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㊹] 지리산 ‘화대 종주’를 꿈꾸며 27. 제비가 노닐던 지리산의 명당, 연곡사(鷰谷寺)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12.18 14:52
  • 수정 2023.12.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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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산길
거치적거리는 것 없어 편안하고
외로움은 따라와서 나를 더욱 살갑게 한다
내 눈에 뛰어드는 우리나라
안개 걷힌 산골짜기 모두청학동이어서
발길 머물고 그냥 살고 싶어라
- 가는 길 모두가 청학동이다, 이성부

지리산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마을.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마을.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지리산,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 설악산이나 북한산처럼 암산(巖山)이 아니라 흙산으로 아가의 둔부같이 부드럽게 뻗어 나간 능선이 편안한 산, 그러나 그 산 앞에 서면 일단 그 크기에 압도된다.

그 장엄한 산 앞에서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일단 자신이 왜소해지며, ‘나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떠오른다. 골, 골, 마다 구름 쌓인 그 산속 어딘가에 선경이 펼쳐지고, 굳이 청학동이 아니더라도 신선들이 노닐 것만 같다.

100리 길이 넘은 46km쯤의 기나긴 능선길, 어느 꽃 피는 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쉬엄쉬엄 유람(遊覽)을 떠나도 좋을 것이다.

청학동이라는 데가 정말 이곳인지
저 건너 등성이 넘어 악양골인지
최고운(崔孤雲)이 사라진 뒤 청학 한 마리
맴돌다 가버렸다는 불일폭포 언저리인지
피밭골 계곡인지 세석고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옛사람들이 점지해 놓은 청학동 저마다 달라도
내가 걸어 찾아가는 곳마다 숨어 살만한 곳
그러므로 모두 청학동이다
혼자 가는 산길
거치적거리는 것 없어 편안하고
외로움은 따라와서 나를 더욱 살갑게 한다
내 눈에 뛰어드는 우리나라
안개 걷힌 산골짜기 모두 청학동이어서
발길 머물고 그냥 살고 싶어라
- 가는 길 모두가 청학동이다, 이성부

이 산하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들. 촬영=윤재훈 기자
이 산하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들. 촬영=윤재훈 기자

봄날 구례에서 곡성으로 섬진강 따라가는 농로(農路) 같은 기찻길, 강 건너 지리산 기슭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 나는 계절, 나는 그중에서도 우리 한국의 산하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란 색의 개나리와 연분홍의 진달래 꽃빛이 좋다.

우리 산하에 지천으로 피어나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순정(純情)한 그 빛깔이, 영희와 순이의 저고리와 치마 빛을 쏙 빼 닮은 그 색감이. 쑥이나 냉이 한 바구니 캐어 언덕길을 내려오던 우리 산하의 어머니를 닮았다.

“늘 그리운 고향 같다.”

입춘이면 풀리기 시작하는 섬진강의 물소리처럼, 밤이면 돌, 돌, 실을 감던 어머니의 실타래처럼, 기차는 그렇게 섬진강 변을 달려간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섬진강1’, 김용택

굽이치는 지리산 능선들. 촬영=윤재훈 기자
굽이치는 지리산 능선들. 촬영=윤재훈 기자

남쪽 지역, 구례를 중심으로 대찰들이 몰려있다. 그 옛날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인도의 고승들이 세운 사찰들도 더러 있다. 해 저물 무렵 그 산기슭을 따라 걷노라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범종 소리, 천지를 아련하게 몰고 가고, 마을에서 올라오던 밥 짓는 연기, 개 짖는 소리, 까치밥으로 남겨 놓았던 가을 하늘 속 그 붉던 홍시,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사면불. 촬영=윤재훈 기자
사면불. 촬영=윤재훈 기자

그 산에는 800여 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 등이 어울려 살고 있다. 그래서 1967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산에는 사찰이 많은 만큼 국보와 보물들이 많은데, 오늘은 그중에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 연곡사(鷰谷寺)를 오른다.

이 자리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처음 절터를 잡을 때 소용돌이치는 물에 제비가 노는 것을 보고 연곡사(鷰谷寺)라 이름 지었다.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의 연기 조사가 화엄사와 같은 해에 창건하였다. 1598년 왜적이 사찰에 들어와 살육을 자행하고 불을 질러 소실된 것을 소요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한다.

연곡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선종 사찰로 번성하였고, 도선 국사, 현각 선사, 진정 국사, 영관 선사, 소요 대사 등 덕망 높은 훌륭한 승려들이 주석(駐錫)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나, 1907년에 연곡사가 항일 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다시 전소되었고, 1924년에 소규모로 중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중건되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을 승탑이라고 한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때문인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승탑들과 비가 여러 개 있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nbsp;ⓒ게티이미지뱅크<br>
구례 연곡사 동 승탑. ⓒ게티이미지뱅크

그중 연곡사 동쪽 기슭에는 통일신라 시대 석조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1962년 국보 53호로 지정된, ‘연곡사 동 승탑’이 있다.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 승탑은 탑주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나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844년)과,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868년)으로 완성된 통일신라 팔각원당형 양식을 계승한 수작이다.

또한 사천왕, 향로, 목조건축의 요소 등이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기단과 탑신의 비례도 적당하여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어, 통일 신라 시대의 조각사, 건축사, 공예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그 전면에는 1963년에 보물 153호로 지정된 ‘연곡사 동승 탑비’가 있는데, 도선 국사의 것이라고도 하나 모든 것이 지워지고 비신도 남아 있지 않아, 탑주(塔主)를 알 수가 없다.

연곡사 북 승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연곡사 북 승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동 승탑과 같은 해에 국보 54호로 지정된 ‘연곡사 북 승탑’은,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있다. 북 승탑은 그중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난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등을 꾸며놓았다. 머리 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만들어졌지만 북 승탑은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연곡사 소요대사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연곡사 소요대사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여기에 조선 후기 승려 소요 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부도)이며, 1963년 보물 제 154호로 지정된 ‘연곡사 소요대사탑’이 있다.

탑 몸체에는 주인과 연대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의 수법이 세련되지는 못하다.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대사의 시는 그 느낌이 담백하다.

저잣거리 붉은 먼지 한 자나 깊어
하고 많은 벼슬아치 뜨락에 넘실대
누가 알랴 한 조각 구름 덮힌 이 골짜기
가난한 중에게 하늘이 준 만금의 가치를!

- 소요대사 산중회(山中懷)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연곡사에는 고승들의 탑비가 여럿 있는데, 보물 제152호로 지정된 ‘연곡사 현각 선사 탑비’는, 고려 전기 승려 현각 선사를 기리기 위해 경종 4년(979)에 건립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비문은 학사 왕융(王融)이 짓고, 글씨는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쓴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비의 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몸체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 거북은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이 큼직하며, 수염이 달린 용머리를 하고 있어 아주 웅장해 보인다.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현재의 탑비는 귀부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조각난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연곡사 삼층석탑. ⓒ게티이미지뱅크<br>
연곡사 삼층석탑. ⓒ게티이미지뱅크

1963년 보물 151호로 지정된 ‘연곡사 삼층석탑’의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후기 쯤으로 짐작된다.

세월의 덧깨가 내려앉은 화강암 석탑은 위에 있는 기단이 매우 넓어졌으며, 그에 반하여 탑신부는 줄어든 느낌이 있다. 맨 아래 기단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이 온화하며 안정감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탑이, 절 마당을 수백 년 동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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