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㊷] 지리산 ‘화대 종주’를 꿈꾸며 25..지리산이 품은 국보와 보물들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12.11 10:49
  • 수정 2023.12.1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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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인연과 물욕을 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오직 나와의 철저한 무문관(無門關) 싸움에서,
덧없는 몸을 조복(調伏) 받아
궁극적으로 성불을 이루고자 들어간 것 아닌가.

루앙 푸라방, 테라와다 사찰. 촬영=윤재훈 기자
루앙 푸라방, 테라와다 사찰.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싯다르타 부처님이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법이 양 나래를 펴고 남방과 북방으로 흘러갔다.

남방으로 흘러간 법은 미얀마와 타일랜드,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을 흘러가며 ‘소승불교, 히나야나, 테라와다불교, 부파불교, 상좌부불교, 고대불교’라는 이름들로 변해갔다.

누런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광활한 중국으로 흘러간 법은 그 거친 땅 위에서 우담바라를 피웠다. 그리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아름다운 동방의 나라라고 예찬했던 이 땅을 지나, 현해탄 건너 미개(未開)했던 섬나라, 일본으로 들어가 ‘대승불교, 마하야니’라고 이름 지워졌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 동방의 등불’, 타 고 르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서 길 잃지 않고’ 곧장 도보다리를 넘어 압록강 변까지 같으면 좋겠다. 새들이 허공의 경계를 허물 듯이, 우리도 총부리를 거두고 땅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여 내재율과 외형률의 완벽한 조합으로 이 땅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일본에 본부가 있는 국제 창가학회 제3대 회장 이께다 다이사쿠 씨도 ”한국은 백제 시대부터 우리에게 문명을 전해준, 문화 대은(大恩)의 나라“ 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찬탄하였다. 여기에 1대 회장 마키구치 씨는 일본 군국주의 사상과 태평양 전쟁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고, 이 때문에 치안유지법과 불경죄로 구속되어 1944년 옥사까지 하였다.

수덕사 보살님. 촬영=윤재훈 기자
수덕사 보살님. 촬영=윤재훈 기자

이 두 법은 이름에서 어떤 우열이 없으며 오히려 고대의 전통을 그나마 지키고 있는 동남아의 국가의 불교와 승려들을 보면, 오히려 숙연해질 때가 있다. 지금 한국 불교의 민낯을 보면 정말 불자로서 부끄러움이 앞선다.

세상의 모든 인연과 물욕을 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오직 나와의 철저한 무문관(無門關) 싸움에서, 
덧없는 몸을 조복(調伏) 받아
궁극적으로 성불을 이루고자 들어간 것 아닌가.

이 땅의 대승불교 승려라면,
세상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기 전에는 나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상좌부 불교 부처님들. 촬영=윤재훈 기자
상좌부 불교 부처님들. 촬영=윤재훈 기자

그런데 요즘 항간에 떠도는 저런 ‘소신공양’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일반인이 보아도 부끄러운 일이다. 4세기 후반 삼국으로 불교가 들어와 찬란한 전통을 이어온 한국불교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신라 시대 이차돈의 순교도 아니고 소중한 국가 자산인 사찰을 자신의 몸뚱이 태우는 데에, 거리낌 없이 바치는 승려가 어디에 있는가. 저 불사들은 이른 새벽 언 손을 호, 호, 불며 새벽 시장에 나가, 한 푼 두 푼 모아 바친 어머니와 할머니의 소중한 공양도, 들어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돈 한 푼 번 적이 없는 스님들이 무슨 돈이 많아 2억씩이나 되는 돈을 과잣값 내는 듯 내라고 하는가. 무슨 조폭 조직도 아니고 말이다.

국민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이다. 얼마 전에 일어난 봉은사 승들의 폭력 사태나 조계종 인도탁발 행렬을 보면, 타국에까지 나간 한국 불교의 현실 앞에 크나큰 부끄러움이 앞선다. 아예 부끄러움을 상실한 권력 같다. 

거기에 자신의 알량한 자리보전과 조그만 이득을 위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스님과 교수, 학자들까지 보면,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한국 조계종의 미래가 있는가, 아득할 뿐이다.

루앙 푸라방, 아침 탁발. 촬영=윤재훈 기자
루앙 푸라방, 아침 탁발. 촬영=윤재훈 기자

아직도 이른 새벽 대부분 국민이 가장 깨끗한 양식으로 밥과 찬을 짓고 과일과 과자까지 준비하여, 맨발로 무리 지어 오는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진다.

아직도 골목마다 왓(사찰)이 있어 마을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하고, 그 옛날에는 학교와 병원 기능까지 했다고 하니 성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린아이들이 머리를 깎고
주황색 짙은 승복에 인생의 무게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견디는 모습은, 과연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저절로 되새기게 한다.

소승불교 부처님들. 촬영=윤재훈 기자
소승불교 부처님들. 촬영=윤재훈 기자

왕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이 한 번은 출가하는 나라, 7번까지는 승속(僧俗)을 왕래할 수 있는 국가, 우리나라처럼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물질이 많은 스님이 아니라, 걸망 하나 매고 전국의 산천을 찾아다니며 텐트를 치고 10일씩, 20일씩 모여서 집중수행을 하는 곳. 아직도 큰 스님 앞에서는 왕도 무릎을 꿇는 나라. 그 힘으로 아직 국교로 유지되어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한국 불교의 미래가 대웅전 대들보의 꼬인 실타래 같다. 촬영=윤재훈 기자
한국 불교의 미래가 대웅전 대들보의 꼬인 실타래 같다. 촬영=윤재훈 기자

석호 장군이란 분이 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그만 호랑이에게 어머니가 잡아먹혔다.

원한이 사무친 석호는 온 산을 떠돌며 호랑이를 찾았다. 수많은 날 산속을 헤매다 드디어 호랑이를 발견하였다.

석호는 온 정신을 집중시켜 화살 한 발로 호랑이를 잡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돌 가운데 화살이 박혀있었다.

수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임제종을 세운 임제 스님도 돈오돈수라 하지 않았을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사람들 사이에 오랜 논쟁거리이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한국 선승의 맥을 잇고 있는 경허 스님도 무문관에서 턱 밑에 송곳을 세우고, 수행의 열도를 높였다고 하지 않는가.

321년의 세월을 견딘 화엄사 각황전. 촬영=윤재훈 기자
321년의 세월을 견딘 화엄사 각황전.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 자락에는 오래된 대가람들이 많은데, 인도에서 온 스님들이 세운 곳들이 여러 군데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태어나 오랜 세월 중국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의 산하에는 아직 도력이나 수행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지리산의 대표적인 가람인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의 창건연대와 인물에 대해서도 이견들이 많다.

중관대사(中觀大師) 해안(海眼, 1567~?)이 쓴 글을 보면, ‘544년(신라 진흥왕 5, 백제 성왕 22)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한다.

또한 ‘구례속지(求禮續誌)’에도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쓰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오고 있었다.

국보 67호, 각황전. 촬영=윤재훈 기자
국보 67호, 각황전. 촬영=윤재훈 기자

그런데 이런 의문이 1978년에 신라 경덕왕 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 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 시켰던 실존 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연대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신라 제24대 왕) 때가 아닌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 제35대 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다만, 8세기보다 앞선 어느 시기부터 이 터에 가람이 있었고 그것이 연기조사 대에 이르러 대가람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3대 목조건물 중에 하나로 1962년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화엄사 각황전이 세월의 덧깨를 고스란히 안은 채 서 있는데,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세월의 무게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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