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hen new] 서울스토리⑥ 이발소 변천사, ‘개화당 제조소’부터 ‘바버숍’까지...서울미래유산 ‘성우‧문화이용원’ 100년의 역사

김남기 기자
  • 입력 2023.10.24 13:48
  • 수정 2023.11.2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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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변 이발소 1973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청계천변 이발소 1973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1970년대 명절 때가 되면, 이발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동네 싼 이발소는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발소가 흔치 않다. 미장원이 익숙지 않은 노인은 사우나 이발소를 자주 이용한다.

서울에는 14,000여 곳의 이용원이 존재(2022년 9월)한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용원은 단 2곳뿐이다. 종로구 혜화동의 ‘문화이용원’과 마포구 공덕동의 ‘성우이용원’은 10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두 이용원은 시민 가까이에서 소통하며 전통 방식의 ‘이용(理容)’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22년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의 결과를 담은 ‘서울의 이용원’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개화당 제조소’부터 ‘바버숍’까지 이발소 변천사를 알아보겠다.

상투한 이용사가 이용하는 모습 매일신보 개화당제조소 1930년 5월2일자
상투한 이용사가 이용하는 모습 매일신보 개화당제조소 1930년 5월2일자

한국인 최초의 이용원, 인사동 ‘동흥이발소’

1895년 단발령을 계기로 지금의 이용원을 뜻하는 ‘개화당 제조소’가 탄생했다. 한국인 최초의 이용원인 ‘동흥이발소’는 1901년 유양호가 인사동 조선극장 터에 개업했다. 황제 전속 이용사였던 안종호는 광화문 근처에 ‘태성이발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부민이발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부민이발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조선인‧일본인‧중국인 이용원의 삼파전

서울(경성)에는 일본인 이용원이 가장 먼저 생겼고, 조선인 이용원과 중국인 이용원이 그 뒤를 이어 개업했다. 1915년에 서울의 이용원은 226개였는데, 조선인 이용원이 140개소(62%)로 가장 많았고, 일본인 이용원이 70개소(31%), 중국인 이용원이 15~16개소(7%)로 가장 적었다.

중국인 이용원은 지금의 중구 지역에 밀집해 있었는데, 상호에 ‘당(堂)’ 자를 붙였다. 1910년 소공동에 용승당, 석정동에 복덕당, 대정동에 덕발당, 정동에 복성당, 시동에 장성기, 낙동(명동)에 류학청이 영업했다.

중구 다동이발관 1966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중구 다동이발관 1966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장발 단속과 구내 이용원의 전성시대

서울의 이용원 전성시대는 1960~1980년대 초였다. 1974년 6월부터 서울시경은 장발족 무기한 단속을 실시했다. 학생들은 엄격한 두발 규정을 적용받았다. 관공서는 물론, 큰 회사와 빌딩, 학교·호텔·목욕탕에 이르기까지 구내 이용원이 설치됐다.

중구 방산동 맘보이발관 1962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중구 방산동 맘보이발관 1962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용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한곳에, 이용재료상

이용업계는 이용재료상과의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한 특별한 거래 관행을 형성하고 있다. 1970~1990년대 서울에는 종로와 청량리에 가장 많은 이용재료상이 있었는데, 청량리 로터리 일대에만 100여 개의 이용재료상이 있었다.

당시의 재료상은 취업 알선과 인력 공급을 담당하며 이용업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자리가 필요한 이용사들은 재료상에서 대기하거나, 구직 의사를 알렸다. 그러면 사람이 필요한 이용원에서 커트·드라이 등 필요한 분야의 기술을 가진 이용사를 모집해 데려가는 방식이었다.

공간을 연결하는 역할도 했는데, 지금의 공인중개사처럼 이용 업소의 운영권을 재료상을 통해 거래했다. 이용원을 매도하려는 사람이 재료상에 매물을 내놓으면 인수할 사람을 찾아 거래를 맺어주었다.

구도심과 외곽 지역엔 ‘이용원’, 강남과 홍대에는 ‘바버숍’

현재(2022.9. 기준) 서울의 이용원 수는 약 2,500곳이다. 자치구별로는 송파구가 135곳으로 가장 많고, 서대문구가 65곳으로 가장 적다. 하지만 이를 이용원과 바버숍으로 나눠보면 이용원은 영등포구가 128곳으로 가장 많고, 용산구가 57곳으로 가장 적다. 반면, 바버숍은 강남구와 마포구가 24곳으로 가장 많고, 금천구는 단 1곳에 불과하다. 중년 이상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이용원은 구도심과 외곽에, 바버숍은 청년층이 많이 모이는 강남과 마포구에 밀집하는 경향을 보인다.

문화이용원 내외부 전경.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문화이용원 내외부 전경.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문화이용원’ 혜화동 명사들의 사랑방 

문화이용원은 1940년대에 처음 문을 열었다. 6‧25전쟁 중 창업자가 실종돼 전후 이상기 이용사가 들어와 1954년 종로구 혜화동에 이전했다. 손님이었던 지덕용 이용사는 17세에 보조원으로 문화이용원과 인연을 맺었다. 1969년 이용원을 인수한 그는 2022년까지 문화이용원에서 67년의 세월을 보냈다.

1970년대 이전 혜화동은 지금의 강남에 견줄 만한 부촌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문화이용원은 기업인‧정치인‧교수‧문인의 사랑방이었다.

옛날에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처음에는 ‘신당동입니다.’ 하고 멘트가 나왔어요. 부자 동네라고요. 그다음에 이제 ‘혜화동입니다.’라고 바뀌었어요. 부촌이고 좋은 동네라는 뜻이에요. 한때는 국회의원이 여섯 분 있을 정도로 여기에 관료들이 매우 많았어요.

윤진영(남, 1943년생, 대학서림 대표) 인터뷰

이희승 박사, 이병도 박사는 우리나라 1세대예요. 유명하신 분들이 여기 다 오셨어요. 근처에 이용원이 아무리 많아도 오는 데가 따로 있어요. 장면 박사도 여기 오시고, 이회창, 이수성, 김상엽 씨도 오고. 삼성, 두산, 효성, 현대 기업인들도 여기 왔어요. 민족 대표 33인 중에 마지막에 돌아가신 이갑성 그분도 여기 오셨어요.

지덕용(남, 1940년생, 문화이용원) 인터뷰

성우이용원 리모델링 전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성우이용원 리모델링 전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성우이용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용원

성우이용원은 100년대 면도칼을 아직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1928년 마포구 공덕동에 우리나라 이용 면허 제2호 서재덕이 개업했다. 1935년 사위 이성순이 대를 이었고, 1971년부터 아들 이남열이 뒤를 이어 3대째 운영 중이다.

이남열이 생각하는 좋은 이용사의 첫째 덕목은 ‘도구를 소중히 다루는 자세’다. 훌륭한 연장은 가격이 아니라 어떻게 관리했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면도날은 선풍기 바람에도 날이 상할 수 있어 절대 바람에 노출하지 않는다. 가위와 면도칼뿐 아니라 빗도 빗살을 갈아 다듬어 사용한다. 

성우이용원의 드라이용 빗, 150년 된 면도칼(독일제).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성우이용원의 드라이용 빗, 150년 된 면도칼(독일제).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빗도 다듬어서 써야 해요. 안 그러면 못 써요. 미트 페이퍼(위생 멸균 흡수지)에 담가서 다듬어요. 그거 가지고 갈아내는 거예요. 아니면 1,000방, 1,200방짜리 숫돌로 살살 다듬어서 쓰고요.

이남열(남, 1949년생, 성우이용원) 인터뷰

성우이용원에서 사용하는 도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0년 된 독일제 면도칼이다. 이남열 이용사가 가장 아끼는 가위는 1968년 이발을 시작하며 당시 일주일 치 임금이던 700원에 구입한 것이다. 

내가 처음 이발 배울 때부터 쓰던 가위예요. 미동초등학교 앞에 기구 상회가 있었는데, 일주일 치 일당으로 700원 주고 샀어요. 쇠가 끝내줘서 아주 잘 나가요. 제가 제일 아끼는 거예요. 갈기가 아까워요.

이남열(남, 1949년생, 성우이용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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