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㉚] 지리산 ‘화대(華大) 종주’를 꿈꾸며13...지리산과 조선의 선비들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9.11 15:20
  • 수정 2023.09.1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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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악이 중원을 진압하고 있으나
동쪽 태산이 그중 뭇 산의 조종이라
어찌 알았으리, 발해 너머 삼한 땅에
이처럼 웅장한 두류산이 또 있을 줄
- ‘중국 오악이 중원을 진압하고’ 김종직

지리산 폭설,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 폭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지리산은 그 품이 너른 만큼, 많은 민초들이 살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산 아래 살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비들이야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이따금 찾아들지만, 민초들은 그곳이 삶의 터전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그 시절 우리 민족들의 신앙이나, 생활상의 단면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그 시절에도 대성계곡 주변으로 많은 기도객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쌍계사라는 명찰이 있고 숨어있는 기도터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김종직은 천왕봉이나 세석, 영신사 일대에 본 재미있는 사실까지 기록해 놓았는데, 먼저 천왕봉의 성모 석상이 농염하게 화장된 것과, 두 번째로는 대성계곡의 영신사에서 숯불로 돌부처의 팔을 지져 소망을 빌었다는 사실, 그리고 세석고원에서 영신사로 내려가면서 보라매를 잡는 사냥꾼의 고난을 이야기한다.

성모 사당은 3간 판옥인데 두 화승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소위 성모는 석상인데 눈과 눈썹과 머리 쪽진 데와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하여 눈길을 끓었다.

영신사를 들어갔는데 절에는 스님 한 사람뿐이었다. 돌부처는 오른팔에 반점 같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은 불에 태운 흉터였다

돌부처의 한 부분을 조금씩 태우면 미륵 세상을 만날 것이라 하여 이렇게 상처를 남겼다 하니….

물이 흐르는 개울 언덕에 초막 몇 채가 눈길을 끈다. 초막은 떨기나무로 된 비바 울타리를 둘렀고 온돌방도 있었으니, 이것이 매를 잡는 사람들의 집이다...꿩 사냥을 즐기는 권력자에게 바치기 위해 매를 잡는데…. 걸레처럼 헤진 옷을 걸치고 굶주리며 밤낮으로 강풍과 눈보라를 참아 가며 칼날 같은 봉우리에 숨어 엎드려 살펴야 한다.

노고단 일몰. 촬영=윤재훈 기자
노고단 일몰. 촬영=윤재훈 기자

김종직이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두 번이나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지리산을 ‘고향의 산’이라고 여겼다. 마치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경상남도 밀양 출신인 김종직은 매일 보는 이 산이 고향의 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김종직을 비롯해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은 일출을 보는 것을, 그저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며 소원을 비는 행위와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는 천문에 관한 이치를 살피는 것인데, 정상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높은 곳에서 하늘의 이치를 생각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도 고대 중국의 요 임금이 천문관(天文官)으로 하여금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관측하고, 일출을 맞이하여 백성의 농사 절기에 맞추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때에 맞추어 씨를 뿌리기 위해, 천문 관측하는 관원을 별도로 두었다. 바로 천문을 잘 관측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이 성왕(聖王)의 일이라 여겼다. 이것이 바로 가을에 풍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종직도 일출을 보며 당대의 왕들이 이상 정치 실현을 염원하였고, 그런 것들 때문에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아득한 능선들. 촬영=윤재훈 기자
아득한 능선들. 촬영=윤재훈 기자

김종직은 ‘유두류록’ 끝부분에서도

아! 두류산(頭流山)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崇山)이나 태산보다 먼저 천자(天子)가 올라가 봉선(封禪)하고 옥첩(玉牒)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뿐인가. 그는 천왕봉에 올라서도 다음과 같은 한시를 읊었다.

중국 오악이 중원을 진압하고 있으나
동쪽 태산이 그중 뭇 산의 조종(祖宗)이라
어찌 알았으리, 발해 너머 삼한 땅에
이처럼 웅장한 두류산이 또 있을 줄
- ‘중국 오악이 중원을 진압하고’ 김종직

五嶽鎭中原(오악진중원)
東岱衆所宗(동대중소종)
豈知渤澥外(기지발해외)
乃有頭流雄(내유두류웅)

하늘 아래 이런 절경(絶境)이 숨어있다니. 촬영=윤재훈 기자
하늘 아래 이런 절경(絶境)이 숨어있다니. 촬영=윤재훈 기자

중국의 오악(五嶽)은 동쪽의 태산,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과 그리고 중앙의 숭산을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태산을 으뜸으로 보아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 부른다.

유학에서도 태산은 공자의 덕(德)을 상징하는 것으로 통한다. 김종직은 지리산이 태산보다 나은 명산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의 국토에 대한 자존의식의 발로이며 지리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굳이 ‘백두에서 뻗어내려 남쪽에서 서린 산’이라고 불러 굳이 ‘두류산(頭流山)’으로 제목을 붙인 것 또한 백두산에서 하나로 연결된 명산이라 인식 때문일 것이다.

김종직의 국토 자존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중국 오악을 비롯하여 황산 같은 명산까지 다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 산을 올라본 필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풍경을, 중국의 산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경이로운 황산. 촬영=윤재훈 기자
경이로운 황산. 촬영=윤재훈 기자

2018년 중국의 황산을 찾았던 일이 생각난다. 폭설로 입산 금지가 되어 있었다. 큰 산은 그 모습은 쉽게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소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백두산 천지는 당일로 보았었는데.

그대로 떠날 수가 없어 황산 입구 마을에서 중국 청년들과 사나흘 게스트하우스에서 뒹굴었다. 그러다 마침내 날이 개어 마을의 조그만 가게 겸 등산구점에서 허술한 지팡이 한 개와 아이젠, 급속 인스턴트 음식, 초콜릿 몇 개를 샀다. 그리고 1박 2일의 일정으로 출발했다.

설경 속 황산의 모습은 사람의 넋을 잃게 했다. 그림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풍경들이 실제 눈앞에서 펼쳐졌다. 동서남북 경이로웠다. 수천 년 대국의 저력이 저런 데서 나오는가 싶다. 펼쳐지는 경치들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한국의 대부분 산을 올라보았지만, 말이 끊어졌다.

눈 쌓인 황산, 가히 지상의 풍경이 아니다
그림 속에 보았을 풍경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동서남북 눈을 돌려도, 경이로움이다.
수천 년 대국의 저력은,
저 산수(山水)에서 나오는가
펼쳐지는 경치들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말이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봉우리가 솟았다 
- 황산에서, 윤재훈

촬영=윤재훈<br>
순박한 중국 청년. 촬영=윤재훈 기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착한 중국인 대학생과 함께 올랐다. 다행스럽게 한겨울인데도 날이 많이 춥지는 않았다. 이 거대한 산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정말 세상은 선하게 살며 복을 많이 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곳곳마다 우인(友人)이 있었다. 산의 중간쯤에서 준비해 왔던 급속 음식을 함께 데워서 허기와 추위를 달랬다.

중국은 땅의 크기만큼이나 놀라운 풍경들이 많다. "세상 대부분의 풍경은 중국 안에 있고, 세계 대부분의 날씨도 중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구이린(계림)에서 보았던 그 낯선 풍경도 지구의 모습이 아닌 듯했고, 중국의 무협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던 장가계의 신묘한 모습도 그랬었다. ‘황산, 계림, 장가계’는 우리 국민이 중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이 아닌가.

황산의 저 기기묘묘한 암봉들의 모습에 반해서 중국인들은 정원을 꾸밀 때, 그렇게 가산(假山)을 좋아하나 보다.

조선 전기 문인인 신숙주(1417~75)가 안평대군(1418~53)이 인왕산 북쪽 골짜기에 지었던 비해당에 있는 가산을 보고 읊은 시를 감상해 본다.

흙을 모아 섬돌 앞에 작은 산을 만드니
봉우리. 숲. 골짜기 모두 재주 부려 나왔네
아침에는 지척에서 안개가 일어나니
앉아서 아득한 안개 속에 그윽한 마음을 부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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