에 사는 딸네 가족의 평안이다. 평생을 해 온 가족구원의 기도가 뒤로 밀린 것은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하고, 일본의 코로나 확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된 다음부터다. 심 권사는 속이 타서 더욱 기도에 매달렸다. 여기저기서 살기가 어렵다고, 코로나 때문에 굶어죽을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하물며 타국 생활인들 오죽할까. 심 권사는 자신보다도 일본에 살고 있는 딸네가 더 걱정이다. 이러한 세상을 살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몇몇 출중한
얼굴을 스치는 실바람이 보드랍다. 나는 강 따라 난 산책길을 걷다 말고 징검다리로 들어선다. 어제 이맘 때 어스름이 밀려올 무렵이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강바닥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잡다가 여자가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는 강물에 몸을 담근 채 남자를 바라보며 일어날 생각도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게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나는 얼른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만의 웃음인가. TV의 개그 프로를 보면서도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온통 젖은 몸을
올해는 봄 가뭄 소리가 쏙 들어갔다. 해마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가 바닥을 보여 모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더니 올봄은 때맞춰 비가 충분히 내린다. 비를 맞은 앞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게 솟아나고 베란다의 화초도 저마다 꽃을 피우느라 바쁘다. 햇살 맑은 아침에 베란다에 나와 앉아 있으면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감미롭다.CBS FM 음악방송은 아침 9시부터 클래식 타임이다. 클래식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라디오 채널이 맞는 방송이 오직 그뿐이어서 듣기 시작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그 시간에는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액티브 시니어’들의 삶의 희노애락을 담은 팟캐스트가 새로이 런칭했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 오픈한 ‘이모작 에세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이모작 에세이’는 “이 세상 모든 인생이 작품이 되는 에세이”의 줄임말로 내레이션, 드라마, 콩트, 뉴스 등의 형식으로 제작됐다.시니어가 주 청취대상이며, 이모작뉴스에 게재되고 있는 에세이들이 주요 콘텐츠다.주요 시리즈를 살펴보면, 에세이 시리즈는 ▲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김경의
한글날이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마저 점점이 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 있을까.이사하고 나서 국군의 날이 다가왔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태극기를 찾느라고 부산을 떨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자기, 광화문 갔다 왔어? 남편은 내게 눈총을 주며 내가 태극기 집회에 다녀와서 태극기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광화문이야 당신이 갔으면 갔지. 나는 코로나 블루인 거 몰라? 당신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니까, 그 목사 집회에 다녀왔나 해서. 집콕 하느라고 우리교회도 못 가는데, 코로나 무서워서
[이모작뉴스 김경 기자] ‘에세이 21’에서 원고 청탁서가 왔다. ‘추억의 사진 한 장’ 난에 게재한다며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추억담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잠깐 시간을 되돌려보다가 일단 컴퓨터를 켜고 사진첩에 들어가 본다. 의외로 이런저런 사진들이 많이 내장되어 있다. 한동안 사진마다 깃든 추억을 복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한순간, 나는 별빛처럼 빛나는 섬광과 마주하며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을 붙박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
새벽부터 끄무레하던 하늘이 그예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요즘의 일기예보는 정확하다. 하늘도 내 원통함을 아는 탓이려니 하자. 비닐에 덮여서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온 이삿짐이 곧바로 탑차로 들어가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석 달 전에 잡은 이삿날이니 날씨까지 염두에 둘 처지가 아니었다. 집을 팔고 나니 갈 곳이 막막했다. 역세권이 좋겠지. 전철을 이용할 수 있고 생활 인프라가 대충 갖추어 있는데다 앞이 트인 아파트를 이사 날짜까지 맞추어 찾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을 팔고 열흘도 채 되지 않아서 집값이 무섭게
하필이면 파운드케이크를 사올 게 뭐람. 뭘 이런 걸 다 사오느냐고 하며 어색하게 쇼핑백을 받아들었을 때 눈치를 챘다. 분명 파운드케이크일 것이라고.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손쉽고 모양 나는 선물이 파운드케이크라는 게 평소의 생각이었으니까. 매수인이 인테리어 업자와 같이 방문해도 되느냐는 문자를 했을 때 언제든지 전화하고 들르라고 흔쾌히 답은 했다. 그렇지만 지난 십년간 쓸고 닦아가며 애지중지했던 멀쩡한 아파트를 송두리째 갈아엎겠다는 소리에 마음이 허전해서 하루 종일 집안을 서성거리던 참이었다. 요즘 내 기분은 바닥으로 내려가서 도무지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벌써 일이 끝났수?”“일이랄 것두 없어요. 동네 한 바퀴 쓱 훑으면서 담배꽁초나 버려진 음료수병 따위를 치우는 데, 운동 삼아 하는 거지 뭐.”앞 동에 사는 동갑네다.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쓰레기를 줍는 ‘환경지킴이’ 활동으로 한 달에 27만원을 챙기는 똘똘한 노인이다. 정부에서 수십만 개의 노인 일자리를 만들어서 노인들에게 수입을 올리게 하는데도 나는 아직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일을 한다는 건 사회생활을 한
살구,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아파트 단지를 빙 두른 산책길에 잘 익은 살구가 제법 떨어져 있다. 좀 멀쩡하다 싶어서 집어 들면 갈라져 있거나 물렀거나 벌레가 먹었다. 높이 솟은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면 누렇게 익은 살구가 가지가 휘도록 다닥다닥 달려 있다. 나뭇가지를 잡고 흔들어보지만 먹음직스러운 살구는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나무 밑동을 발로 힘껏 차세요.”“아녀유. 그러다 발목 나가유.”나이가 70은 넘어 보이는데도 남자는 남자다. 남자가 나무 밑동을 발길로 냅다 걷어차자 잘
엄마, 나 왔어.신여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큰소리로 외쳤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단단히 심사가 틀어진 게 분명했다. 볼륨을 잔뜩 올려놓은 TV에서는 노란색 점퍼를 입은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이 차분한 어조로 지침을 읽고 있었다.이 불안한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뀐 지 하루 만에 확진자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으니 여전히 마스크 쓰고, 손 잘 씻고, 사람 많은 데 가지 말라는 당부일 게 뻔했다.점심은 드셨어? 뭘 시킬까? 드시고 싶은 거
또 보고 있네? 벌써 몇 번째야? 주말 드라마도 안 보면서 그게 그렇게 재밌나? 물 마시려고 나왔던 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제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이상하다. 왜 자꾸 보게 되는 걸까. 자꾸 보는 나도 그렇지만 채널을 바꿔가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방영을 하는 걸 보면 나 같은 시청자가 꽤 많다는 계산이 나온다.‘응답하라 1988’. 제목 탓에 자꾸 응답하듯이 TV 앞에 앉는지도 모르지만 ‘응답하라 1997’이나 ‘응답하라 1994’에는 내 속의 무언가가
“눈 부셔요? 그만 들어갈래요?”“아녀, 기냥 조금 더 있자.”꽃샘바람이 사나웠지만 햇살은 화사 했다.“좀 앉을래요?”“아녀, 서 있을 만혀.”삼촌은 중심을 잡지 못해서 거반 내게 기대어 서있으면서도 앉으려 들지를 않았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삼촌을 부축했다. 예전 같으면 삼촌의 등 뒤에서 와락 껴안고도 부족해서 삼촌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을 터였다. 어쩌다가 삼촌과 이리도 서먹해졌는지 모르겠다.“그만 들어가요. 나는 추
엄마! 내 가슴까지 찢을 듯이 애절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는 찬송가를 부르다가 멈칫했다. 우리 일행은 좁다란 복도에 옹색하게 서서 영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80세를 넘긴 고인에 대한 애도는 형식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고인과는 영정사진이 첫 대면이었다.단출한 유가족의 뒤를 따라서 장의차에 오를 때만 해도 그리 울적한 마음이 아니었다. 내 장례식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의 몇 장을 꼭 불러달라는 둥 해가면서 여유까지 부렸던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니 하루 온종일, 엄마를 부르던 애끓는 목소리가 내
가을 아침엔 청맹과니도 시인이 되겠다.FM의 아나운서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시 한 구절을 낭송하며 이토록 청명한 가을 아침에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잠시 멍해진다. 그 애는 출소했을까.작년 이맘때쯤이었다. 교회에서 전도사가 내게 두툼한 편지를 내밀었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보낸 이의 주소는 경기도 안양의 사서함이었다. 사서함, 아들이 군대 갔을 때도 사서함으로 편지를 썼다. 누구지? 편지 봉투에는 분명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지 봉투가 너무 두툼해서 선뜻 열어볼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와서야
캐톡, 천복순여사는 손을 뻗어 머리맡의 휴대폰을 열어본다. 역시‘반딸’이다. 화면 가득히 분홍빛 배롱나무 꽃이 마중을 나온다. 화사하다.어르신, 우리 아파트 앞에 배롱나무 꽃이 피었어요. 참 예쁘지요? 이 무더위에 식사는 잘 하세요? 입맛 없으셔도 꼭 식사하시고 물도 많이 드셔야 해요. 고마운 사람이다. 지금 오는 요양보호사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어찌나 늙은이 마음을 잘 살피는지 요양보호센터장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답답하지? 언제나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직 서너 달은 지나야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