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hen new] 서울스토리④ 한양의 7길을 걷다...시전길‧순라길‧효행길 등

김남기 기자
  • 입력 2023.08.18 16:25
  • 수정 2023.08.1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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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 중국의 철학자 루쉰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길이란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있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며, '배움의 길', '순례자의 길'처럼 개인의 삶이나 사회·역사적인 전개, 도리나 의무를 일컫는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거닐었던 7개의 길을 소개한다.

서울역사답사기 제7권 한양의 길을 걷다.
서울역사답사기 제7권 한양의 길을 걷다.

도성의 아침을 활기차게 채웠던 상인들의 시장길, 밤의 안전을 책임졌던 순라꾼들이 다녔던 순라길도 있다. 또 지방에서 상경해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비의 출근길, 도성문을 나가 4,000km의 여정을 떠난 조선통신사들의 자취도 안내한다. 백성을 헤아리기 위해 궁문을 나섰던 국왕들의 거둥길도 소개한다. 백성을 살피며 능행길에 나섰던 숙종과 정조, 준천이라는 국가 과업을 수행한 영조의 거둥길을 주목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발간한 ‘서울역사답사기’ 제7권 “한양의 길을 걷다”에서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건설하며 종묘ㆍ사직ㆍ조정ㆍ시전과 도로를 구상했다. 도성 건설의 원리를 담고 있는 ‘주례’ 고공기에는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두며, 조정을 앞에 두고 뒤에는 시장을 둔다.’(左廟右社 前朝後市)고 나와 있다.

한양은 이를 참고해 건설되었는데, 백악ㆍ낙산ㆍ인왕산ㆍ목멱산(남산) 등 4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조정의 남쪽에 시장이 형성됐다. 도로 역시 ‘남북 및 동서 9개의 길을 둔다’는 원칙과 달리 한양의 길은 자연스러운 ‘정(丁)’자 형태를 이루며 발달했다. 황토현에서 경복궁 앞까지 연결되는 오늘날 세종로나 숭례문에서 대광통교에 이르는 남대문로, 돈화문로 등은 조선시대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길이다.

한양의 시전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첫 번째 길은 시전길이다

사람들의 일상을 알기 위해 시장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한양의 시장길을 걷고 싶다면, 오늘날 광화문역 3ㆍ4번 출구로 도롯가에 작게 남은 ‘혜정교 터’ 표석을 찾으면 된다. 혜정교는 시전을 알리는 시작점으로, 흥인지문(동대문)에 이르기까지는 물건을 팔기 위한 가게인 시전행랑이 가득했다. 이 길은 구름처럼 사람이 모였다 흩어진다고 하여 ‘운종가(雲從街)’로 불렸던 길이다. 원래 조선에서 상업은 나라에서 허가받은 시전만 가능했지만, 조선후기 인구와 물자가 모여들어 상업이 발달하게 되며, 동대문의 이현시장, 남대문의 칠패시장처럼 대표적인 난전도 생겨났다. 종로로 익숙한 이 길 위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으며 왁자지껄했던 시장을 상상해 본다면, 그리 심심하지 않은 답사가 될 것이다.

.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두 번째 길은 순라길이다

계절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통금시간이 있었다. 밤 10시경 인경부터 새벽 4시경 파루까지는 엄격히 통행이 금지되었다. 한양에는 범야자(통금을 어기는 사람들)를 단속하고, 도둑이나 화재 예방을 위해 ‘순라꾼’들이 순라를 돌았다.

 

영조의 ‘위민준천(民濬川)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영조의 ‘위민준천(民濬川)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세 번째 길은 ‘위민준천(民濬川)길’, 청계천 길이다.

오늘날 청계천은 조선시대 기록에 대개 개천(開川)으로 나온다. 한양도성의 중앙을 흐르던 개천은 중요한 배수로이자, 하수시설이 없던 조선시대 오물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개천은 비가 많이 올 때는 범람하여 주변 인가에 피해를 주기도 했다.

청계천을 답사하는 시민들. 사진=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청계천을 답사하는 시민들. 사진=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영조의 준천은 하천 주변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제방 보수, 배수를 위한 수문 정비 등에 목적을 둔 것이다. 또한 준천 사업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데, 당시 한양에 모여들었던 고군(임금노동자)들의 고용 문제를 완화하는 측면도 있었다. 청계천은 이제는 일상에서 익숙한 시민들의 휴게공간이다. 곧 돌아올 가을에 청계천에 담긴 역사와 영조의 이야기를 더해 걷는다면 어떨까?

숙종의 거둥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숙종의 거둥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네 번째 길은 숙종의 거둥길이다.

1691년 음력 2월 26일 숙종은 정릉 참배를 떠났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능으로, 능이 조성될 당시 도성 내 취현방에 있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정릉 지위에 변화가 생겨 도성 밖 사을한에 정릉이 옮겨졌다가, 세종 즉위 이후에는 나라 제사에서 정릉이 빠짐으로써 잊힌 능이었다.

조선후기 사림정치가 본격화되며 정비(正妃)임에도 종묘에 모셔지지 못한 정릉의 복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숙종의 정릉 참배는 조선후기 왕들 가운데 최초의 사례이다. 음력 2월 26일의 늦은 아침인 오전 8:30~9:30쯤 궁을 나섰다. 숙종은 궁을 떠나 보제원-고암(오늘날 안암동)-사하리(오늘날 미아리)-수유리 방향을 지나 정릉에 도착하였으며, 사하리에 주정소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했다.

정릉 참배 후 사하리 교장을 마련하여 군사훈련을 하고, 환궁길에는 동관왕묘를 거치며 백성들의 상언도 듣는다. 숙종의 정릉 참배와 동관왕묘에 얽힌 여러 상징과 의미를 찾아본다면 한층 더 재미있는 답사가 될 것이다.

선비 황윤석의 출근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선비 황윤석의 출근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다섯 번째 길은 선비 황윤석의 출근길이다.

전라도 흥덕 출신으로 상경하여 관직생활을 한 선비 황윤석이 주인공이다. 1729년생 황윤석은 그의 일기 ‘이재난고’에 서울살이의 기록을 자세히 남겼다. 과거 준비하며 반촌에 살던 시절부터 38살 장사랑 참봉으로 천거된 이후 의영고 봉사, 종부시 직장, 사포서 별제, 사복시 주부, 동부 도사 등을 거쳤던 내용을 기록했다.

17세기 후반 원래 한양에 살던 사람들에 더해, 경강 상인, 5군영에 속한 군인들까지 한양에 집 한 칸 얻기가 어려웠다. 집을 구하려면 소개를 위한 인맥이 필요했으며, 음식값, 세탁비용 등등의 생활비까지 내고 나면 여유 있는 생활이 어려웠다.

또한 까다로운 반주인(집주인)을 만나기도 해서 집을 여러 차례 옮기기도 했다. 상경해 관직생활을 했던 황윤석도 마찬가지였다. 황윤석은 지방 수령으로 갈 수 있는 6품관이 되길 고대했다. ‘이재난고’에는 동부 도사에 임명되던 당시 심정과 출근길에 대한 내용도 있어 흥미롭다. 동부 도사는 한성의 5부 가운데 동부를 다스리던 자리였다. 그가 바라던 동부 도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전에 모시던 하인들과 지인들이 반촌에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동부에 첫 출근하던 날 황윤석은 창덕궁 돈화문으로 궐에 들어가 상서원 대청에서 사은숙배(과거합격 또는 관직 임명시 임금에게 절하는 것)했다. 사은숙배를 마치고 궐 밖에 나와 종묘 앞 피맛길 이현병문(李峴屛門)을 넘어, 동대문 방향의 큰길을 따라 동부관아(오늘날 종로4거리 호텔 아트리움 주변)에 도착했다. ‘이재난고’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황윤석의 출근길을 따라 서울 곳곳을 답사할 수 있다. 창동 수각교 터부터 전생서 도가(서울시청 앞), 의영고 터, 사복시 터, 종부시 터 등 모르고 지나쳤던 관아 터를 살필 수 있다.

조선통신사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조선통신사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여섯 번째 길은 조선통신사길이다.

조선통신사를 떠올리면 부산을 출항해 에도(오늘날 도쿄)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떠났던 모습을 대부분 상상할 것이다. 통신사들은 궁궐에서 어명을 받고, 숭례문을 지나 남관왕묘에서 의관을 갈아입고 여정을 떠날 준비를 했다. 조선통신사들은 한강을 건너 양재역에 이르러 영남대로를 따라 부산까지 갔다. 오늘날은 해외여행이 쉬운 일이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긴 여정에 건강이 상하기도 하고,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양을 멀리 벗어나기 전, 동료들과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전별연을 벌이기도 했다.

남산 밑의 전생서, 이태원, 한강진의 제천정 등은 이별의 아쉬움과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나누던 대표적인 전별 장소였다. 조선통신사들이 걸었던 길에는 대부분 표석만이 남아 흔적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책에서는 독자들의 상상을 돕기 위해 그림과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풍성하게 담았다.

정조의 효행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정조의 효행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일곱 번째 길은 정조의 효행길이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참배한다. 정조가 이전 현륭원 능행을 떠났을 때는 남태령 고개를 넘어갔다. 남태령 방면은 언덕이 이어지기 때문에 궁에서 대부분의 생을 살았던 연세든 어머니가 고단할 것을 정조는 걱정했다. 이 때문에 비교적 평평한 시흥 쪽의 길을 선택하고, 5리마다 휴식처인 주정소를 마련해 어머니의 휴식을 계획했다.

1795년 윤2월 9일, 행렬은 노량진에 설치한 배다리를 건너 시흥행궁-안양참-사근참행궁-지지대-만석거-영화정-수원화성-만년제-현륭원-화성행궁에 이르렀다. 8일간의 긴 일정이었다.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지위가 왕비가 아니었음을 생각한다면, 조선의 전례 없는 행사였다. 능행이라는 효행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위를 백성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정조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정조의 을묘년 능행은 ‘정조대왕 능행차’를 통해 재현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벤트를 통해 것도 의미있지만, 답사기를 따라 융건릉에 이르기까지 답사한다면 더 생생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도성도에 그려진 한양의 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도성도에 그려진 한양의 길.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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