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hen new] 서울스토리③ 후암동, 조선시대 한적한 농촌마을에서 일제강점기 신시가지로

김남기 기자
  • 입력 2023.08.03 15:54
  • 수정 2023.08.0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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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이 발행한 ‘두텁바위가 품은 역사, 문화주택에 담긴 삶 후암동’의 내용을 발췌정리한다.

1910~1920년대 후암동 일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10~1920년대 후암동 일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후암동은 남산의 남서측 산록에 위치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밖의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신시가지로 개발되어 대규모 고급 문화주택지가 조성된 지역이다. 당시에 지은 문화주택이 아직도 302채가 남아 있어 후암동은 현존하는 적산가옥의 최대 집결지이다. 후암동의 문화주택은 건축적 가치와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다세대 주택 등으로 계속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있어 거주에 대한 지원대책 등 보존 방안도 필요한 시점이다.

후암동 유래

한편, 후암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 지역에 글자 그대로 두터운 바위가 존재했고, 그래서 후암동 또는 두텁바위마을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두텁바위는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현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또 다른 유래는 두꺼비바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인데, 이 두꺼비바위 설은 안정복의 제자였던 황덕길의 문집'에서 유래하였다. 안정복의 제자였던 황덕길(1750-1827)이 도저동(현 후암동)에 거처하였다. 황덕길의 문집에 후암동의 지명이 두꺼비 바위라는 의미의 섬암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두꺼비바위라는 지명의 음운에 변화가 생겨 두텁바위로 불리고, 두텁바위가 곧 후암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1923년 도로개수 후 삼판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23년 도로개수 후 삼판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남산 그리고 후암동

내사산 안쪽의 도성에 비해 내사산 밖에 위치한 성저십리는 전체적으로 남산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북악산 역시 도성의 북쪽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지만, 높고 경사가 급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어 시가지나 주거지로서 적합한 지형은 아니었다.

남산은 동쪽으로는 중랑천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만초천에 이르는 넓은 영역까지 지세가 뻗어 있을 뿐 아니라, 근대 이후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는 성저십리의 가장 넓은 지역을 형성하고 있어, 도성 안에 비해 도성 밖에서 남산이 갖는 중요성과 영향력은 매우 크다.

도성 밖에 위치한 남산의 남서측 사면에 위치한 후암동 일대는 개항 이후 도성 밖에서 주거지로 가장 빠르게 변모한 지역이다. 후암동 일대는 동고 지형이 형성되어 있고, 전체적으로는 한강 쪽으로 완만하게 지세가 흐르고 있어 급경사를 지닌 북악산의 도성 밖 지세와 비교된다.

후암동 문화주택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후암동 문화주택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후암동 신시가지로 변모

남산의 남서쪽에 위치한 용산구 후암동은 조선시대에 태(太) 씨와 고(高) 씨가 집성을 이루는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1900년 경인철도 개통과 1908년 일본군 병영의 조성으로 인해 빠르게 신시가지로 변화했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그 명칭마저 삼판통(三坂通, 미사카도오리)으로 바뀌었다. [사진 1, 2]

용산구 후암동의 일인 주거지는 일제가 식민지배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경영자들을 위한 사택과 관사 등 집합적 주거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때 후암로가 1908년에 완성되었고, 후암로 양옆으로 일본식 주택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렇게 형성된 주택들은 대개 ‘문화주택’으로 불렸는데, 서양식 공간구조와 외관에 일본식 내부구조를 가진 주택으로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문화주택에 정치인·관료·금융인 등 일인 유력자들이 많이 살면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후암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일인들의 고급 주거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진 3, 4]

후암동 거주 일본인 회고록...일제강점기 삼판통(후암동)

“삼판통(미사가)은 좋은 곳이다. 남쪽에, 조선은행사택이 생긴 이후로 미사카에 사는 자가 한꺼번에 늘었다. 이미 이래저래 10년은 될 것이다. 경성에서 가장 먼저 열린 것은 미사카이다. 실제 이곳은 살기 좋은 곳. 이웃 요시노쵸 미요시와의 문화장옥이 섰다. 그리고 오카자키쵸로 빠지는 길이 생겨서 츠루가오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편리해졌다. 나아가 조선신궁의 경승을 등지고 서기에 이르러, 미사카는 절호의 주택이라 찬양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행사택을 중심으로 한 미사카는 사방팔방에 날개를 펼치고 있다. 북측에 요시노쵸 사이에 삼림부의 사택이 있다. 학교직원 사택도 생겼다.

넓이 20만 평이라 불리는 미사카 일대는 이렇게 조선은행사택을 중심으로 하루하루 불어나고 있다. 미사카는 경성 제일의 큰 주택지일 것이다.

- 婦人住宅談 - 私の考ひます事ども(한 여성의 주택 이야기-나의 오래된 일들), 朝鮮と建築 9집1호, 1930.

해방 후 후암동.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해방 후 후암동.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해방이후 후암동

해방이후 후암동의 남산측 경계부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해방촌으로 불리는 대규모 도시 슬럼이 형성되었다. 해방촌이 자리 잡은 곳은 해방 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던 호국 신사가 위치했던 곳이다. 해방촌의 중앙에 질서정연한 집들이 나란히 위치한 것 은 시에서 호국신사 터에 도시 빈민을 위해 간이주택을 지어 공급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동부이촌동이 개발되고, 강남개발이 무르익으면서 후암동 일대의 거주자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주택이었던 탓에 해방 후에도 후암동은 가회동이나 장충동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부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동부이촌동 이 아파트 중심의 새로운 부유층 주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후암동 주민의 이탈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들어 이러한 움직임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후암동은 고급주거지로서의 이미지가 점차 탈색되어 갔다.

동시에 후암로 57길 주변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쪽방촌이 형성되었다. 현 힐튼호텔 주변은 양동이라 불리는 윤락가가 형성되었던 곳이기에, 양동의 영향권에 있었던 양동 남측의 후암동 일대 역시 후암동 일원에서 거주환경이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1980년대 이후 양동지역이 재개발되면서 후암동 북측 주변 지역이 이 일대에서 가장 노후화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노후한 건물의 내부를 잘게 나누어 쪽방촌이 들어서면서 지역의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비 사업이 완료된 후 동자동과 후암동 일대의 스카이라인은 주변의 도시적 맥락과는 전혀 이질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동자동 일대가 정비사업지구로 지정된 것은 동자동이 유동인구가 많고 개발압력이 높은 서울역과 남대문 상권인 탓도 있지만, 6.25전쟁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임에도 전재복구가 부실하게 이루어지면서 도심의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노후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후암동 문화주택.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현존하는 후암동 문화주택.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후암동 토박이 ‘원경’ 이야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고관들이 살던 곳이다. 말하자면 일본 동네이다. 특히 우리 집이 있는 이 골목 말고 다음 골목은 조선은행 관사 자리라서 좋은 일본집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 좋은 집들을 다 허물고 빌라가 들어왔지만, 옛날에는 진짜 좋았다.

후암동을 찾아오는 일본인은 일제강점기 때 삼광초등학교에 다녔던 사람들로 아직도 동네에 가끔 온다. 그때 생각이 나는지 종종 온다.

우리 집 같은 경우 도 3년 전쯤에 일본인이 왔다 갔다. 연세 가한 80세쯤 되던 것 같다. 그분들 말로는 골목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건물이 많이 바뀌었어도 찾기가 어렵지 않단다. 우리집에 왔던 그분은 서울대학교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왔다는데 집이 보고 싶다고 들어와 보기도 하고 이건 그대로다 이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일본집은 아주 단단하다. 목재가 안 상하고 그대로 있다.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이 상태 그대로 유지한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 식탁이 있는 방도 다다미, 2층도 다다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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