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것들⑳] 냉면의 계절에 문 닫은 '을지면옥'... 을지로 노포들이 사라진다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6.27 17:51
  • 수정 2023.03.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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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에 고춧가루와 파가 올라온 게 특징인 '을지면옥'
BTS가 다녀가 전 세계 아미들의 명소가 된 '을지다방'
일제 강점기에 병원으로 세워진 '대진정밀'
'전주집','갯마을횟집'이 사라졌고 '안동장','조선옥'이 사라진다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살얼음 동동 떠다니는 육수에 면발을 적신 시원한 냉면 생각이 나는 계절, 냉면집 하나가 사라졌다. 전국구 냉면 마니아라면 한 번쯤 들러보았을 을지로 3가의 을지면옥이다. 을지면옥의 냉면은 물냉면이다. 냉면은 크게 물냉면인 평양냉면과 비빔 냉면인 함흥냉면으로 나뉜다. 함흥냉면이 감자나 고구마 전분이 주재료라 쫄깃하고 질기다면, 평양냉면은 메밀이 주재료라 잘 끊어진다. 그래서 밀가루와 적당한 비율로 섞기 시작했다. 원래 평양냉면은 가위가 필요 없다.

(문 닫기 전의 을지면옥 복도. 손님들이 대기의자에 앉아 을지로의 옛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촬영=고석배 기자) 

평양에는 ‘평양냉면’이 있어도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다. 해방 후 평안도 피난민들에 의해 ‘평양냉면’이 유행하면서 함경도 사람들도 고향의 농마면(회국수)을 ‘함흥냉면’이라 명명했다. 을지면옥의 시작은 1-4 후퇴 때 월남한 김경필 씨 부부에서부터 시작 된다. 평안도 피난민 부부는 1969년 경기도 연천에 '의정부 평양냉면'을 개업했다. 정통 평양냉면으로 소문나 맛집으로 유명세를 타다 1985년부터 첫째 딸은 중구 필동에 ‘필동면옥’을 세웠고, 둘째 딸이 세운 곳이 ‘을지면옥’이다.

냉면에 빨간 고춧가루와 파가 올라온 게 특징인 을지면옥은 37년간 한자리에서 변함없는 음식 맛을 간직하였다. 너무 강하지 않은 슴슴한 육향과 메밀향이 가득한 육수, 메밀과 밀을 섞어 탱탱하면서도 잘 끊기는 가는 면발은 을지면옥 냉면의 상징이었다.

(냉면에 파와 고춧가루가 올라간 을지면옥 냉면. 촬영=고석배 기자)

을지면옥이 자리한 세운지구 3-2구역에 대한 재개발 사업은 2017년 4월 시행사가 사업시행 인가받으면서 본격화됐다. 2018년 박원순 전 시장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을지면옥을 강제로 철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때 사업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1년 뒤 서울시가 을지면옥을 철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지만, 을지면옥은 시행사와 소송전을 벌이며 같은 3-2지구의 ‘안성집’, ‘을지다방’ 그리고 '대진정밀' 등의 노포들이 문을 닫는 와중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병원으로 지어진 대진정밀 건물. 사진=리슨투더시티 제공)  

그러다 6.1 지방선거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 재개발 사업이 탄력을 받으면서 법원은 1심을 뒤엎고 시행사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은 을지면옥이 시행사에 건물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송전에 지친 을지면옥은 가처분 소송 결과와 별개로 아직 건물인도 본안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당분간 영업을 이어가지 않겠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건물을 떠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6월 25일, 을지면옥 마지막 영업일에 줄서 있는 손님들. 사진=뉴시스 제공) 

"그동안 돈 벌어서 건물도 못 사고 뭐 했느냐“는 을지면옥이 재개발에 반대하고 버티면서 가장 많이 들은 악성 댓글 중 하나이다. 얼마전 강제집행 당한 ‘을지OB베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을지면옥은 세입자인 ‘을지OB베어’와 또 경우가 다르다. 을지면옥은 100평 넘는 건물의 실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주상복합으로 재개발 되는 을지면옥. 사진=리슨투더시티 제공)

하지만 재개발 때문에 시행사에 의해 밀려났다. 우리나라 재개발은 민간 시행사가 개발부지 75%를 사면 나머지 25%는 공시지가에 헐값 강제 수용 가능하다. 즉 우리나라 부동산 개발은 ‘을지OB베어’ 강제철거의 정당성으로 자주 인용하는 ‘시장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소수의 기획부동산 업자들과 건설사가 유리하다. 세입자뿐이 아니라 건물주도 수월하게 포기할 수 있도록 고안된 법이 현재 개발법이고 행정이다.

이 개발법은 세계적인 스타 BTS도 막을 수 없었다. 인기 TV프로 런닝맨과 해방타운 촬영지이면서 2020년 BTS가 시즌 그리팅 촬영장소로 핫플레이스가 된 을지다방도 결국 문을 닫았다. 을지면옥의 2층에 자리한 을지다방은 전 세계의 아미들이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명소였다.

(BTS 사진이 걸려 있던 을지다방 내부 벽과 을지다방의 명물 쌍화차. 사진=리슨투더시티. 편집=고석배 기자)

‘을지면옥’과 ‘을지다방’뿐 아니라 최근 2년 동안 을지로의 수 많은 노포들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병원으로 세워진 대진정밀 건물부터, 청계천 기술 노동자들의 500CC 한 잔의 애환을 간직한 ‘을지OB베어’, ‘갯마을 횟집’, 수표동의 전 맛집으로 30년 간 사랑 받았던 ‘원조녹두’, ‘전주집’, ‘동원집’도 사라졌다. 시한부 선고를 받아 앞으로 사라지게 될 노포도 즐비하다. 재개발이 예정된 3-3구역의 '안동장', 3-8구역에는 '통일집', '조선옥' 등이 마지막 영업일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구역에 대해서는 지난해 11월 사업시행계획 인가 이후 계획 수립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 폐업한 전주집과 원조녹두. 사진=리슨투더시티 제공) 

6월 25일 을지면옥의 마지막 맛을 기억하기 위해 문 열기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을지면옥은 “그동안 저희 을지면옥을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는 글을 입구에 걸어두고 고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26일 매장의 시설물을 철거했다.

( 사진=뉴시스 제공)

 아직 장소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을지면옥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 이전할 계획이다. 지방에서부터 올라와 긴 줄을 기다리며 을지면옥을 찾은 어느 냉면 마니아는 이렇게 글을 남기기도 했다.

끄덕여지는 육수, 메밀면
꼬들한 편육, 쫄깃한 수육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장사를 시작해도
같은 음식일 수 없기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아내와 마지막 을지면옥의 가는 길을
함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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