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 깨달음을 얻어 즐거이 근심을 잊는다...‘낙이망우(樂而忘憂)의 길’

이순자 여행작가
  • 입력 2023.03.1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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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는 '노원50+ 여행작가교실'을 수료한, 시니어 여행작가들의 작품을 연재한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 다쿠미는 야나기 무네요시

(망우카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망우카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이순자 여행작가]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탐방하기 위해 망우카페에 집결하였다. 햇살은 화사하여도, 기온은 싸늘하여 일찍 도착한 동기는 추위에 떨 수도 있는 날씨이다. 다행히도 배려심 많은 반장님은 전날, 인심 좋은 카페 사장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1인 1차를 하지 않아도 카페에서 함께 모여 출발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단다. 그 내용을 공지 받은 우리는 모두 “반장님 최고!, 사장님 최고!”를 외쳤다. 덕분에 따뜻하고 쾌적한 카페 안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탐방하기 위해 망우카페에 집결하였다. 햇살은 화사하여도 기온은 싸늘하여 일찍 도착한 동기는 추위에 떨 수도 있는 날씨이다. 다행히도 배려심 많은 반장님은 전날, 인심 좋은 카페 사장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1인 1차를 하지 않아도 카페에서 함께 모여 출발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단다. 그 내용을 공지 받은 우리는 모두 “반장님 최고!, 사장님 최고!”를 외쳤다. 덕분에 따뜻하고 쾌적한 카페 안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 촬영=이순자)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 촬영=이순자)

망우역사공원 입구에 전체 55인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기록한 안내문이 우리를 반긴다. 간간이 눈발이 날려 떠나려는 겨울을 붙잡고 있는 날씨가, 조용히 쉬고 계시는 영령께 옛 얘기 들려달라며 다가가는 우리의 마음 같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망우역사공원을 돌아보면서,

이제는 이곳이 역사 인물을 만나는 공원이 될 것이다. ‘망우(忘憂)’는 단순히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 있지만, 그에 머물지 않고 ‘깨달음을 얻어 즐거이 근심을 잊는다'는 ‘낙이망우(樂而忘憂)’를 하게 될 장소

라고 하였다. 애국지사 안내에 삼학병이라는 인물을 살펴보니, 3기의 봉분이 있고, 성함은 김명근, 박진동, 김성익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유에서 개인의 이름 대신 삼학병이라고 칭했는지 궁금하였다. 망우 역사공원에 전화하여 ‘삼학병’사건을 알게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그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였다.

광복 후, 좌우 대립이 심한 상황에서 1946년 1월 19일에 일어난 ‘학병동맹사건’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희생당한 3인이라고 한다. 이들의 비석에는 ‘조국을 위하여 죽다.’라고 쓰여 있다.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많은 지사는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의견들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학병들이었다.

우리는 지금 선열들이 염려하던 그 한가운데에서, 양날의 검을 쥐고 있는 불행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 21인의 애국지사들의 혼이 묻힌 곳

유관순(1902~1920). 삼학병(김명근, 박진동, 김성익 ~1946). 이영학(1904~1955). 김봉성(1901~1945). 안창호(1878~1938). 유상규(1897~1936). 문명훤(1892~1953). 오세창(1864~1953). 문일평(1888~1939). 박원희(1898~1928). 서병호(1885~1972). 한용운(1879~1994). 오기만(1905~1937). 이탁(1898~1967). 서광조(1897~1964). 박찬익(1884~1949). 김승민(1872~1931). 서동일(1893~1965). 오재영(1897~1948).

▷ 삶의 양분과 같은 15인의 문화예술인

강소천(1915~1963). 권진규(1922~1973). 김상용(1902~1951). 이인성(1912~1950). 방정환(1899~1931). 최신복(1906~1945). 김이석(1914~1964). 함세덕(1915~1950). 노필(1927~1966). 차중락(1942~1968). 계용묵(1904~1961). 최학송(1901~1932). 이중섭(1916~1956). 송석하(1904~1948). 박인환(1926~1956)

▷ 18인의 사회인사

김호직(1905~1959). 지석영(1855~1935). 오긍선(1878~1963). 이영준(1896~1968). 박승빈(1880~1940). 박희도(1889~1952). 설태희(1875~1940). 설의식(1900~1954). 안봉익(1910~1957). 박은혜(1904~1963). 장덕수(1894~1947). 조봉암(1898~1959). 이광래(1908~1968). 이병홍(1891~1955). 이영민(1905~1954). 양천허씨 허어금(근현대 어머니의 표상).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명온공주와 부마 김현근.

▷ 3인의 기타 인사들

김말봉(1901~1962).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이경숙(1924~1953).

망우리공동묘지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정한 묘지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20년대 공동묘지 조성을 위해 경성부는 서울의 동서남북(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수철리)에 부립 공동묘지를 설치했다. 서울 동서남북에 있던 공동묘지의 터가 부족해지자 망우리 일대의 임야 75만 평을 매입하고 그중 52만 평을 묘역으로 조성하도록 하였다.

1933년 6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전쟁 당시 가매장된 시신이 시내에 묻혀있었고, 그 시신을 망우리 공동묘지에 이장하였다.

(망우리 사잇길.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망우리 사잇길.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망우역사공원에는 인문학 길과 사잇길이 있는데, 우리는 사잇길을 걷기로 했다. 역사적 인물과 우리 사이, 사잇길에서 한 분 한 분 만나는 시간이다. 그 길에 윤재훈 선생님의 설명이 있고 동기들과 함께했다.

(박인환의 묘 앞.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박인환의 묘 앞.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처음으로 만난 분은 시인 박인환이다. 생전의 멋진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우리를 맞이한다. 그는 친구와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낭만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해방 직후 중퇴하고, 종로 낙원동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개업한다.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한 후,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 들’, ‘지하실’, ‘남풍’, ‘벽’ 등의 작품을 남긴다. 육군 소속 종군기자로 활동 후, 대한해운공사의 상선으로 미국 출장 겸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을 마친 후 ‘19일간의 아메리카’라는 기행문을 조선일보에 기고한다.

박인환은 1956년 이상의 기일을 맞이하여 그를 기리는 시 '죽은 아폴론'을 썼다. 그 시에는 이상의 기일이 3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상의 기일은 4월 17일이다. 이 시가 그의 유작이 된다.

오늘은 3월 열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 시 이십오 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람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다.
이상이라고

- '죽은 아폴론' 박인환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이상’을 너무 사랑해 그의 20주기에 그를 추모한다며, 박인환은 제삿날 3일 전부터 폭음하였다, 그의 사인은 급성 알코올 중독성 심장마비로 판명되었다. 그이 나이 31세였다. 당시 언론은 ‘이상이 시인을 천국으로 초대했다.’라고 보도를 했다. 그의 삶을 잘 설명하는 글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강계순은 ‘박인환 평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례식 날, 많은 문우와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에는 수많은 친구와 선배들이 따랐고, 그의 관 속에, 생시에 박인환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고 흙을 덮었다.

우리 일행은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고 ‘세월이 가면’을 노래 부르며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고, 짧은 생에 아쉬워했다. 또한 그는 가까웠던 친구 김수영 시인과 많은 불화를 겪었으며, 김수영이 혹평했던 ‘박인환’이라는 수필이 지금이 많이 회자하곤 한다.

이중섭의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이중섭의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비탈진 곳을 150여m 내려가니 잘 다듬어진 이중섭의 묘가 나타난다. 묘를 처음 분양할 당시 1~5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묘는 등외지 같이 움푹 파여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직은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니 꽃이 꽂혀있는 그의 묘비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운 두 아들을 조그만 원안에 조각하고 그 아래 꽃을 꽂을 수 있게 작은 공간을 마련한 조각가 차근호, 저승에서라도 외롭지 않도록 마음 씀이 느껴진다. 여기에 꽂힌 생화는 망우공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기억봉사단’의 작품 활동이라고 한다. 참 고맙고 귀한 손길들이다.

그는 특히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여 온종일 소만 바라보았다고 한다. 학창시절에 미술을 전공하며 대회에도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입선을 한다. 같은 학교 후배인 일본 여학생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여 아들 3형제를 둔다. 후에, 남쪽에서 온 적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의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아내에게 지어 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남한으로 피난을 온다. 생계가 막막한 그의 가족은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생활은 궁핍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장인의 부고를 접하고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가려 하였으나, 전쟁 중이었기에 이중섭의 동행은 어려웠다. 1년 후 친구의 도움으로 1주일 동안 단기체류증을 얻게 되어 가족을 함께 보낼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이었다.

이중섭은 일본으로 돌아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 소, 게, 복숭아, 새 등을 소재로 다수의 그림을 그렸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재료를 구할 비용이 없어 담배 은박지나 엽서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영양실조와 정신병 등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사망 후, 그의 작품은 일반인들에게 인정받으며 유작전이 개최되고, 여러 화랑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생을 다루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훈장이 추서되며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중랑구는 해마다 이중섭 미술대회를 열고 화백의 예술혼을 이어받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외로움과 가난으로 이어진 생전의 삶을 보상받는 듯, 아늑한 곳에서 평화로워 보인다.

한용운의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한용운의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 ‘복종’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시인이며 독립운동을 한 스님이다. 1930년대 후반기에는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의 소설을 발표한다. 용운은 출가하면서 얻은 법명이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에서 그가 지칭하는 ‘님’은 부처님이며 조국이고 여인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시인의 활달한 상상력 앞에 이렇게 무지하다니’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까지 막아버려 시가 규격화가 되고 일반인들에게서 멀어지는, 그런 불행한 모습까지 와 버렸다. 대한민국의 답답하고 잘못된 교육 현실을 보는 듯하다. 전편에 흐르는 그의 시에는 ‘님’에 대한 순종과 절개가 잘 드러나 있는 듯하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국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한용운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3년을 복역한 후 출소하여 ‘님의 침묵’을 출판하고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또 한국 불교계의 항일단체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을 간추려 ‘불교대전’을 간행하였고 불교 잡지‘유심’을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며 선진국이 되려면 적어도 인구가 1억 명은 되어야 한다면서 ‘대처승’을 주장하였다. 그 자신도 출가 전에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두고 이혼하였다. 출가 후 재혼하여 딸을 두었고, 후에 ‘심우장’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한용운의 묘소는, 부부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어 다정해 보인다. ‘기억봉사단’의 고운 손길들이 연꽃과 나리꽃을 꽂아 놓았다. 특히 연꽃에는 밤이면 빛을 발하는 기능도 있어 지금까지도 애국지사의 밤낮 없었던 나라 사랑이 이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선생님의 음성으로 전하는 ‘알 수 없어요’를 들으며 그의 빛과 소리와 향기까지 느껴보았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키타현의 대관 영림서에 근무하던 중 형의 권유로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의 임업 기사로 일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 근무하며 당시에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고안해, 소나무의 양묘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했다. 경기도 광릉수목원도 그의 손길을 거쳤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의 소나무도 그가 옮겨 심었다.

다쿠미는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조선의 문물을 접하고 도자기와 소반에 관심을 둔다. 그는 ‘조선의 소반(1929)과 조선도자명고(1931)’를 발간했는데, 한국에는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 후 다쿠미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의 민예품과 미술품들을 수집하여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일본 문예 부흥의 중심인물로, 일본에서 조선의 민예품을 이론적으로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조선민족미술관은 광복 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해방 이후 수집품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시 많은 일본 학자는 한국의 불안한 정세와 미성숙한 학문성을 신용하지 못하겠다며 대부분 연구물 들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야나기 무네요시는 평소 조선을 사랑하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뜻에 따라, 자신들이 수집한 물품 3,000여 점 전부를 한국 정부에 기증하였다. 이렇게 받은 물품들은 한국 연구가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다쿠미는 1931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는 죽기 전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경기도 이문리에 묻혔다가 1942년 망우리 공원으로 이장되어 조선의 흙이 되었다.

다쿠미는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라며 어려움에 놓인 조선인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력했던 고마운 일본사람이다.

나는 30대 후반에, 지인의 초청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다. 내 조국을 점령하고 선조들을 고문하며 우리에게 패배의식을 심어 준 일본에 반감을 품었었다. 처음 방문한  곳을 어떠한 이유로든 트집 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하는 료칸은 흠을 잡기가 어려웠다. 함부로 하기에는 오히려 수준 낮은 한국인이라는 비난이 돌아올까 염려되어 더욱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차오르는 울화를 해소해야만 했기에, ‘전 지구를 위해서는 이러면 안 되지만’이라는 생각하면서도, 숙소에 있는 화장지를 마구 뜯어서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나는 왜 이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가? 정치적 욕망 이전에 인간적인 개인의 양심을 갖춘 사람, 조선의 예술적 경지를 높인 사람, 편견을 갖지 않고 인간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사람이라 여겨져 나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존경하며 감사한다.

유관순 열사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유관순 열사 묘. 촬영=이순자 여행작가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영원한 누나 유관순을 만나러 가는 길, 안내표지판에 ‘이태원 합장비(유관순 열사)’라고 쓰여있다. 1920년 9월 28일, 17세의 나이로 옥사한 후 10월 14일에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르고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었다. 후에 일본군은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사전 통보도 없이 무덤을 무질서하게 파헤치는 바람에 유관순 열사의 유골이 분실되었다. 뒤늦게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있던 유골들을 모아 이곳에 합장한 것이다.

 유관순열상에게 쓴 학생들의 편지. 촬영=윤재훈 기자
 유관순열상에게 쓴 학생들의 편지. 촬영=윤재훈 기자

데크 길을 따라가니 곧 있을 3.1 절을 맞이하여 초, 중학생들이 유관순 열사에게 쓴 편지를 전시하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굳은 마음과 무서운 고문에도 굽히지 않는 결심을 배우고 본받겠다는 다짐의 내용이다. 열사님 덕분에 독립을 하게 되었고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도록 잘 지켜 내겠다는 내용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겠으니 이제는 그곳에서 편히 지켜보시라는 내용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때에 3.1운동을 맞이한다.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한 교장 선생은 휴교령을 내리고,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가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한다. 이 만세 운동 중 부모는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5년 형을 구형받았으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한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옥중에서 일본군의 다양한 회유에도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1972년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고, 생가 옆의 매봉교회에서는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지고, 1985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는 1996년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삶을 만나며 국가의 힘이 국민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본다.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할 나이에 국가를 염려하고 생명을 잃는다는 것,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다. ‘반드시’라는 단어는 기어이 빼겠다. 국민을 염려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대한민국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의 탐방을 마치며, 짧은 시간으로 많은 분을 만나 뵙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국민으로서 나라를 사랑하고 책임감 있는 마음가짐과 실천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기억봉사단’의 귀한 손길에 감사함을 전한다. 선열들께 존경심과 자랑스러움과 먹먹함이 느껴지는 경건한 시간이었다.

오늘 좋은 시와 노래와 말씀으로 이끌어주신 윤재훈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동기들의 추위를 해결해 준 반장님과 카페 사장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맛난 쌈밥집을 안내해 준 반장님, 영원한 반장님으로 임명합니다. 짝! 짝!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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