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장애인은 느리게 가는, 시계가 필요하다...윤두선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

김남기 기자
  • 입력 2023.03.08 16:33
  • 수정 2023.03.09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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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간다. 사고 싶은 물건은 산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이하 ’독립생활연대’) 홈페이지 대문에 큼지막하게 글귀가 쓰여 있다. 물건 하나 산다는 게 그렇게 행복한 일인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은 것들이 중증장애인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독립생활연대의 ‘용두산길 탐방’ 유튜브를 보았다. 휠체어는 식당까지 의 힘겨운 여정을 마칠 때쯤 낑낑 멘다. 3센티의 턱을 못 올라 입맛만 다시다 곧 다른 식당으로 옮겨야 했다. 3센티의 거대한 벽 앞에서 먹고 살기 힘든 삶을 보았다.

윤두선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는 2000년 9명의 중증장애인과 함께 독립생활생활연대를 만들었다.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만들었다.

윤두선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 촬영=김남기 기자

‘나의 어린시절 추억은 없다’...학교도 못 가고 그저 누워 있을 뿐

어린시절의 추억은 솔직히 없다. 집에 누워만 있었다. 가끔 누나의 등에 업혀 외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 가끔 나는 집에서 누나의 도움으로 공부했다. 
부모님은 장사하기에 바빴다. 그 당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었지만, 그 누구도 중증장애인을 학교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 지금은 선생님이 ‘순회교육’으로 중증장애인의 집에 와서 가르쳐주기도 한다.
나의 어린시절 유일한 친구는 텔레비전이었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 윤두선 대표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없던 시절 윤 대표는 자신의 숙명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윤 대표는 누구나 가진 어린시절의 추억과 꿈을 아무리 되새겨 봐도 없다고 한다. 몇 번의 외출이 고작인 그의 어린시절이 지나고, 청년기에 찾아 온 작은 분노의 씨앗이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윤두선 대표, 한손으로 사용하는 키보드가 이색적이다. 촬영=김남기 기자

새로운 희망을 만나다...40세에 대학을 졸업하다

윤 대표 청년기의 어느 장애인 캠프에서 일화다.

장애인을 우습게 보는 자원봉사자 대학생이 장애인을 모아 놓고 인생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했다. 윤 대표는 잘난 척하는 대학생에게 화가 치밀었다. 갓 스무 살 남짓 대학생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에 윤대표는 “내가 너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그 후 윤 대표는 ‘원광복지관’에서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다. 복지관 교무 선생은 청년 윤두선에게 쓴 소리를 많이 했다.

맨날 집에서 만 있을 거야. 사회활동도 하고, 너도 뭔가 해야 하잖아! 검정고시부터 보자. 
- 윤두선 대표

윤 대표는 ‘내가 검정고시 합격해서 어디 쓸 때나 있나?’, ‘떨어지면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마음에 망설였다. 하지만 교무 선생의 강요에 못 이겨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보았다. 다행히 초등학교 검정고시 합격했다. 이어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공부에 자신감이 생긴 윤 대표는 수능에 도전하여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서른여섯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정규교육을 전혀 못 받은 중증장애인 윤두선은 대학생이 됐다. 그 첫 단추는 장애인을 비하하던 자원봉사자에 본때를 보여 주겠다던 작은 욕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이 마흔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장애인 관련 잡지사에서 기자생활로 어엿한 사회인으로 새로운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잡지사 기자가 되어 취재를 할 때면 기분이 안 좋았다. 
장애인은 왜 이렇게 불행하고 힘들게 사는가?
장애인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 고민했다.
이런 나를 보고, 편집장은 ‘너의 펜에 힘을 보여줘’라고 했다.
하지만, 좀 더 빨리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장애인의 삶의 현장에서 활동가로 나서고 싶었다. 
- 윤두선 대표

왼쪽 윤두선 대표, 장애인과 함께하는 자전거체험. 사진=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제공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네이밍의 의미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블로그에 재밌는 글을 보았다. 국방부 한 부서에서 후원금이 중단된 것이다. 국방부가 위치한 삼각지역 부근에서 전국장애인단체의 시위로 국방부 관계자가 애를 먹는 모양이다. 그동안 후원한 단체의 이름을 보고, 괜한 오해를 받을까 싶어, 고민 끝에 후원을 중단한 것이다.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투쟁의 그림자가 후원을 막은 모양이다.

이에 푸념하듯 윤 대표는 "우리는 새색시 같은데 단체인데, 이참에 ‘중증장애인 사랑보듬센터’로 개명해 볼까?" 초창기 독립생활연대는 광복절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독립이란 단체명이 포함되자. 광복단체인 줄 알고 광복절 행사에 초청을 받은 일화도 있다.

독립생활연대는 2000년에 출범했다. 이 당시에 중증장애인은 복지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있었다. 중증장애인이 학교에 가거나 취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복지의 개념은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증장애인은 주는 떡도 못 받아먹는다. 떡을 받으러 갈 수도 없고, 누군가 먹여주어야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중증장애인은 장애인 주거시설에 가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사회적 분위기와 시스템이 중증장애인이 혼자 살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독립생활연대는 단체명을 만들 때, 대상과 하는 일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다.

‘중증장애인’이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연대를 해야만 했다.

2006년 장애인의 날 올해의 장애극복 대통령상 수상. 사진=윤두선 대표 제공  
2022년 장애인의 날 대통령표창 수상. 사진=윤두선 대표 제공  

살고자 만든 단체...‘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9명의 중증장애인이 '장애인독립생활연구회'를 결성했다. 살고자하는 절실함이 그 이유였다. 9명의 중증장애인은 각자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리기를 원했다.

단체 구성원 중 한 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동생들의 보살핌으로 함께 살았다. 동생들이 결혼하면서 자신의 돌봄을 언제까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소망한 것처럼 절에 가서 살았다. 하지만, 절에서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윤 대표의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셨고, 누나도 결혼한 상태에서 더 이상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다.

우리 9명의 구성원은 서로가 너무 절실한 처지였다. 우리는 독립생활을 못 하면 ‘장애인 거주시설’을 가야 했다.
절실함에 우리는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내 생명과 삶이 걸려 있기 때문에, 중증장애인을 위한 단체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 윤두선 대표

하지만 중증장애인이 단체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기댈 언덕도 어떤 네트워크도 인맥도 없었다. 아무 자원이 없이 시작했지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용산 장애인 봉사단체 ‘한벗’은 장애인 단체를 위한 인큐베이팅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가 선정되어 작은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이제 우리는 한 공간 안에서 소속감과 활동력을 키워기 시작했다. 윤 대표는 잡지사 기자생활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독립생활연대의 사업을 시작했다.

부단한 노력으로 독립생활연대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독립생활지원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운영비와 사업비를 받게 됐다. 2년 동안 지원을 받으면서 조금씩 체계를 갖춰갔다. 또한 서울시가 지원하는 독립생활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금도 지원받고 있다.

2006년 윤두선 대표의 아내와 자녀들. 사진=윤두선 대표 제공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다

윤 대표는 초기 독립생활연대의 도움을 주었던 ‘한벗’의 봉사자를 사랑하게 됐다. 지금의 아내이자, 두 자녀의 엄마이자 영혼의 동반자이다. 하지만, 신혼초의 살림은 넉넉치 못했다. 독립생활연대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제대로 월급을 가져다주기 힘들었다. 그때 윤 대표는 잡지사도 그만두고, 돈 몇 만원 벌기도 쉽지 않았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게, 저는 더 좋아요
- 윤 대표 아내

윤 대표는 이 말에 용기를 얻었다. 내가 이 일에 매진해도 되겠구나, 때마침 정부의 중증장애인 지원사업이 활성화되면서 독립생활연대는 영역을 확장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됐다.

중증장애인의 독립생활을 위한 사업들 

탈시설사업...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

장애인거주시설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군대에 가고 싶은가? 군대는 먹여주고 재워준다. 하지만, 생활의 자유가 제한된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거주시설은 자유의 제한이 매우 높다. 외출하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외출해서 장애인이 사고라도 나면 시설의 책임자가 문책받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다. 시설 안에 갇혀 사는 장애인은 얼마나 답답할까? 물론 시설에서 불가피하게 생활해야 하는 장애인들도 있다.
- 윤두선 대표

독립생활연대는 탈시설을 원하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지역사회에 적응하고, 삶의 터전을 일굴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을 연결해 준다.

독립연대 체험홈 입주자 김영미 씨가 자립생활기술훈련으로 꽃꽂이를 하고 있다. 사진=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제공 

탈시설 사례

보육원에서 살던 청년이 오토바이 사고로 지체장애를 얻게 됐다. 보육원은 원래 장애인이 살 수 없어서 대전에 있는 장애인 거주시설로 보내졌다.

약간의 인지장애가 있었던 청년은 시설에서 적응을 못 하고 독립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청년은 다행히 평소 아버지처럼 따랐던 영어 자원봉사자 미국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침, 이 미국인은 나의 강의를 우연히 듣고 독립생활연대에 도움을 청했다.

편마비가 조금 온 상태라면 얼마든지 탈시설을 도울 수 있었다. 독립생활연대는 먼저 체험홈에서 일년간 지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젠 미국인 아버지가 집을 구해주어서 나름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

장애인 입장에서 시설에서 나오는 건 새 삶을 사는 것이다. 장애인 거주시설의 문제는 희망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시설을 떠나 세상에서 나오면, 인생의 목표가 생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 윤두선 대표

'용리단길 경사로탐방기' 전동 휠체어가 턱을 오를 수 있는 지 확인하고 있다. 독립생활연대 유튜브 화면

지역환경개선사업...장애인 이동권 3cm의 턱이 분노를 부른다

사고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 휠체어를 처음 타면 분노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이동을 못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이동에 불편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갈 때면, 온갖 장애물이 산재했다. 작은 턱과 계단이 나를 세상에서 고립시킬 줄 몰랐던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못 갈 때 얼마나 절망적인지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독립생활연대는 상점 입구에 10센티 이하의 경사로 만들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업소에서 거부하고 있다. ‘그런 걸 왜 우리한테 말하냐’는 것이다.’ 굳이 경사로를 만들어 장애인을 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구청에서 경사로 설치비를 지원해도 말이다.

95% 이상이 거부를 해도 단 5%의 주민의 협조를 얻기 위해 독립생활연대는 경사로를 만들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 1년에 30개 경사로를 목표로 장애인이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상점에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다.
- 윤두선 대표
 

장애인 권익보호

장애인에게는 ‘물고기만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장애인의 복지는 밥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했다. 장애인이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얻어먹고만 살면, 늘 똑같은 빈곤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얻어먹기만 하는 의존적 삶은 한계가 있다.

-윤두선 대표 

그래서 독립생활연대는 동료상담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자립생활훈련, 권익옹호 등 장애인의 역량을 강화한다.

독립연대의 사업 방향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동안 장애인은 사회적 소외와 정보부족 등의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특히 인권운동에 힘을 쓰고 있는 이정은 변호사가 자문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장애인 권익옹호 행정소송 등을 진행하고 있다.
- 윤두선 대표

장애인의 권리를 지키고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법률적, 행정적 방법을 통해 장애인의 권익을 지켜준다. 사진=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제공 
법률상담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를 지키고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법률적, 행정적 방법을 통해 장애인의 권익을 지켜준다. 사진=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제공 

권익옹호 소송사례

작년에 거동이 불편한 지적 장애인이 전동 휠체어 지원을 못 받은 경우가 있었다. 강서구청이 지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오히려 거동이 불편한 지적장애인이 더욱 필요한 지원이지만, 휠체어 운전을 잘 못해서 사고를 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지적장애인은 충분히 자기 혼자서 운전할 수 있고, 또 옆에서 활동지원사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단지 지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당한 것이다. 결국 이정은 변호사의 도움으로 소송을 해서 승소했다.

이처럼 중요한 결정을 공무원 한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 관련제도는 세밀한 규칙적용이 필요하다. 행정편의에 의해서 결정하면 안 된다.

탈시설 장애인을 지역에서 지속해서 체계적으로 지원하여 사회 정착을 돕는다. 사진=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제공 

활동지원사

정부의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많이 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활동지원사 제도이다. 이전까지 가족이 장애인을 돌보는 주체였다. 여기에 활동지원사가 돌봄의 주체로 나서게 된 것이다. 정부에서 재원을 부담하고, 장애인의 활동을 지원한다는 개념이다.

활동지원사는 중증장애인의 삶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예전에는 혼자 나와서 살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독립생활연대는 활동지원사를 운영하여 혼자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자립생활과 사회참여를 지원한다.

윤두선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 촬영=김남기 기자

장애인은 느리게 가는 시계가 필요하다...나의 인생이모작

윤두선 대표는 이제 60대이다. 인생이모작을 준비할 때이다. 그런데 윤 대표는 장애인에게는 한 템포 늦은 사회적 나이와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장애인은 십년쯤 시간을 더 주어야 한다. 장애인은 모든 것이 늦다. 비장애인처럼 시계 초침대로 살 수 없다. 하루에 한 시간씩 더 주었으면 좋겠다. 세수를 해도 삼십 분이 걸린다.
나이 40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겨우 20년이 지났는데,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우리 지역에 장애인들이 많이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가 부모와 함께 사는 집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장애인에게는 소속감이 중요하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교감을 하고, 독립생활연대가 지원으로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 갔으면 한다.
- 윤두선 대표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 딸이 캐나다에서 유학하고 있다.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자 딸이 말하길 어떤 남자는 매일 여장을 하고, 어떤 아이는 플라스틱 옷을 입고 학교에 와도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 생소한 것, 다르다는 것, 흔히 보지 못한 것 장애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장애인도 나쁜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 우리네 사는 모든 이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의 즐거움을 전달했으면 한다.
- 윤두선 대표

독립연대의 파워싸커(전동휠체어 축구)팀 용산FC가 2023년 첫 훈련을 가졌다. 5명 멤버 전부가 참가해서 킥 연습과 세트피스. 2대2 경기를 하였다. 사진=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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