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㊸] 지리산 ‘화대 종주’를 꿈꾸며 26..황제를 가르치는 지리산의 국보, ‘각황전(覺皇殿)’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12.13 17:28
  • 수정 2023.12.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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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 것이며, 
법을 등불로 여기고 의지하라."

-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국보, 각황전. 촬영=윤재훈
국보, 각황전. 촬영=윤재훈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는 말이 저절로 이해될 것 같은 2층의 팔작지붕 기와집, 그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진다. 뜨락은 고요하고 부처님의 갈비뼈 같은 빗살무늬가 마당에 선명하게 보일 것만 것 같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입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각황전(覺皇殿)’은 한국 화엄종의 중심도량이다.

사방에 화엄경 80권을 돌아 새긴 석경을 장식했으나, 정유재란 때 이 땅의 정기를 끊으려고 했는지, 왜놈들의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

여수의 진남관(鎭南館), 충무의 세병관(洗兵館)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 국보 67호 ‘각황전’, 그 크기와 엄숙미에서 여행자를 압도한다. 지리산 품에 안겨 고요하게 흘러내리는 자태가, 보살의 서늘한 어깨선 같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숙연해지고 통층으로 연결되어 서늘한 기운마저 감돈다.

각황전(覺皇殿), 황제를 깨우치게 하는 건물. 원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이 건물이 소실된 뒤 숙종 5년인 1699년에 벽암 스님의 명을 받은 계파선사가 중건하여 각황전으로 고쳤는데, 거기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흘러 내려오고 있다.

보물, 대웅전, 촬영=윤재훈
보물, 대웅전, 촬영=윤재훈

큰 스님의 명을 받아 재건을 고심하던 스님은 현재 보물 299호로 지정된 현 대웅전에서 100명의 스님에게 백 일 기도를 올리게 하고, 자신이 중건 불사의 성취의 위해 기도승들을 시봉하는 공양주를 자원했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밥을 짓고 물을 길어 공양했다. 이윽고 백 일 기도가 끝나는 날에 한 노장 스님이,

간밤의 꿈에 하얀 노인(文殊大聖)이 나타나 장육전 중건을 위한 화주승(化主僧, 시주를 하여 절의 양식을 대는 승려)은,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 손에 묻지 않는 사람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고 하였다. 이에 산 내의 모든 스님이 모여 차례로 손을 물에 넣었다가 밀가루를 만지는데, 한 사람도 묻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공양주만 했던 계파스님이 만지자 신기하게도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

스님은 태산 같은 걱정에 밤새 대웅전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한 노인이 나타나, 

내일 아침 길을 떠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시주를 권하라.

고 하였다.

쌍계사 전설이 서린 우물. 촬영=윤재훈
쌍계사 전설이 서린 우물. 촬영=윤재훈

스님은 날이 새기가 무섭게 산문을 나서 동구 쪽으로 가다가 뜻밖에 마주친 사람은 이 고을 일대를 떠돌아다니는 걸인 노파였다. 스님은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으므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지만, 문수보살의 깨우침을 생각하며 간곡하게 시주를 요청했다.

당장 먹을 쌀 한 톨도 없는 걸인 노파는 시주 간청에 한동안 멍하니 서서 하늘만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스님도 몹시 가슴은 아파 왔지만, 노파는 자신에게 시주 간청을 한 것에 오히려 감동이라도 한 듯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이 죽어 궁궐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 대성은 가피(加被)를 내리소서.

하고는 그 옆에 있는 커다란 늪에 몸을 던졌다. 이 모습을 본 계파스님은 너무 놀라 그 길로 6년 걸식을 하며 한양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창덕궁 앞을 지나다 나이 어린 공주와 마주쳤다. 그 공주는 어릴 때부터 어쩐 일인지 손을 꼭 쥐고 펴지 않았는데, 무척 반가워하며 달려와 활짝 손을 폈다. 그런데 장육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공주가 손을 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숙종은 너무나 반가워 대궐로 스님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공주의 손바닥에 써진 글자의 내력을 듣고는 크게 감동하여 왕명으로 장육전을 중건하게 하였다.

우리나라 3대 석등 중의 하나. 촬영=윤재훈
우리나라 3대 석등 중의 하나. 촬영=윤재훈

마침내 건물이 완공되자 ‘대왕을 깨우쳐 보전을 중건’하였다고 하여 각황전이라고 이름을 고치게 했다. 또한 어느 날 이 건물의 추녀 공사를 하다가 한 목수가 발을 잘못 디뎌 떨어졌는데, 마침 그 아래를 지나가던 메주라는 힘센 스님이 덥석 받아 냈다고 한다.

각황전 안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영험함을 믿는 사람들로 기도객이 붐빈다. 오래도록 지리산 중에 남아 미몽(迷夢)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우쳐주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각황전 바로 앞에는 반쯤 남은 석등이 세월의 연륜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12호이다. 대 주위로는 우담발라의 꽃잎인가, 아직도 선명하다.

통일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 조사가 조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3대 석등 중의 하나이며 최대의 석등으로, 높이가 6.36m이다. 석등의 형태는 3천 년 만에 한 번 핀다고 하는 우담발라화의 꽃잎인데, 이 꽃은 부처님 오심이 지극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8장의 꽃잎은 ‘정견(正見),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명(正命), 정업(正業), 정어(正語), 정사유(正思惟), 정정(正定)“의 8정도를 나타내고, 불이 들어오는 창 네 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와 부처님의 광명을 나타내며, 북은 진리의 소리이다.

8정도를 수행하여, 사성제의 진리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높이고,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의 등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 것이며,

법을 등불로 여기고 의지하라"

화엄사 4사자탑. 촬영=윤재훈
화엄사 4사자탑. 촬영=윤재훈

석등은 곧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고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사진에서는 온전한 모습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현재 각황전 앞에는 그 아랫도리 부분만 남아있다. 또한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같은 지면에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쓰여 있다.

‘원통전 앞 사자탑’은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탑으로 3m의 높이로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방형석 주위의 상부가 평평하여 노주(露柱)라고도 부른다.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1963년 보물 300호로 지정되었다.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위층 기단을 만든 것은 화엄사에 있는 국보 35호인 사사자 삼층석탑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각 수법은 이에 못미처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 오층 석탑. 촬영=윤재훈
동 오층 석탑. 촬영=윤재훈

화엄사 대웅전 앞마당 좌우에는 보물로 지정된,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된 해와 같은 1963년이다.

이중 동 오층 석탑은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132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오층석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하지만, 동 오층 석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단정하다. 어쩌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는 듯도 하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단인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올려놓았다.

이 탑은 일반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 2단 기단인 데 비해 1단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 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서오층 석탑. 촬영=윤재훈
서오층 석탑. 촬영=윤재훈

 

역시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서 오층 석탑은 동탑과 달리 이중기단 형식이며 하층 기단부터 초층 탑신에 걸쳐 조각상이 가득하다. 탑의 양식이나 조각상의 수법으로 볼 때 역시 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동탑과는 달리 이중기단이며 하층기단면석, 상층기단면석, 초층탑신에 걸쳐 신장상을 조각하여 화려한 모습이다.

이 석탑은 1995년 8월에서 9월에 걸쳐 완전 해체 수리했는데, 그때 1층 탑신 상면 사리공에서 청자병, 청동합, 수정옥, 불사리 22과, 백지묵서다라니경과 탑을 찍은 종이 등 8종 30여 점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또한 상층 기단부 내에서도 소탑, 청동제불상틀, 수자, 칼 등 8종 4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어 불탑 내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로써는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특히 청동제불상틀은 소형 토불(土佛)의 틀로 9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어 이 탑의 제작 시기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 사리장엄구들은 2002년 보물로 지정되어 화엄사에 보관되어 있다.

상하층 기단부와 초층탑신에 새겨진 부조상을 통해 당시 불교도상의 변천과 조각수법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탑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사리장엄구와 불상틀, 종이편은 신라 시대의 조탑술과 사리 봉안 방식, 인쇄술 등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4사자3층 석탑과 연기조사의 석등. 촬영=윤재훈
4사자3층 석탑과 연기조사의 석등. 촬영=윤재훈

이제 각황전 옆 동백꽃 숲의 향기를 따라 제법 높이 계단을 오르면 321년의 세월을 견딘 ‘4사자 3층 석탑’이 나온다. 5.5m의 높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1962년 국보 35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추앙하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다.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서 있는 사람이 있다.

이는 비구니가 된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바로 앞 석등 안에 꿇어앉은 사람은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인데,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또한 연기의 지극한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도 부른다.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사자들은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의 석사자상을 연상시킨다.

조각 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8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신라 시대 사자 석탑으로는 유일하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 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입구에는 수령 300여 년의 올벚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누군가는,
‘마음의 눈을 뜨면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피안으로 인도한다.’

는 뜻으로 벽암 선사가 심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무기 재료로 쓰기 위하여 심게 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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