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hen new] 서울스토리② 도성 밖 신도시, 돈암동

김남기 기자
  • 입력 2023.07.1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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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지역주민과 함께 조사 기록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돈암동’은 1930년대 늘어나는 경성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대단지 주택지로 개발로 대규모 도시 한옥이 건설되고, 1950년대부터 박완서와 문화예술인들이 거주했다.

돈암 일대는 1930년대 이후 새로운 삶을 꿈꾸는 중산층의 거주지로 부상했다. 해방 이후 정치‧사회 및 문화예술인이 몰려들었다. 이곳이 아직도 서울의 대표적인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21년 돈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결과를 담은 ‘도성 밖 신도시, 돈암’ 보고서를 발간했고, 이를 바탕으로 돈암동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다.

1980년대 돈암동 606번지 일대 한옥과 주택이 공존하고 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80년대 돈암동 606번지 일대 한옥과 주택이 공존하고 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역주민과 지역의 연구기관이 함께 ‘나의 동네’를 기록하다.

지역주민으로 결성된 지역활동가 5명은 돈암동, 보문동, 동선동, 삼선동, 안암동 등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사람으로서 돈암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주민들이 기억하는 ‘우리 동네’ 지도 그리기를 했다.

돈암 일대 주민들이 기억하는 우리 동네는 어떤 모습일까? 토박이들이 기억하는 오래전 모습을 그린 지도 ‘30년 전 우리 동네’는 지금은 고층아파트로 바뀐 돈암시장에 점포들이 즐비하고, 기와지붕의 한옥들이 여기저기 넓게 분포한 모습이다.

1976년 보문동 한옥주택.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76년 보문동 한옥주택.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90년대부터 돈암 일대는 도시 한옥이 대규모로 공급된 한옥 주거지였으나 현재는 다세대․다가구 건물과 아파트로 변모했다. 마을지도도 ‘우리가 먹은 시간’은 동네 주민들의 맛집인 태조감자국, 오백집 등이 꼼꼼히 그려져 있다.

주민이 그린 ‘우리가 먹은 시간’ 마을지도. 그림=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주민이 그린 ‘우리가 먹은 시간’ 마을지도. 그림=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에게 ‘돈암’은 어떤 곳일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교육프로그램과 연계하여 돈암 외 지역의 학생들이 생각하는 돈암을 지도로 그려보았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학생 12명이 참여했다.

‘다 같이 돌자, 동선동 한바퀴’ (인왕중학교 3학년 김예진), ‘역사restaurant’ (정신여자중학교 3학년 김하은) 등의 지도가 제작됐다. 돈암 일대에 대한 교육과 개별 현장 답사를 통해 학생들은 돈암의 가장 특징적인 장소로 흥천사와 성신여자대학교를 꼽았으며, 그 외 돈암제일시장, 미아리고개 노래비, 한중 평화의 소녀상도 인상 깊은 대상으로 인식했다.

봄의 성북천 전경.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봄의 성북천 전경.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조용한 농촌 평야에서 ‘도성 밖 신도시(돈암)’의 탄생

돈암은 성북동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성북천(안암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양옆으로 낙타산과 개운산이 자리하는 등 낮은 돌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삼선평이라고 불리는 농촌 마을이었고, 산자락에는 풍경이 좋은 농막과 주거지가 있었다. 조선 후기 이덕무는 이 일대를 흰모래밭과 복숭아밭, 시냇가가 있는 평화로운 곳으로 시에서 그리고 있다.

“혜화문 밖에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푸른 숲이 흰 모래밭에 연하였네 
북둔의 복사꽃 천하에서 가장 붉고 푸른 시냇가엔 울타리 짧은 집들
금성천부라 참으로 아름답고 태평성대라 또한 즐거웁구나”
- 이덕무, 「성시전도 칠언고시백운(城市全啚七言古詩百韻)」

돈암 일대 한옥마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돈암 일대 한옥마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넓은 빈 땅에 빽빽이 들어선 도시 한옥

근대기에는 넓은 땅 삼선평에서 야구와 축구 등 체육경기가 펼쳐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늘어나는 경성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주거지로 돈암 일대가 선정되어 도성 밖에 최초의 신도시가 건설됐다.

1936년 근대 도시계획기법이 적용된 경성시가지 계획의 일환으로 돈암 지구가 조성됐다. 돈암‧삼선‧보문‧동선‧동소문동 등에 도시 한옥이 대량 공급됐고, 도심과 연결된 전차의 종착지도 미아리고개 바로 앞이었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안암정은 모조리 집장사들이 새 재목을 드려다 우직근 뚝딱 지어 놓은 것으로 이르고 본다면 그야말로 전통이 없는 개척촌과 같이만 보일 수밖에 없다. (중략) 사방에서 몰려와서 일제히 너는 사십 호, 나는 이십 호로 아파트 방 차지하듯 일제히 이사 온 집…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젊은 아버지들은 혹 전차 안에서라도 만나면 정답게 인사를 하면서...”
- 팔보(八甫), ‘서울 잡기장’

박완서 등 문화예술인들 삶의 터전

새로운 주거지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으며, 소설가 박완서도 그중 한 명이다. 그의 소설 ‘그 남자네 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는 돈암 일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950년대를 전후로 돈암 일대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최초의 예술대학인 서라벌예술대학도 이곳에 자리 잡아 많은 문화예술인이 모여들었다. 지금도 이곳은 서울의 자치구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문화예술인이 사는 동네로 문화예술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곳이다.

1950년대 박공무소 경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50년대 박공무소 경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나의 옛집은 바로 신선탕 뒷골목에 있었고,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에 있었다. 천주교당도 신선탕도 천변(안감내)길에 있었다. 교회는 증축했는지 개축했는지 그 자리에 있으되 외양은 많이 바뀌고 커져 있었지만, 목욕탕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고 이름까지 그대로였다.”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돈암 사람들 : 1936년 생 박영민부터 거주 5년차 김인규까지

돈암이 신도시로 건설될 무렵부터 이곳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박영민부터 이곳이 좋아 정착한 새로운 거주자 김인규까지 많은 사람이 구술에 참여했다. 박영민의 아버지는 돈암 건설에 한 축을 담당한 건설업자였으며, 김춘선은 약 70년 동안 미아리고개에서 거주한 토박이이다.

신동엽의 장례식 때 집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신동엽의 장례식 때 집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돈암에서 신동엽 시인은 ‘금강’ 등의 대작을 집필하였고, 무용가 조흥동은 한국 무용의 꿈을 키웠다. 돈암시장에서 탄생한 감자국의 원조 ‘태조감자국’은 아직도 돈암 사람들이 찾는 맛집이며, 서울미래유산 1호인 나폴레옹과자점은 돈암 입구를 밝히고 있다.

2005년 태조감자국 매장.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2005년 태조감자국 매장.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성북경찰서에 오래 근무한 박윤락은 폭력조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흥천사 입구 연회장에서 근무한 한 씨는 환갑잔치의 최고로 치던 이곳의 연회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성신여대를 졸업한 모초롱은 아직도 이곳에 울리는 돈암 성당의 종소리를 최고로 여기며, 돈암에 신혼살림을 차린 연극인 김인규에게 돈암은 애정의 장소다.

현재 나폴레옹과자점 성북 본점.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현재 나폴레옹과자점 성북 본점.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 지역 명소는 생각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여기가 오히려 명소가 아니라서 살기가 좋아요. 돈암성당의 종소리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모초롱

“돈암동 지역의 매력은, 매력을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 같아요.”
-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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