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㉝] 지리산 ‘화대(華大) 종주’를 꿈꾸며16...지리산과 ‘미친 선비’, 추강 남효온의 올곧은 기개

윤재훈 기자
  • 입력 2023.09.22 11:37
  • 수정 2023.09.27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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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놀 단풍길에 그림자 섯갈리고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는 정은 경치를 대하니 속박이 없고
사해(四海)의 깊은 기틀 도()를 생각하니 편안하네.

- 기호원상인(寄顥源上人)에게, 최치원

지리산의 푸른 기개(氣槪). 촬영=윤재훈 기자
지리산의 푸른 기개(氣槪).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남효온은 조선의 5대 왕 문종의 부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한다. 왕후는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어린 나이에 폐군이 된 단종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소릉의 복위(復位)는 세조가 즉위하고 거기에서 배출된 공신들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선 목숨을 내걸고 하는 주청(奏請)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세상 사람들이 ‘미친 선비’라 하였다.

남효온은 1480년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생원시에 합격한 후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소릉이 복원된 후에 과거를 보겠다는 결기를 세웠다. 금기(今期)를 깨는 말을 서슴지 않았으며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 라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장흥 예양서원
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평생 야인으로 떠돈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은 영남 사림의 종조격인 김종직의 제자로, 스승마저 ‘우리 추강(秋江)’이라 부를 정도로 그의 정신을 존중했다.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등 도학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다 중종에게 토사구팽당한, 조광조 등으로 내려오는 푸른 정신들이다. 영남 사림의 대표주자들이다.

또한 당시에는 금기(禁忌)가 된 단종의 모진 사연을 죽음으로써 막으려고 한 사육신(死六臣)의 기개(氣槪)를, 여섯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뜻으로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였다.

이런 연유로 1498년 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때는 그 아들이 고초를 당하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한다. 하지만 역사는 불의(不義)의 시대를 그대로 두지 않고 불러내, 중종 6년인 1511년 이세인의 건의로 성현, 유효인, 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간행된다.

그리고 마침내 1513년 소릉 복위가 결정되자 신원 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가, 1782년 정조 6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세상에서는 그를 생육신이라 불렀다.

그의 올곧은 기개는 역사 속에 남아 고양의 문봉서원, 장흥의 예양서원, 함안의 서산서원, 영월의 창절사, 의령의 향사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귀신론(鬼神論)』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작자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 권6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는데, 외증손인 유홍(兪泓)이 1577년(선조 10) 경상감사로 재직시 인출(印出)한 것이다.

지리산 유람. 촬영=윤재훈
지리산 유람. 촬영=윤재훈 기자

남효온이 지리산 하산을 3일 앞두고 1487년 정미년 10월 10일에 쓴 산행일지에 보면,

시냇물을 10여 리쯤 거슬러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불일암(현재 불일폭포 옆 불일암은 근대에 개인이 지은 사찰임)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바로 혜소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암자 앞에 청학연이 있으니, 고운(孤雲, 최치원)이 일찍이 그 위에서 노닐었다.

내가 암자의 승려 조성(祖成)에게 찾아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길이 궁벽하여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普珠庵)에 올랐다. 바로 보주선사(普珠禪師)의 옛 거처이니, 암자의 이름이 이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어떤 노승(老僧)이 나에게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詩韻)이 원숙(圓熟)하며 청광(淸曠)하고 주밀(周密)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시 짓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나에게 차운하기를 요구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고운은 돌아가서 머물지 않고
청학은 돌아옴이 어찌 더딘가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맑고 빈한한 가도의 시일세

孤雲歸不駐
靑鶴返何遲
人物無今古
淸寒賈島詩 

내가 보기에 조성은 재능이 비상하고 유가(儒家)의 기상이 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이날 눈이 내렸다.

10월 11일에는 조성이 나의 봉천사(奉天寺) 율시(律詩)에 화운(和韻)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사물에 대한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실학자다운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암굴 속에 고운의 시 한 편 있지 않을까? 촬영=윤재훈 기자
이런 암굴 속에 고운의 시 한 편 있지 않을까? 촬영=윤재훈 기자

 

1연은 고운은 지리산에 신선이 되었다는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치원을 뜻하며, 마지막 구절의 가도는 당나라 시인 가도(島,779~843) 뜻하는 듯하다.

지리산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은 훗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가끔 시를 써서 석벽 사이나 암굴 속에 더러 버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리산에 얽힌 그의 시가 더욱 궁금하다.

종일 머리 숙여 붓끝을 희홍하니
사람마다 입을 막아 통정하기 어려워
시끄러운 세상 멀리 떠난 건 즐거우나
그리운 풍정(風情) 못내 버릴 수 없네.

개인 놀 단풍길에 그림자 섯갈리고
비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는 정은 경치를 대하니 속박이 없고
사해(四海)의 깊은 기틀 도(道)를 생각하니 편안하네.

終日低頭弄筆端 (종일저두농필단)
人人杜口話心難 (인인두구화심난)
遠離塵世雖堪喜 (원리진세수감희)
爭奈風情未肯란 (쟁나풍정미긍란) *<란=門안에 柬>


影鬪晴霞紅葉逕 (영투청하홍엽경)
聲連夜雨白雲湍 (성연야우백운단)
吟魂對景無羈絆 (음혼대경무기반)
四海深機憶道安 (사해심기억도안)

- 기호원상인(寄顥源上人)에게, 최치원

이 시는 최치원이 쌍계사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호원 상인에게 부친 시다. 일체의 세사(世事)를 물리치고 글 읽고 쓰고 시 읊고 하면서, 자연에 유유자적하던 나날을 보낼 때다. 쌍계사에는 그가 왕명을 받들어 손수 글 짓고 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가 있고, 화개동천에는 쌍계 석문의 친필, 세이암(洗耳巖), 삼신동 각자, 환학대(喚鶴臺), 정금천(停琴川) 등 많은 유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쌍계사에 들른 후학들도 선생을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얼음이 될 망정 그 절개가 붉다. 촬영=윤재훈 기자
얼음이 될 망정 그 절개가 붉다. 촬영=윤재훈 기자

쌍계사에서 고운 선생을 생각하니,
당시의 일이 분분하여 들을 길 없네.
고국에 돌아와서도 사방으로 방랑하니,
푸른 들판에 학이 닭무리에 끼었네.

雙溪寺裏憶孤雲 (쌍계사리억고운)
時事紛紛不可聞 (시사분분불가문)
海東歸來還浪迹 (해동귀래환랑적)
祗綠野鶴本鷄群 (지록야학본계군)
-
점필재, 김종직 시

옛사람의 시를 읽으면 마치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라도 하는 듯
그 풍경이 그려지고, 통정(通情)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고래(古來)의 인걸들이 더욱 그리워지고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에 더욱 애달파 한다.

이 눈을 밟고 어디로 갈거나. 촬영=윤재훈 기자
이 눈을 밟고 어디로 갈거나. 촬영=윤재훈 기자

고운 최치원의 많은 이야기는 풍류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유불선 삼교에 심취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대사상에도 깊은 통찰을 가졌다. 그는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있는 인물로 거론된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그가 선인(仙人)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가 당시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면서도 노장사상 즉, 도교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문인들의 시에서도 최치원을 선인으로 묘사한 시가 많은데, 이런 인식들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시에서도 그러한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최치원은 신선 같은 사람이더라
표연히 세상의 사악(邪惡)에서 벗어났도다.
짧은 비석에는 오히려 글자가 있는데
깊은 골짜기에는 본래 무덤이 없도다.


탁한 세상에 잠깐 몸을 부쳤다가
청천에 학과 같이 혼자 날더라.
높은 산 같은 분을 어찌 우러러보리오
애오라지 이 맑은 향기를 얻었도다.

致遠仙人也 (치원선인야)
飄然謝世氛 (표연사세분)
短碑猶有字 (단비유유자)
深洞本無墳 (심동본무분)


濁世身如寄 (탁세신여기)
靑天鶴不群 (청천학불군)
高山安可仰 (고산안가앙)
徒此挹淸芬 (도차읍청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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