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나이 듦의 철학’

이상수 기자
  • 입력 2023.10.25 19:17
  • 수정 2023.10.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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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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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이상수 기자] 백세시대가 온다. 2050년 지구에는 어린아이보다 노인이 두 배가 많을 것이다. 많은 책이 고령화 시대의 경제적, 생명공학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 등을 다루기 시작했다. 문제는 행복한 나이 듦이다. 수명연장과 행복한 노년의 합집합을 말하려는 책이 있다.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출간된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가인 파스칼 부뤼크네르(Pascal Bruchner)의 작품이다. 프랑스 2대 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변화하는 고령화 시대에 새롭게 나이 드는 법을 전한다.

‘포기를 포기하라’

작가는 모순화법을 즐긴다. 노인이면서 젊게 산다는 것이 이미 모순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노인이 노인으로 살아갈 것을 포기하라고 한다. 심지어 ‘늙은 애’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백 세를 넘어 살지도 모를 고령화 추세 때문이다. 이제 노인은 노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노인이 아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만 진짜 노인이다.

백세시대에 나이는 중요변수가 아니라 이제 수많은 변수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시대에 나이 핑계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 하면 ‘과학기술이 수명을 늘린 것이 아니라 노년만 늘린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에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요컨대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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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수명의 이점과 카운트다운 효과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어지면 치열하게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집중해서 써야 한다. 이것이 ‘카운트다운 효과’다. 10, 9, 8, 7, 6, 5, 4...... 흐르는 매 순간이 아깝고 소중하다.

미래를 대하는 자세엔 두 가지가 있다. ‘감당해 내야 하는 미래’와 ‘만들어 가는 미래’. 전자는 수동적이지만 후자는 능동적이고 실존적이며 의식적인 활동이다. ‘내일은 춥거나 비가 올 수 있지만, 내일 날씨에 상관없이 작정한 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만들어 가는 미래다. 그냥 오래오래 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실존적이지 못하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 살날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즉 ‘양립 불가능성이 무너진다.’ 이제는 나이 들어도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다. 기대치 않게 받은 수명연장을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노화를 늦추는 방법은 ‘모순의 조화’

50세가 넘으면 가르치려 든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 학교의 학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만 배워도 되는 나이는 없다. 새로운 일은 무덤까지 계속될 수 있다. 60세가 되고, 70세가 되어도 완성된 사람보다는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이 더 많다. “진짜 삶이라는 것은 없고, 단지 아직도 탐색할 수 있고 흥미로워 보이는 길들이 있을 뿐이다.”

노화를 늦출 방법은 모순의 조화에 있다. 양립 불가능한 것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낭만주의와 느긋함을, 뻔뻔함과 주름살을, 백발과 기꺼운 감정의 폭발’을 화해시켜야 한다.

저자는 아주 강력히 노년을 밀어붙인다. “나이에서 황폐한 장식을 벗겨내고 노년의 멋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한계는 밀어내기 위해 존재한다. 생의 어떤 단계에서든 불가역성에 반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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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것들의 찬란함...루틴의 힘

노년의 위험은 권태에 있다. 그날이 그날 같다. 저자는 루틴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그의 말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리게 한다. 무한히 시간과 사건이 반복된다. 지루한가? 니체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삶의 오류를 점차 수정해 가며 삶을 ’선‘의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다. 저자는 ’차이의 반복’을 말한다. 되풀이되는 삶은 완전히 똑같을 수가 없고 늘 살짝살짝 달라진다.

위대한 첼리스트 파브로 카잘스는 96세까지 똑같은 바흐의 곡을 매일 연주했지만, 늘 새로운 환희를 느꼈다고 한다.

저자는 별일 없어 보이는 삶의 동일한 일과가 삶의 폭풍이 닥쳐도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게 해준다고 한다. 루틴은 ’정체된 전진‘이다. 정해진 대로 매일 하는 침대 정리, 청소, 책상정리…. 등등은 곧 의식이다. 그리고 일상의 기도다.

’늙은 아이‘로 살아가기

50세가 되고, 60, 70세가 되면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만 많았지 때때로 삶이 막막하기는 20대, 30대, 40대와 마찬가지다. 그저 ’시간의 연안에 헐벗은 채 떠밀려‘ 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 오히려 삶의 상황을 바로잡을 가능성만 줄어들었다.

그래서 저자는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순결한 눈, 놀라워하는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은 유치함이 아니다.

어린아이 마음으로 돌아가 인생을 주사위 던지듯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나이 들면 '안되는 건 안 되는 거다.' 80세에 생물학과 수학을 연구하고, 패러글라이딩하고, 동굴을 탐험하려는 것은 무모하다. 물론 그것에 익숙한 사람과 이제 그것이 마지막 소원인 사람은 제외하고다.

저자가 말하는 어린이다움이란 지금까지 쌓아온 거의 쓸모없는 지식에 얽매여 ’꼰대‘로 살지말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무지로 돌아가란 얘기다.

쓸모없는 낡은 지식을 버리고 직관으로 가득 찬 무지의 세계로 나가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몸은 늙되 마음은 늙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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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라는 말을 듣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감독으로 90대에도 왕성하게 작업하며 클리셰를 박살 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은 98세에 새 책을 냈고, 포르투갈의 영화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100세를 넘겨서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천재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체리치는 80세를 넘었고,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는 죽을 때까지 일했다. 또다른 피아니스트 마르시알 솔탈은 90세에도 연주회 무대에 섰다.‘

’노년기라는 먼 대륙의 밀사‘인 이 사람들은 무엇은 전해 주려 하는가? 노년의 대륙에서 맥없이 늘어지지 말라고 한다. 삶은 여전히 가능하고 예측 불허라는 사실과 함께.

’아직도‘라는 시간부사는 당황스러운 지속에 대한 반응이다. “아직도 여행을 다닌다고?“, ”아직도 현역이라고?“, ”아직도 춤을 춘다고?“, ”아직도 캠핑하러 다닌다고?“. ’아직도‘의 삶은 노년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저자의 죽음과 영원에 대한 메시지는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와 닮았다. 그는 우리에게 선택하게 한다. ‘무미건조한 삶을 오래오래 살 것인가?’, 아니면, ‘진짜 부딪히고 느끼는 충만함의 시간을 살 것인가?'.

그에겐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보다 진정한 사랑과 애착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게 더 나쁘다. 그런 그에게 영원성은 죽음 후가 아니라 소박한 일상의 산문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곧 영원이고,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이 영원이고 불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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