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hen new] 서울스토리⑤ 세상을 찍어내는 인쇄골목, ‘인현동’

김남기 기자
  • 입력 2023.10.16 16:02
  • 수정 2023.10.1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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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석가탑을 세울 때 봉안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1377년에 고려 말 백운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이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38년(1251)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81,258개의 목판 양면에 새겨 넣어 몽골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비밀리에 인쇄된 5.16 군사정변 공약은 군사정부의 서막을 열었고, 26년 후 인쇄된 6.10 민주항쟁 선언문은 그 세월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인현동 인쇄골목은 오래전부터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쇄산업의 대표적인 중심지이다. 최근 들어 많은 인쇄업체가 파주출판단지와 성수동 등으로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이곳은 수십 년간 우리의 삶을 인쇄해 온 곳이다.

인현동 골목에 인쇄업이 뿌리를 내리면서 겪어온 여러 가지 변화와 그 생생한 모습을, 서울역사박물간에서 편찬한 ‘세상을 찍어내는 인쇄골목, 인현동’의 내용으로 발취 정리한다.

인현동 인쇄골목 풍경.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인현동 인쇄골목 풍경.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한국 인쇄의 산실 인현동

인현동 인쇄골목은 행정동으로 중구 을지로동, 필동, 광희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인쇄 관련 사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2013년 기준으로 25,800여 개의 사업체가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인쇄 관련 사업체는 전체의 22%인 5,181개로, 모든 업종 가운데 가장 많다. 이곳에서 일하는 인쇄업 종사자 14,152명은 전체 거주 인구인 13,007명보다 천 명 이상이 나 많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가보면, 사업체들이 밀집해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다. 격자형으로 짜인 고른 골목길도 없고, 최신식 건물도 많지 않다. 길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심지어 막다른 골목길도 있다. 폭도 좁고 제각각이고, 건물도 오래됐다. 남산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마른 내를 비롯한 작은 물길을 따라 들어섰던 상가와 주택은 6.25 전쟁 때에도 큰 피해를 보지 않아 옛 도시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의 낡고 미로 같은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무질서와 불편함으로 비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굴곡진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왜 인현동 인쇄골목인가?

수선전도(首善全圖, 1864년), 조선시대의 목판지도로 종로 지역을 상세 묘사했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수선전도(首善全圖, 1864년), 조선시대의 목판지도로 종로 지역을 상세 묘사했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시 중구 인현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인쇄 관련 사업체의 집중도는 이례적이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쇄업 및 인쇄 관련 사업체의 44%가 서울에 몰려 있고, 이 중에서 2/3 이상이 중구에 자리하고 있다. 기타 인쇄 관련업까지 따지면, 80%가 중구에 집중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30% 정도가 중구라는 극히 좁은 공간에 몰려 있다. 이는 사실상 인현동 일대가 전국 최대의 인쇄업 집적 지역임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못하는 것이 없다. 기획부터 후가공까지 인쇄와 관련된 모든 분야가 인현동에서 소화된다. 3층도 안 되는 난쟁이 건물들이 밀집해 있지만, 수많은 작업장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어떤 형태와 수량의 인쇄물이든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조선시대, 인현동 ‘주자소’

주자소 상상도. 자료=청주고인쇄박물관 제공<br>
주자소 상상도. 자료=청주고인쇄박물관 제공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수도가 된 한양은 청계천 북쪽에 궁궐과 관청가, 상업시설 등이 들어섰고, 남산 북쪽 자락에는 주로 일반 서민들이 사는 거주지 군사용지로 활용됐다. 조선시대 인현동 일대는 한성부 남부로 훈도방, 성명방, 낙선방에 해당한다. 당시 이곳의 풍경은 사람이 북적대는 중심지라기보다는 한적 한 마을이었다.

인현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인성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인성붓재 또는 인성부현·인성현, 줄여서 인현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인현동 일대는 인쇄업과도 관련이 깊었다. 금속활자를 만들어 낸 관청인 ‘주자소’ 책자 인쇄를 관할한 ‘교서관’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21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훈도방주자동지’에 따르면, 이 부근 마을에는 서적을 인쇄하는 이들이 모여 살았고, 사족(士族, 중앙관료) 중에서는 독서와 요양을 주로 하던 이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개항 이후, 인현동 ‘박문국’ 한성순보 발행

박문국 발행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제5호 1883년. 자료=국립중앙도서관
박문국 발행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제5호 1883년. 자료=국립중앙도서관

개항 이후 한양에는 서구식 근대화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인쇄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도입된 인쇄기술은 서구화된 일본식 인쇄술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새로운 인쇄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처음 신기술을 소개한 사람은 1882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1861~1939)이다. 그는 인쇄전문가와 인쇄 기기를 도입했다. 이는 1883년 10월 1일 박문국의 설치로 이어졌고,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발행되었다.

이후 한성주보 등 다수의 신문이 발간되었고,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인 광인사, 광문사, 보문사 등 여러 인쇄업체들이 종로·남대문로 등 도심부에 들어섰다. 이때 유입된 새로운 인쇄기술은 출판·인쇄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개화기, 최초의 민간 인쇄업체 광인사

광인사 발간 '충효경집주합벽' 초판본, 납활자로 인쇄된 우리나라 초초의 단행본. 자료=국립중앙도서관
광인사 발간 '충효경집주합벽' 초판본, 납활자로 인쇄된 우리나라 초초의 단행본. 자료=국립중앙도서관

광인사는 1880년대 초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로, 일본에서 납활자와 활판인쇄기를 도입하여 인쇄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다. 갑신정변 때 박문국이 훼손됨에 따라 한성순보를 광인사에서 속간하려고 시도했다.

규모가 있는 민간 인쇄업체들은 1900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인쇄소로 광문사와 박문사가 있었다. 1905년 당시 전동(현재 수송동)에 설립된 보성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시설까지 갖춰 당시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1907년에는 손병희와 공진환의 보문사가 소안동(현재 안국동 종로경찰서 인근)에 설립됐으며, 1908년에는 최남선에 의해 신문관과 보인사가 설립됐다. 신문관에서는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 소년을 펴냈으며, 보인사는 활판 시설 외에 석판기와 사진 제판부, 제본 부까지 갖추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일보와 곡강상점

일제강점기 인현동 부근 인쇄업체.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nbsp;
일제강점기 인현동 부근 인쇄업체.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개화기 이후 빠르게 성장한 인쇄업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사업체 수와 규모가 급증했다. 이때 경성 도심부에 자리한 인쇄업체는 크게 경성부청 인근 지역, 종로 북쪽 지역, 인현동 일대 지역으로 나뉘어 분포했다.

일본인 거주지였던 남산 북쪽 자락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던 인쇄소가 다수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자동에 위치했던 경성일보(1906~1914)와 곡강상점(谷岡商店, 1920~1945)이다. 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는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매입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를 만들었다. 곡강상점은 인쇄‧제본‧종이 판매 등을 겸한 업체로, 이곳에 자리한 종이·문구·인쇄업체의 납부 세액 중 거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일제 강점기시절 인쇄소.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nbsp;
일제 강점기시절 인쇄소.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30년대 말까지 경성에서 가장 큰 인쇄업 밀집지역은 경성부청 근처였다. 하지만 경성 시내 인쇄소 120여 곳 가운데 30여 곳이 인현동 일대에 분포했다. 이것은 당시 인현동 일대가 인쇄업의 중요 분포지 중 하나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해방 이후...'인현동 인쇄골목'의 탄생

1960년대 영화포스터.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nbsp;
1960년대 영화포스터.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떠났고, 이들이 남긴 시설과 주택은 한국인들에게 적산이란 이름으로 불하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인쇄업체 또한 한국인들에게 넘겨졌다.

1950년 6·25전쟁으로 많은 인쇄소가 큰 피해를 보아 인쇄업은 침체기에 빠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에는 외국의 원조금으로 인쇄 기계가 다량 수입됐고, 인쇄물 수요가 증가하면서 인쇄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인현동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인쇄업체 밀집 지역이었다. 당시 영화는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는데, 영화포스터 입장권 등이 필요한 서울 시내 영화관은 인쇄소의 주요 고객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인현동의 인쇄업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다. 그 당시 서울시 전역에 분포하고 있던 인쇄업체 325개 중에서 42개가 인현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특히 인현동 1가 중심도로(현 마른내로)를 따라 많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현동 인쇄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0~90년대 '인현동 인쇄골목'의 전성기

1990년대 선거포스터.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nbsp;
1990년대 선거포스터.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70년대까지 서울 최대의 인쇄업 밀집 지역은 서울시청 주변에 자리한 장교동(을지로1가 부근)이었다. 하지만 1983년 장교동이 재개발되면서 인쇄소가 대거 인현동 일대로 옮겨왔다. 주택·상가·인쇄소가 공존하고 있었던 인현동 일대가 드디어 인쇄업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다.

이때 이곳에서 찍은 인쇄물에는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수출이 늘어 나면서 수출입에 필요한 봉투 편지지·명세서·승인서 등을 찍어내기 위해 인쇄기가 밤낮없이 돌아갔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 포스터 등 컬러 인쇄물에 대한 수요도 높아져 갔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실시되면서 선거에 필요한 각종 공보물·포스터·홍보전단 등도 인현동 인쇄 골목을 떠받치는 거대한 수요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인현동 인쇄골목은 그야말로 호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도 오래가지 못 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쇄물량이 급감하고, 값비싼 수입 인쇄기의 리스료 부담 이 폭등하면서 인쇄골목은 급격한 한파를 맞게 되었다.

그때는 손톱이 새까매져서 버스 손잡이도 못잡았으니까....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장교동 쪽이 개발되면서 그쪽에 있던 인쇄소들이 다 쫓겨났다. 그래서 인현동 쪽으로 엄청 오게 됐다. 인쇄술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건 1988년도 올림픽 때문이다. 1986년도 아시안게임, 88년도 올림픽게임을 하면서부터 세계 고급 원색 인쇄물에 눈뜨기 시작하고, 그 당시 인쇄물을 나도 수출을 했다.

2010년부터 인쇄 시설 과잉이 인쇄물은 점점 가격이 낮아지고 또 사람 구하기 힘들고 인쇄기술자 급료 주기도 어려워졌다.

- 태양씨엔피 이재환

갈림길에 선 인현동 인쇄골목

인현동 인쇄골목의 역사 전시장
인현동 인쇄골목의 역사 전시장.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인현동 인쇄골목은 전국 최대·최고의 인쇄업 집적 지역이라는 위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인현동 인쇄골목은 갈림길에 서 있다. 대형 인쇄업체가 도입한 인터넷 견적 이 활발해지면서 원가가 일반에 알려진 탓에 인쇄업체들은 이윤이 거의 없는 수준에서 가격경쟁을 하고 있다. 또한 개인 프린터가 보편화되고, 온라인 광고매체가 활성화되면서 인쇄 수요도 급감했다. 인쇄업의 불황으로 공실이 증가하면서 낡은 골목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구나 재개발을 원하는 건물주들이 시설투자를 하지 않아 인쇄골목은 더욱 쇠락하고 있다.

그러나 인현동 인쇄골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연식의 기계와 후가공 과정을 갖추고 있어, 다른 어느 곳보다 고객들의 크고 작은 요구를 더 잘 맞출 수 있다. 그리고 도심부에 위치한 인현동 인쇄골목은 접근성이 좋아 시내에 있는 고객들이 찾아오기에 편리하다. 고객의 주문으로 모든 일이 시작되는 주문 제작 업종의 특성상 고객에게 가까이 자리 잡은 것은 다른 곳이 가질 수 없는 최대 강점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인쇄 서비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인현동 인쇄골목의 아성은 쉽게 깨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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