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니어여행기] 애잔한 철거민의 삶이 깃든 곳...백사마을

박경희 여행작가
  • 입력 2023.07.31 14:52
  • 수정 2023.08.0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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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여행작가] 1967년 청계천 영등포 도심개발로 인한 철거민들이 새로운 삶이 터전이 된 곳 104마을. 이곳은 주소가 하나였다고 한다. 104번지.

재개발이 된다고 수십 년 전부터 들떠있던 이곳을 드디어 재개발을 하나 보다. 마을 입구 현수막이 붙어 있다.

먼저 나는 중계동 은행사거리 가기 전에 있는 '한글고비'부터 들러보았다. 한글고비로 오르는 길은 스테인리스로 된 난간으로 둘러싸인 화강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윤탁 한글고비는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되었고 조선 중종 31년 승문원 부정자 이윤탁의 아들 이문건이 비문을 세운 최초의 한글로 된 비이다. 촬영=박경희 

​한글고비 보물 1524호. 이 비는 1536년(중종 31)에 이윤탁과 그부인 고령 신씨를 합장한 묘 앞에 세운 것이다. 이윤탁묘역은 원래 지금의 태릉 자리에 있었다. 문정왕후 윤 씨의 묘를 그 자리에 만들면서 이곳에 있는 부인 고령신씨 묘로 이장하게 되었다.

이 비는 그의 아들 이문건이 새롭게 조성된 묘역을 훼손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의 양 측면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 문을 새겼다. 비의 왼쪽에는 영비라는 제목 아래 비석의 손상을 염려하는 30자로 된 한글 비문을 새겼다.

이것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의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이다.

이 비는 한글로 쓰인 현존 최고의 비라는 점에서 국어사, 한글 서예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 비는 1998년 도로 확장 때문에 원래 자리에서 15m 뒤로 옮겨졌고, 원래 자리에는 돌을 묻어 표시했다.

비의 비신은 상부의 양쪽 모서리에 각을 주어 깎은 모양이고 받침대는 네모 모양인 규수방부의 형식이다. 이는 조선시대 초기에 유행하였던 양식이다. 영비를 세운 이문건은 홀로 된 노모를 위해 거문고를 배워 연주하고, 의방을 연구, 정밀 처방해 올렸다.

- 한글고비 안내판

충숙공의 묘역을 관리하는 재실 동천제이고, 오른쪽은 충숙공의 신도비이다. 촬영=박경희 
충숙공의 묘역을 관리하는 재실 동천제이고, 오른쪽은 충숙공의 신도비이다. 촬영=박경희 

한글고비에서 충숙공원으로 가는 쪽 바로 왼쪽에 단아한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1661년 이경의 부탁으로 송시열이 비명을 지었다고 한다. 충숙공 이상길의 묘역에는 그의 부모, 형제 후손의 묘가 10여기 안장되어 있다. 벽진이씨 가문에서 일부 기증한 땅으로 공원을 만들었다 하여 '충숙공원'이라 명하였다.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때 강도사직을 수호하다 순절한 충신 이공 휘 상길과 선고인 찬성공 휘 희선(1530~1592), 그리고 백씨 평사공 휘 상철(1552~1594)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공이 22세손이며 공의 호는 동천이요 시호는 충숙이고 관은 벽진이니 시조는 고려삼중대랑개국 원훈 백질장군 서청백리로 청사에 빛나는 평정공 휘 약동의 5대손이다

공은 명종 11년(1556) 병진 12월 3일 자시에 한양 주자방에서 태어나고 선조 18년 (1585)을유 9월에 식년 문과 갑과에 합격하였다. 공의 관직은 자현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대광보국, 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감춘주관사에 중직되었다.

인조 15년(1637) 정축 1월 26일 사생취의하여 묘사를 수호하다가 순절하니 향수 82세에 영에의 생을 마쳤다. 2월에 선원촌에 권장하였다가 그해 4월에 이곳으로 반장되었으며 부조의 명을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이 봉항하고 있다

신도비는 1988년 4월 20일자로 서울특별시 문화제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영 정은 공이 80세 때 김병국이 두 폭을 그려, 한 폭은 남원덕과에 보물 제792호로 지정되고, 또 한 폭은 서울특별시문화지 제69호로 지정되이 각각 봉안돼 있다.

- 충숙공 묘역 안내문

불암산 더불어숲 순환 산책로. 촬영=박경희 
불암산 더불어숲 순환 산책로. 촬영=박경희 

불암산 더불어숲 순환 산책로는 약 1km의 길로 걷기에 좋은 길이다. 더불어 숲 내에는 관리사무실, 모험시설 실내교육장, 협동시설 실외교육장등으로 만들어져 있다.

암흑미로는 5개의 장애물을 통과해야 하며, 평균 지상 6m 높이의 상공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전을 통해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블루 9개 코스, 레드7개 코스 하강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협동시설에서는 문제해결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청소년들이 모험심을 키우기에 좋은 곳이다.

백사마을. 촬영=박경희 
백사마을. 촬영=박경희 

더불어 숲을 나와 4차선 도로를 건너니 바로 백사마을로 접어든다. 강제 철거로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 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리다.

철거민에게는 임시 군용 막사를 줬고, 그 안에 4가구가 한 막사 안에 주거하라고 배당되었다. 집을 지으라고 준 시멘트는 벽돌을 딱 200장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 벽돌로 집을 지을 수가 없어서 시멘트 포대에 흙을 담아 '포대벽돌'을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곳곳에 포대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백사마을 포대벽의 흔적. 촬영=박경희 
백사마을 포대벽의 흔적. 촬영=박경희 

서민들의 애환과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 같은 이 곳을, ‘무작정 헐어 아파트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서울시에서 했던것 같다.

그래서 20%는 보존하고 임대주택은 낮게, 원주민과 분양용 아파트는 20층 이하로 짓는 것으로 결정했다. 원형대로 보존되는 집이 딱 3채라고 한다. 철거하기 위해 대부분이 이주했지만, 아직도 100여 가구는 남아 있다고 한다.

백사마을 벽화. 촬영=박경희 
백사마을 벽화. 촬영=박경희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
이 동네 사람들은 수급자가 많아. 내가 볼 때 한 100가구는 그대로 있잖아. 왜 여기에 살겠어? 그래도 고향이야. 여기가 고향, 고향이니까 아는 사람이 있잖아.

여기서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있는 거야. 둘이 사는 사람은, 부부가 있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게 살아. 근데 혼자 사는 사람은 오갈 데가 없어. 인제 와서 이사 가면 그 하계동하고 상계동하고 잠시 이주 주택이 있는 지역사람을 새롭게 만날 수가 없는 거야.

친해지지는 않아. 그래도 104마을 사람 수는 얼마 안 되지만 30~50년을 만나왔던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서로 믿고 술도 한잔하고, 서로 뭐 그게 어색한 게 없잖아. 그게 재미있는 거야. 그 동네에 사는 게.

지금 근데, 이제 막상 여기서 이제 나가 봐. 부부들은 아마 내가 볼 때는 나가서 적응을 잘할 거야. 근데 혼자 사는 사람들은 적응을 잘 못해 그러니까. 여기가 제2의 고향이야.

- 백사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

이 마을 해설사가 구술한 것을 들려주는데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들의 삶이 너무나 아파서...

연탄은행, 어릴적 수도 없이 갈았던 연탄. 촬영=박경희 
연탄은행, 어릴적 수도 없이 갈았던 연탄. 촬영=박경희 

마을에 연탄은행은 31군데에 있고, 연탄 한 장의 가격은 800원에서 1000원이다. 겨울이 시작되면 연탄 나르기 자원봉사를 하는데 순식간에 마감이 된다고 한다. 연탄 한 장 무게가 3.5kg 꽤 무거운 무게이다. 하지만 자원봉사로 마을 곳곳 경사로가 심한 곳까지 무거운 연탄을 날라주니 그 노고에 감탄할 뿐이다. 연탄은행 바로 앞에 세탁소 사장님이 연탄 보관 창고도 무상으로 제공해 주신다고 한다.

백사마을 '비타민목용탕'. 촬영=박경희 
백사마을 '비타민목용탕'. 촬영=박경희 

마을에는 '비타민목용탕'이라는 공동 목욕탕이 있는데 남자 어르신과 여자 어르신이 오시는 날이 다르고 일주일 전에 예약하면 목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내려가면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재벌집 막내아들' 엄마가 운영하던 식당 촬영지가 나온다.아직도 있는 추억의 라디오 텔레비전 고치는 집이 보인다. 빨래가 널려 있으면 아직 사는 사람이 있는 집이다. 

'재벌집 막내아들' 엄마가 운영하던 촬영지. 촬영=박경희 
'재벌집 막내아들' 엄마가 운영하던 촬영지. 촬영=박경희 

88올림픽 성공을 염원하며 명명되었다는 88계단, 실제는 80계단이라고 한다. 마을을 내려오다 보면 실제 기른 토종닭으로 요리한다는 산촌영양탕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맛집이라고 하는데 시간 내 한번 와 봐야겠다.

처음 이주했을 때 공동 우물이 없어 물을 얻기 위해 먼 길을 걸어갔고, 인근에 학교가 없어 하계동까지 걸어 갔다고 한다.

그 당시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아직도 남아있는 쓰러져 가는 서울의 달동네. 이곳은 어려운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우리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과 같은 소중한 공간이다.

이곳을 그대로 살려 근대사를 추억하고 후손들에게도 어려웠던 서민들의 생활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걸까 그런 망상을 해 본다.

백사마을 보존되는 집. 촬영=박경희 
백사마을 보존되는 집. 촬영=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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