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 낙산(駱山)에서 역사의 길을 묻다.

박경희 여행작가
  • 입력 2023.05.08 13:33
  • 수정 2023.07.3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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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는 '노원50+ 여행작가교실'을 수료한, 시니어 여행작가들의 작품을 연재한다.

[여행작가 박경희] 오늘은 '내 마음의 안식처 서울 역사 여행과 여행 작가 되기‘반 수업이 있는 날이다. 마을버스에서 바라보는 가로수들은 갓 씻은 아가의 고운 얼굴과 같았고, 연둣빛 잎사귀는 여행을 떠나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살랑거리고 있다. 동대문역 7번 출구를 나오니 일행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오늘 여정은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시작한다.

“동대문이 왜 흥인지문일까요”라는 강사님의 물음에, 우리는 “왜일까요 역사 시간에 외우라고 해서 외웠는데 다른 이유가 있나요”라고 갸우뚱했다. 서울에는 사대문이 있는데, 그것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숭례문(崇禮門), 돈의문(敦義門)과 숙정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외산인 북한산으로 들어가는 중간에 홍지문(弘智門)이 있는데, 유교의 ‘인, 의, 예, 지 (仁, 義, 禮, 智)’를 넣어 이름을 지었고, 부족한 ‘신(信)’은 도성의 중심인 보신각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대문 ’흥인지문‘.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동대문 ’흥인지문‘.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동대문 호텔 건물 앞에는 '경성 궤도 회사 터' 표지석이 보이는데, 이곳은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를 오고 가는 열차의 출발지였다. 특히나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군들이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해방 후에는 물자와 승객을 운반하는 교통수단이 되었다. 작은 표지석이지만 역사를 담고 있어 살아있는 징표로 보이고, 그 시절 활발하게 물자와 사람을 싣고 오고 가는 궤도전차의 모습이 그려진다.

전차 시발점.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전차 시발점.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이제 우리는 ‘흥인지문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정갈하게 꾸며놓은 아름다운 정경에 어울리지 않게 벤치 주변에는 누군가 먹고 버린 막걸리 통, 과자봉지로 사방이 어지러웠다. 봉사와 헌신 정신이 가득하신 우리 반장님은 “좋은 일 한 번 합시다. 요즘 플로깅이라고 하지요. 여행하면서 휴지를 줍는 활동”하시며, 더러운 휴지와 쓰레기를 손으로 주워 봉지에 담는다. 허수아비처럼 키가 커다란 우리 강사님도 부지런하게 동참하고, 너도나도 쓰레기 줍기에 참여한다. 한순간 우리의 노고로 공원과 마음이 말끔해지는 느낌이다.

공원의 휴지를 치우면서 친정어머님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환경을 보존하고 아끼는 활동을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산으로 들로 나들이를 많이 다녔는데, 갈 때마다 휴지가 있으면 아무 말 없이 주워 담았다. 한번은 송추계곡에 놀러 갔는데 그곳에 어지럽게 버려진 쓰레기와 닭 뼈 등 더러운 쓰레기를 묵묵히 주워 담던 어머니께, 나는 “엄마 더러워하지 마!”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플로깅 활동 후 ‘한양도성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바라본 풍경.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바라본 풍경.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1396년 만들어진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를 경계하고 외부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백악, 낙산, 남산, 인왕의 능선을 따라 설치되었다. 전체구간의 약 73.6%(13.7km)가 남아 현존하는 도성 중 가장 오랜 역할을 하는 자랑스러운 문화재이다.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관 1번에는 축소모형과 영상으로 도성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고, 한양도성을 둘러보는 정보를 받을 수 있다. 상설전시관 2에는 한양도성의 만들어진 과정과 개폐 관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상설전시관 3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근대화 과정에서 한양도성의 훼손과 재탄생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서울의 울타리에 얽힌 역사와 상흔의 흔적이다. 긴 세월 동안 흩어지고 상처 났던 역사를 다시 꿰어맞춰 여기에 이렇게 의연하게 자리 잡아, 우리에게 한양도성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에는 성곽을 보존하면서 나온 여러 잡상, 장식 기와, 그림, 서적 등이 있으며, 우리의 문화를 발굴하고 되찾아 복원까지 해놓아 가슴까지 뿌듯하다.

한양도성박물관 내부.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한양도성박물관 내부.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그런 마음을 안고 박물관을 나와 낙산 도성길을 돌아 이화동 마을로 향했다. 성곽의 석축은 시대에 따라 쌓은 모양이 다르다고 한다. 어느 시대에 쌓았는지 그 깊이까지 알 수는 없지만 쌓아놓은 벽돌 하나하나가 서울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성벽에 난 구멍도 밖에서 보이는 면은 작고, 성안에서 보이는 면은 크다. 이것은 외부의 공격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는 조상님들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구멍 사이로 보이는 마을은 액자에 담긴 듯 아늑해 보인다.

낙산 성곽에서본 마을.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낙산 성곽에서본 마을.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성곽을 내려와 이화동 마을의 골목길은 안탈리아 해변의 마을 길,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아름다운 골목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골목길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이 공간을 마법을 부린 것처럼 꾸며놓아 우리는 알 수 없는 자력에 이끌리듯 거리를 걸었다. 이런 곳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시화라는 명분 아래 벽돌을 찍어내듯 똑같은 아파트만 만들지 말고, 사람 사는 냄새 물씬 나는 보물 같은 골목길을 보존해, 백 년, 이백 년 후에도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길손들에게 나와 같은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화동 벽화마을.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이화동 벽화마을.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골목길을 걸어 솟대 박물관에 가 보고 싶었는데 그곳은 공사 중 이어 문을 열지 않았다. 신선처럼 성곽 아랫마을을 휘휘 돌아 나지막한 낙산 정상에 있는 공원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이 장관이다. 성안 아래 동숭동과 이화동이 보인다. 조선 시대 선비가 된 듯 이화정 정자에 앉아 한양도성을 굽어보는 상상을 한다. 낙산공원 정상에서 차도로 조금 내려가니 ‘서울 도성 안에 이런 곳이 숨어 있구나’할 만큼 깜짝 놀랄만한 곳이 나온다. 장수마을과 이수광의 집터인 ‘비우당(庇雨堂)'이다.

비우당과 자주동샘.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비우당과 자주동샘.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이곳은 본래 이수광의 모친인 문화 유씨의 5대조 유관(柳寬)이 초가집을 짓고 지내던 곳이었다. 그 후 이수광의 아버지인 이희검(李希儉)이 옛집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간만 약간 넓혀서 지낸 곳으로 사치스럽지 않고 소박한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비우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를 안타까워한 이수광은 옛터에 조그마한 당을 짓고 ‘겨우 비바람을 가린다(僅庇風雨)’는 의미로 ‘비우당’이라고 이름을 짓고 기거하면서, 서양 문물과 문화를 소개하며 세상의 잡다한 지식까지 엮은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편찬했다.

비우당 후원에는 자지동천(紫芝洞天, 자주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열다섯 살에 혼인해 열여덟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단종과 강제로 헤어진 비운의 정순왕후 송 씨의 애련한 삶이 깃든 곳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정순왕후는 청룡사 옆 작은 초가집인 정업원에서 남은 생을 살았다. 정순왕후는 생계를 잇기 위해 명주를 짜서 저고리, 옷고름 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어느 날 이곳에서 명주를 빨았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 해서 이곳의 이름을 ‘자주동천’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명주를 짜서 말리던 바위에는 자줏빛을 띠는 풀이름이란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도성 안의 집도 마다하고, 단종이 있던 영월과 더 가까운 이곳에서 단종을 그리며 여생을 보낸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연을 들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픔의 강이 한 줄기 흐르는 것 같다.

여성 관련 역사와 문화공간 여담재.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여성 관련 역사와 문화공간 여담재.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비우당’ 바로 옆에는 ‘여담재’가 있는데, 원래는 원각사라는 절이었다. 그 후 서울시가 매입하였고 ‘여성 역사 공유공간’으로 사단법인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서울 근현대사 중심에 있던 여성의 역사를 발굴하고, 전시 및 교육, 지역사회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여성의 시각으로 지나온 역사를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곳이다. 내부는 둥근 기둥을 그대로 살린 계단에 독서와 강연을 듣는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여성의 권익과 의미 있는 미래를 여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나는 하루쯤 시간을 내서 아름다운 ‘여담재’에서 여성에 관한 책도 읽고, 국가 발전을 위해 애쓴 여성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을 돌아내려 오니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시대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府) 총무당 건물이 보인다. 삼군부는 고려 말 이성계가 병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설치한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 설치하여 강력한 중앙 군사체제를 갖춘 곳이다. 삼군부 총무당을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가니 커다란 놀이터가 자리 잡고 있다. 하교 후 이곳에서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건강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사람 냄새 나는 삶을 사는 이곳 주민들이 부러운 맘이 들었다.

골목을 내려와 우리는 ‘낙산 보리밥집’에서 인정 넘치는 정갈한 한 상을 받았다. 골목을 내려와서도 낙산 성곽길과 마을을 밟은 감동을 나누기 위해 작은 찻집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삼선동 골목길.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삼선동 골목길. 촬영=박경희 여행작가

돌아오는 길에 고려말 문신인 길재가 조선이 개국한 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방문하였을 때 느낀 심정을 노래한 길재의 시를 마음속으로 읊어보았다.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 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하되 人傑(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외국을 많이 다녔지만, 정작 우리가 생활하는 서울을 나는 얼마나 알려고 노력하고 있나 생각해 보았다. 삶의 애잔한 흔적과 역사를 품고 있는 이 땅을 우리는 어떻게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어떻게 후손에게 전달해 주려고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는 풍경과 이야기와 문화공간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한가득 안은 선물 같은 기행이었고, 우리 안에 있는 문화를 탐구하고 이를 기록하고 갈무리하려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의미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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