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㉒] 산악인의 로망, 지리산 ‘화대(華大) 종주’를 꿈꾸며5. 화개재와 뱀사골의 전설들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6.29 12:03
  • 수정 2023.07.2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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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의 쨍쨍한 울음소리에 낮술로 취하고 싶은 하루

저 멀리 동구밖에는 고향을 찾아오는 아이들

이것이 수수만 년 우리와 우리를 단단히 이어 주었구나

마을 건너서 마을, 당산은 끈처럼 이어져 왔는데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울퉁불퉁한 미소로 반기던 장승도

무사태평을 빌고 넘던 성황당도

지나던 까치가 한가하게 쉬다 가던 솟대도,

모두 다 사라지고 없다.   

- ‘칠월 칠석’, 윤재훈

지리산 능선.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 능선.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대부분 산악인은 노루목에 오면 두 길 중에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바로 삼도봉으로 해서 화개재를 지나는 주 능선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1,732m 반야봉까지 약 1km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올 것인가,

그런데 성삼재에서 아침에 출발한 산악인들은 최소한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가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이 만만치 않다. 여기서 굳이 반야봉까지 헉, 헉, 대면 올라갈 필요 없이 바로 연하천으로 가면 편하다. 하여 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간다. “앞으로도 많은 봉우리를 볼 텐데, 굳이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나?”, “다 그 산이 그 산이지 뭐,”하면서 스스로를 다독거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그 유혹에서 벗어나 땡볕 아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분홍 철쭉 군락들을 지나 반야봉을 올랐다. 내려오면서 부드러운 산취를 한 아름 따가지고 말이다. 한 편으로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수많은 봉우리에 올라가는 지리산 등산에서 봉우리들의 풍경이야 비슷하겠지만, 두고두고 반야봉을 올라갔다 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사목(古死木). 촬영=윤재훈 기자
고사목(古死木). 촬영=윤재훈 기자

화개면 정금마을에는 노루목에 얽힌 전설 하나가 오랫동안 그 생명성을 잃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지리산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는데,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한 요망한 여자가 ”산이 걸어 나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버렸다고 한다.

고정불변의 존재인 산이 들판(세상)을 향해 걸어 나왔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산의 생명성과 능동성, 지향성을 상징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지리산의 모성적 토대 위에 어떤 자생력을 회복한 변혁세력이 새 세상을 꿈꾸며, 들판을 향해 내려온다는. 그런 말은 아닐까? 그것은 태곳적부터 농경문화가 꿈꾸었던 널따란 들판문화에 대한 염원과 그것을 위협하기도 했던 역사를 상징적으로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산은 우리에게 `열린 공간'이자, 들보다 높고 험해서 `닫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들판 문화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산이 그런 압력을 받게 되지만, 들판문화가 느슨해지면 산 자체가 자생성을 확보하여 산에 저항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서의 모습과 부성적인 산으로서의 모습 양면을 띠는데, 이것을 흔히 `지리산의 이중성'이라 부르며 고 박현채 교수는 `수동성'과 `능동성'이란 말로 정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성산 지리산은 정치 사회적인 과도기나 이행기에서는 수동적인 모습을 벗고, 능동적으로 역사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해방공간에서 불행하게 동족 간에 저질렀던 빨치산의 서러운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배 있다.

짙푸른 6월의 지리산 숲길. 촬영=윤재훈 기자
짙푸른 6월의 지리산 숲길. 촬영=윤재훈 기자

반야봉에서 약 0.8km 내려온 우리는 삼거리 길에서 굳이 노루목으로 다시 갈 필요가 없어 바로 삼도봉으로 향한다. 길은 계속해서 내려간다. 그도 그럴 것이 반야봉에서 삼도봉으로 해서 화개재까지는 약 400m 정도 고도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걸어가야 할 종주산행에서는 내려가는 길이 굳이 반갑지만은 않다. 건너편 봉우리를 가려면 또 그만큼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길이 꼭 우리들의 인생길과 닮았다고 한다. 내려가면 올라가야 하고, 올라가면 기필코 다시 내려가야 하고.

그래서 옛날의 어른들은 수시로 몸가짐을 여미었다. 높은 데 있을 때 내려간 후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도, 빨치산 때에도, 구례의 유 씨 부자도 경주의 최 씨 부자도 평소에 음덕을 쌓은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덕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외롭지 않다“

문명의 골칫덩어리, 스마트 폰. 촬영=윤재훈 기자
문명의 골칫덩어리, 스마트 폰. 촬영=윤재훈 기자

화개재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잠시라도 스마트 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문명의 이기가 되어버린 핸드폰, 그렇다고 놓을 수도, 굴레처럼 종일 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 현대인에게는 딜레마가 하나 늘었다. 무수한 정보의 바다, 스마트 폰.

먼저 온 사람들은 하나둘 오침(午寢)에 들었다. 달게 한숨 자고 나니 선두는 벌써 출발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지리산 주 능선 100리 가운데 해발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이 화개재이며, 이 길은 전남과 전북의 소통 길이였다. 화개재는 영(嶺)이나 치(峙)가 아닌 순우리말의 재라고 부르기 때문에 노루목, 장터목과 함께 아주 정겨운 이름이다.

화개재는 노고단에서 동쪽으로 10km,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35km의 거리에 있고, 동서로 각 2km의 거리에 1,550m의 삼도봉과 1,522m의 토끼봉의 사이에 있다. 해발고도는 1,360m로 지리산 주 능선에서 가장 잘록하여 개미의 허리처럼 보인다.

화개재는 남쪽으로는 화개천을 북쪽으로는 절경의 뱀사골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고개에서 남쪽으로 화개골 마을이 바라보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번창했던 화개재는 경남과 전북의 도계(道界)이자 하동군 화개면과 남원시 산내면의 경계지점에 있다.

옛사람들은 화개장터에서 등짐이나 지게를 지고 이 고개를 올라 북쪽에 있는 뱀사골을 따라 남원으로 넘나들었는데, 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들의 고단한 일정을 잠시 잊게 해주었을 것이다. 섬진강을 따라 올라왔을 소금 가마니나 해산물들은 이 고개를 넘어 남원으로 갔을 것이고, 남원 쪽에서는 삼베나 농산물 같은 것들이 다시 화개장터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화개재에서 뱀사골로 넘어갈 때, 처음 마주치는 큰 소(沼) 이름이 간 장소라고 하는데, 소금 가마니를 빠뜨렸다는 전설이 계곡물처럼 흘러 내려오고 있다.

짙푸른 지리산길. 촬영=윤재훈 기자
짙푸른 지리산길. 촬영=윤재훈 기자

남원 쪽에서 올라오는 뱀사골은 주 능선으로 이어진 계곡 가운데 가장 완만하고 오르기도 쉽다. 그래서 사람들로 많이 붐빈다. 반선(伴仙)에서 화개재까지는 12km, 30리에 걸쳐 흐르는 이 계곡은 석실, 요룡소, 탁용소, 뱀소, 병소, 병풍소, 단심폭포, 간장소 등으로 불리는 명소들을 지난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이 골짜기에는 집채만 한 석실(石室)과 원시의 숲길이 신비로워 한국의 비경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리산 입구에는 ‘지리산지구 전적기념관’이 있으며 1955년 5월 지리산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의 안내문만 소슬하게 서서, 아픈 현대사를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산 공비는 완전 섬멸되었습니다.'

유장한 지리산. 촬영=윤재훈 기자
유장한 지리산. 촬영=윤재훈 기자

48년 여수에서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6. 25 때 퇴로가 막힌 북한군 2만여명이 지리산에 주둔했으며, 5년 6개월 동안 아군과 경찰 토벌대가 작전을 벌였다. 아군의 희생자도 6,300여명에 이르렀다. 그 기념관이 서 있던 자리에는 송림사(松林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은 실상사보다 백여 년이 앞선 대찰이었는데, 뱀사골에 대한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 송림사의 주지 스님이 매년 7월 칠석날 밤이면 어디론가 사라져 주민들은 스님이 부처가 되어 승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소리를 들은 서산대사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칠석날 장삼 속에 비상 주머니 달아 주지 스님에게 입히고는 예년과 같이 독경하도록 했다. 새벽녘이 되자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로, 큰 뱀이 절에 왔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따라가 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소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이무기의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의 시체가 있었고 송림사마저 사라져 버렸으니, 더욱 모호한 일이 되어버렸다.

또한 ‘뱀사골’이라는 이름은, 현재의 석실 건너편에 배암사란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배암사골’이 변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 사찰마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으며, 뱀이 많고 적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러나 뱀사골에는 뱀이나 용과 관계된 이름과 명소가 많다. 그곳마다 전설이 있는데, 탁룡소(濯龍沼)는 큰 뱀이 탈피 목욕을 하여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또 수행한 스님들의 반은 신선(神仙)이 되었다 하여 반선(伴仙)이라고 부른다. 또한 뱀사골에는 산장도 있는데, 77년에는 한국산악회 전북지부장인 김재각 씨 등이 뜻을 모아 초기 산장을 건립했었다.

이제 천왕봉이 멀지 않다. 촬영=윤재훈 기자 기자
이제 천왕봉이 멀지 않다. 촬영=윤재훈 기자 기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당산나무 아래는 소란하다
온 마을은 일손을 놓고 넉넉한 품으로 걸어 들어온다
객지에 나간 사람들은 꼬깃꼬깃 손때 묻는 돈들로 제물을 사서 보내고
당산나무 숲은 오늘 밤 더욱 무성하다
영희집 담벼락에 성인식을 맞는 아이들은 들돌을 드느라 얼굴을 붉히고
진세*를 맞는 아이들은 하루가 즐겁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당산나무는 더욱 무성히 천년의 소리를 울리며
마을에 흘러간 나날들을 퉁소가락으로 잡아 흘려보낸다.

매미의 쨍쨍한 울음소리에 낮술로 취하고 싶은 하루
저 멀리 동구밖에는 고향을 찾아오는 아이들
이것이 수수만 년 우리와 우리를 단단히 이어 주었구나
마을 건너서 마을, 당산은 끈처럼 이어져 왔는데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울퉁불퉁한 미소로 반기던 장승도
무사태평을 빌고 넘던 성황당도
지나던 까치가 한가하게 쉬다 가던 솟대도, 모두 다 사라지고 없다
마을에서는 정신이 나가 저수지 물목에 빠져 죽었던 순이의 얘기는
무장무장 전설처럼 살아오고, 오늘도 그 둑에 산발한 삐비꽃만 달빛아래 치렁하다

모두 떠나간 당산나무에 걸린 달꽃만 가지마다 부서지고
떠나갈 사람들은 다 떠나가 버린 오늘, 늙은 농촌
이 밤, 촌로만 혼자 당산나무 아래에서 외로이 울다가 돌탑 속으로 사라지고,
당산나무 숲들은 더욱 무성한 소리를 올리며,
남겨진 것들을 마저 주섬주섬 챙겨 하늘로 오른다

- ‘칠월 칠석’, 윤재훈

* 진세 : 전염병 등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자라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보통 당젯날 성인식과 비슷하게 지내주는 행사. 지방마다 지내주는 나이가 다르며 보통 4세에서 9세 사이에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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