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㉙] 지리산 ‘화대(華大) 종주’를 꿈꾸며12...지리산에 어린 조광조의 스승, 김종직의 위대한 기상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9.07 15:03
  • 수정 2023.09.11 15: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속의 일을 생각해 보니 한결같이 아련하고
눈앞에 생생한 그해 일을 기억해 보노라.

대나무 뜰 맑은 바람, 스님 만나 이야기 나누고
풀 부드러운 양지 언덕에서 사슴과 함께 잤도다.
- ‘산속을 생각하며’, 이색(李穡)

지리산의 마루금. 촬영=윤재훈
지리산의 마루금.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품에 안기는 포산(抱山)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인간은 산에 지혜를 닮고자 했고, 공자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고 했다. 산에 대한 이러한 염원들이 명산 유람을 갈구하게 하였고, 그 오랜 염원 끝에 이루어진 산행기록이 바로 ‘유산록(遊山錄)’이다. 이런 ‘유람록(遊覽錄)’들은 ‘유기(遊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문헌상에 유산록이라는 말이 나타난 것은 고려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산(遊山)’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국토 인식이 고조되고 감식안(鑑識眼)이 높아가던 조선 초기, 전국의 명산이 유람 대상지로 부상하면서 기록으로 남기려는 지식인의 욕구가 더해져 많은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유산(遊山)’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더욱 성행하였다. 이는 지리산도 예외가 아니었고 현재까지 발굴된 유람록은 100여 편이 있으며, 유산시(遊山詩)도 수천 편에 이른다.

이러한 지리산 유람록은 많은 수가 출간되었고, 유산시는 장편 시와 연작시를 중심으로 번역 및 출간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듯 국내의 명산 가운데 유산록을 완역하여 대중화된 것은 지리산이 최초라고 한다. 더구나 유산록 완역과 함께 전문 연구를 병행한 명산도 지리산이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지리산 운해. 촬영=윤재훈
지리산 운해.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산신신앙(山神信仰)이 발아된 곳이기도 하며, 다양한 불교문화를 꽃피워졌다. 고대에는 대가야문화의 중심지이자 백제와 신라의 문화가 만나는 접경지였고, 민족의 비극인 빨치산과 항일의병 등 반목과 융합을 반복하는 이념적 갈등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 산자락에는 수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키며 살아왔는데, 동쪽에는 산청군과 진주시, 남쪽에는 하동군, 북쪽에는 함양군과 남원시가 있다. 그리고 많은 유가(儒家) 지식인이 일찍부터 지리산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대부분 유람록은 그들에게서 나왔다.

지리산 숲. 촬영=윤재훈
지리산 숲. 촬영=윤재훈 기자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의 목적지는 천왕봉과 청학동(靑鶴洞)으로 생각하였나 보다. 어느 시절이라고 하, 수상한 나날이 없었겠는가마는, 그 시절의 문인들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오는 불편한 심기들을 달래기 위해, 청학동 일대를 지리산 속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유람하였다.

공자(孔子)가,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 (登泰山 小天下)’고 한 그 경지를 체득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 김종직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 김종직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그는 고려 말 이색에서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로 이어온 학통을 이어받은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수학하여, 영남학맥(嶺南學脈)의 종조(宗祖)가 된다. 그리고 절의를 중요시하는 조선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ᄒᆞ되 人傑(인걸)은 간듸업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ᄭᅮᆷ이런가 ᄒᆞ노라.”

-‘오백 년 도읍지를’, 야은, 길재

 

“興亡(흥망)이 有數(유수)ᄒᆞ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로다

五百年(오백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쳐시니

夕陽(석양)에 지나ᄂᆞᆫ 客(객)이 눈물 계워 ᄒᆞᄃᆞ라.”

-‘흥망이 유수하니’, 원천석

연산 시절 왕가의 역린(逆鱗)인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조의 제문’의 저자이기도 한 김종직의 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유호인, 조위 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올리고 결국 스승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경상남도 함양군에 거주하거나, 함양군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문인들이다.

산에 들면, 하루 세 끼면 족하다. 촬영=윤재훈
산에 들면, 하루 세 끼면 족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황제인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의제는 숙부인 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강물에 던져졌는데, 그는 이 고사를 인용해 단종의 죽음을 조문하는 글을 쓴 것이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에서 꿈에서 만난 의제를 통해 단종의 죽음이 누구 때문인지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다.

정축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신령(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나타나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말하고는 문득 사라졌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훨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라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만물의 법칙을 마련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하늘ㆍ땅ㆍ도(道)ㆍ임금의 네 가지 큰 근본(四大)과 인ㆍ의ㆍ예ㆍ지ㆍ신(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 윤리(五倫)를 높일 줄 모르겠는가.

그 법도가 어찌 중화에는 풍부하지만 동이에는 부족하며,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천 년 뒤의 동이 사람이지만 삼가 초회왕을 조문한다.

끝내 배신한 항우에게 시해당했으니, 하늘의 운세가 크게 어그러졌다. 침강의 산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았지만 햇빛은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지만 넘실넘실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끝이 없듯 한(恨)도 어찌 다하리오. 회왕의 혼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는구나.

내 충성된 마음은 쇠와 돌도 뚫을 만큼 굳세기에 회왕이 지금 홀연히 내 꿈에 나타났다. 주자(朱子)의 원숙한 필법을 따라 떨리는 마음을 공손히 가라앉히며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제사하노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1498) 7월 17일

 

권력은 저 산의 구름과 같다. 촬영=윤재훈
권력은 저 산의 구름과 같다. 촬영=윤재훈 기자

김종직이 꿈을 꾸었다는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죽임을 당한 때이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했다고 되어 있지만 숙종실록에는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날이 정축년인 1457년(세조 3) 10월 21일이었다. 조의제문의 의제(義帝)는 중국 초나라 회왕의 후손으로 이름은 심(心)이었다.

회왕의 손자 심은 기원전 208년 항량(項梁)과 항우(項羽)가 초(楚)를 다시 세운 뒤에 회왕(懷王)이라는 칭호로 옹립하였고, 이후 항우가 회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고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뒤 자신을 서초 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한다.

이때 회왕의 이름도 의제(義帝)로 개칭되었다. 김종직이 의제에게 바친 글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단종에게 올리는 글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김종직은 회왕이 홀연히 꿈에 나타난 이유를 자신의 충성스러운 마음에서라고 밝히며, 자신의 떨리는 마음을 주자(朱子)의 필법, 즉 성리학의 도로 가라앉히며 의제에게 술잔을 올리며 제를 드린다는 글로 조문을 마감한다.

단종의 죽임을 듣고 자신의 떨리는 마음을 성리학의 도로 비판하며 제문을 짓는 것이 단종에 대한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허균은 “조의제문을 지었으면 세조 치세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서슬 퍼런 세조의 칼날 앞에 상소를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말을 하거나 글을 짓는 것도 금기시된 시대, 그런 시대 상황에서 김종직이 남긴 조의제문은 선비들이 하고자 한 말을 대변하고 있었고 이미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는데, 이 시대에는 그런 관료들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런 김종직의 사상은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 1482~1519)에게 학통이 계승되면서, 김종직은 사림파(士林派)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의 제자들은 연산시대 삭탈관직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따라서 김종직의 역사적 입지와 학자로서의 위상은 함양군수 시절 형성된 문인들로 그려지며, 지리산 유람이 그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산속의 일을 생각해 보니 한결같이 아련하고
눈앞에 생생한 그해 일을 기억해 보노라.
대나무 뜰 맑은 바람, 스님 만나 이야기 나누고
풀 부드러운 양지 언덕에서 사슴과 함께 잤도다.


자색 퉁소 다 불고 나니 가을 풍경 멀어지고
책 읽기를 다하자, 한낮이 지나갔도다.
오늘처럼 세속에서 눈이 어두워지면
내 마음은 까닭 없이 온갖 근심에 애가 탄다.

回首山中一 然(회수산중일망연)
分明眼底記當年(분명안저기당년)
風淸竹逢僧話(풍청죽원봉승화)
草軟陽坡共鹿眠(초연양파공록면)


吹徹紫簫秋景(취철자소추경원)
讀殘黃卷午遷(독잔황권오음천)
如今 目紅塵暗(여금미목홍진암)
方寸無端百慮煎(방촌무단백려전)
        - ‘산속을 생각하며’, 이색(李穡)

천왕봉 쪽에서 바라본 반야봉. 촬영=윤재훈
천왕봉 쪽에서 바라본 반야봉. 촬영=윤재훈 기자

김종직은 불혹의 나이인 40세(1471년)의 꽃 피는 봄, 함양군수로 부임하고 이듬해(1472년) 8월 14일~1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한다. 오랜 그의 염원이었다. 부임한 후에도 그는 눈을 뜨면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리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흉년 때문에 엄두를 못 내다가 명절 연휴를 빌미로 떠났다. 이 유람에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유호인을 비롯해 조위(曺偉, 1454~1503), 한인효(韓仁孝), 해공(解空)과 함께였다. 유호인은 이 지역 출신이고, 조위는 처남이며, 나머지 두 사람도 함양에서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눈 속, 천왕봉. 촬영=윤재훈
눈 속, 천왕봉. 촬영=윤재훈 기자

일행은 유람 이틀째 되는 보름날 저녁 천왕봉에 올랐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일행은 일출을 보기 위해 그날 밤 천왕봉 곁에 있는 성모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날씨가 개지 않아 일출을 보지 못했다.

16일 날에는 비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할 수 없이 세석평전 인근에 있던 향적사(香積寺)로 내려와 하루를 더 묵었다. 다행히 그날 저녁에 날이 개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녘 다시 천왕봉에 올라서 일출을 보았다. 김종직은 천왕봉 정상에서 맑은 일출을 보며,

저는 일찍이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관찰하신 것과 한유(韓愈)가 형산(衡山)을 유람한 뜻을 흠모하였지만, 관직에 매인 몸인지라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가을 남쪽 경내의 농사를 둘러보던 중 우뚝한 봉우리를 우러러보고 간절한 마음이 절실하였습니다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