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운식은 새벽녘에 구들장을 등에 지고 누워 늘 하던 버릇대로 손가락 마디마디를 주무르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왼쪽 약지쪽이 허전했다. 27년째 끼고 있던 금반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워매! 요것이 뭔일이여?' 순간 운식은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 후래시를 켜서 왼손을 살펴보니 정말로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운식은 반 미치갱이가 되었다. 날이 채 밝지 않은 방과 거실 화장실 등불이란 등불을 죄다 켜면서 새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얼릉 좀 일어나보랑께. 아직도 안 일어나고 자빠져 있는가!" 경기도 군포 변두리 반지
차미란은 윤해원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취하던 주인집 딸이었다. 하얀 칼라 깃을 단 검은 교복을 입고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아 묶은 미란이 누나는 어쩌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여름방학이 가까이 다가오자 미란이의 방 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책상이 놓여 있었으나 고3인 미란이가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꿈을 꾸는 듯 마당에 나와 수돗가에 핀 선홍색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윤해원은 서울 P대학을 마치고
윤항구(70)는 모처럼 아침 일찍 읍내 농협에서 운영하는 파머스마켓에 들렀다. 마침 개장 직전이라 직원들이 줄을 서서 구호를 외친다.고객은 왕이다!우리는 신하다!진강농협 파이팅!!!윤항구는 그 구호에 가슴이 뭉클하다. 칠십 평생 무지렁이로 살다가 난생 처음 임금이 되려나 보다고.곧죽어도 파머스마켓인디 서울 명동 백화점보다 못할소냐! 없어야할 것 빼놓고는 다 있는 것 같았다. 항구는 마켓에서도 늘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다. '열다섯에 고향 떠나 서울 신당동 영등포 로타리 대방동 천호동을 전전하면서 인생을 여러 번 탕진하다가 강남 신
강창석(姜昌石)은 평생 시골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십수년 전에 나이가 다 되었다고 그 일을 그만두고 오징어 귀떼기만한 작은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이에게도 못다꾼 꿈들이 왜 없겠느냐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강노인은 세상으로부터 소박을 맞을까봐 고심하지도 누가 불러주지 않는다고 투덜대지도 않는 성미가 아닌가.봄비는 하릴없이 내리고 앵두꽃이 바람에 날리는 날 강노인은 막걸리 한 사발 앞에 두고 추억에 잠긴다. 월출산 아래 국민학교에 꿈처럼 아득한 봄아지랭이 피어오르던 날, 창석의 짝꿍 한묘순(韓妙順)이 무
황노인은 팔순을 맞아 유럽여행을 시켜주겠다는 자식들의 갸륵한 뜻도 물리치고 남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50여년 전,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별뫼국민학교 초임 발령장을 받고 내려가던 설레임처럼 초봄의 햇살이 황노인의 얼굴에 어린다.일부 능선을 오르는 산등성이 길은 황토흙 대신 포장이 깔려 있었으나 물과 뭍이 서로의 발을 밟고선 리아시스식 해안의 모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황노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먼발치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별뫼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성산자동차학원 표지판만이 바닷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독고영(獨孤永)은 정년퇴직 후 G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마련한 '탐진강 글쓰기교실'에 푸른다슬기라는 아이디로 참여하게 되었다. 독고영은 초등시절 방학숙제로 일기 몇 번 써본 것 외에는 숫제 글쓰기라는 낱말도 생소할 지경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상 주변의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진솔하게 서술하면 된다는 글쓰기 강사의 말에 용기를 얻었고 이러저러한 글을 써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도 하였다.홀아비 신세로 산 지 어언 3년이 되어가는 어느 날 독고씨는 파머스마켓 반찬코너에서 사온 멸치볶음을 아침 밥상에 올리는 순
-1-한덕구는 70 평생 '옛이나 지금이나'의 섬마을 고금도를 떠난 적이 없었으나 칠순을 맞아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난생처음 홀로 '해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검붉은 우뭇가사리 채취로 잔뼈를 키워왔으나 세월의 골다공이 그이의 뼈마디에도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런가. 짐을 싸는 덕구의 허리가 잠시 흔들린다.노 젖는 뱃사공은 어디로 갔을까, 고금도 가교리에서 마량포구에 이르는 통통배도 보이지 않고, 회한에 젖은 덕구는 버스에 몸을 싣고 꿈길 같
오만상씨(70)는 오만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서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인생 칠십이면 종쳐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돌아보니 좋았던 기억보다 험난했던 나날의 숫자가 훨씬 많지 않았던가.하지만 막걸리통 배달과 나무도장 파기와 중학교의 문서 필경사와 교문 수위 생활은 그나마 그이를 지탱해준 고마운 이력이었다. 그에 비하면 만상씨의 부인 띠동갑 황난애(58) 여사의 내력은 그닥 난해하지 않았다. S중학교 근방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으로 어릴 적부터 동네를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안달식(70)은 늙으막에 G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마련한 무료 유튜브 제작 강습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뭐 별로 눈에 띄는 콘텐츠도 없는 황망례 할머니와 손녀가 만든 유튜브 채널이 구독자가 100만명에 달하고 한 달 수입이 수천만 원이 넘는다는, 강사의 설명을 들은 날부터 달식에겐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내가 인생을 헛살았어. 오냐 좋다! 나도 너튜븐가 물놀이용 튜븐가 맹글어서 돈 좀 벌어보자!"달식은 혼자 된 지 꽤 된 마당이라 동영상을 함께 찍고 노닥거려줄 환상의 콤비를 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몇날 며칠
K시에 사는 Y씨(63세)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하나같이 뭐 찢어지게 가난하던 어린 시절, 눈만 뜨면 들로 산으로 함께 싸돌던 불알친구들 아니던가!서울 강남 신사동에서 수십 년 만에 만난 동무들은 어릴 적 땟국에 절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모두 개기름이 잘잘 흘렀고 큰 차들을 끌고 나타났다. 정말 서울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 생각하며 꿈에도 그리던 녀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옛날로 돌아가 '불타는 까망돈' 삽겹살집에서 왁자지껄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Y씨는 비록 K시 대왕시장통 한켠에서
Z씨는 이제 70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이니만큼 기억력도 옛날만 못한 것 같아 티비에서 알려주는 각종 뉴스와 정보를 잊어먹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티비 자막을 수놓는 영문으로 된 각종 용어들은 영문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났다.며칠 전에도 대한노인회 G군 지회 노인놀이방에서 옆 마을 김영감에게 LTV를 '쌍방향 디지털 TV'라고 우기다가 그것이 정작 주택담보대출 약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스타일을 팍 구긴 사건 이후로 한동안 티비시청을 기피하였고 TV라는 글자만 봐도 기함할
Y씨는 J고등학교 교문 경비실 근무 30년만에 퇴직을 하고 시골로 내려와 텃밭을 가꾸며 지내온 지 삼년째 되어간다.늘 꿈에도 그리던 고향집인지라 나날이 추억과 감동으로 점철되었으나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히는 수풀모기는 짓이기고 싶도록 미웠다. 시커먼 몸뚱이에 흰 줄이 서네 개 처진 그놈은 Y씨와 눈을 마주쳤다 하면 이미 늙은이의 몸뚱아리에서 한 홉 가량 흡혈을 하고 난 뒤였다."내 피를 뽈아묵어봤자 넌 문족지혈(蚊足之血)이다 작껏! 내 평생 참을성 하나로 버텨왔는디 뭐."Y씨는 매번 이렇게 다짐을 하며 하루하루를 매진하
G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마련한 3개월짜리 어린이한자 공부방 훈장인 윤항구(75세)옹은 농협에서 운영하는 파머스마켓에 모처럼 들렀다. 윤 훈장은 마켓 문을 들어서며 그곳을 농부장터라고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여그서 전지 살 수 있어요?""예 어르신. 저기 가정용 소모품 코너에 있어요."윤항구 노인은 왜 그걸 하필 소모품 진열장에 갖다 놓았을꼬, 투덜대면서 그곳에 다가갔다."여보씨요. 전지가 없는디?""바로 그 앞에 있잖아요.""워디?"마켓 직원은 살짝 짜증난 얼굴을 하고는 직접 배터리를 집어서 윤 노인에게 건넨다."아니! 나더러
자동차 있는 분들1대당 80만원 줍니다.빨리 확인하세요!!!Y씨(70세)는 정년퇴직 후 고향집 골방에 누워 알뜰한 알뜰폰에 구렁이알처럼 사랑스러운 모바일 데이터를 아끼고 아껴가면서 근근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봄날 Y씨는 눈이 번쩍 뜨이는 너(you)튜브 제목을 하나 만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은 Y씨는 제목 마지막 줄에 힘차게 찍힌 3개의 느낌표가 좌심방을 콕콕 찔러대는 느낌이었다.하지만 Y씨는 100만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브 '시니어전성시대'를 진행하는 아줌마의 설명을 서너 차례 연
K광역시 남구에 사는 Y씨(70세)는 모바일 문자를 받고 가슴이 덜컹거렸다."귀하께서는 우수고객으로이번 봄맞이랜덤 추첨행사에서당첨되셨습니다.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세상에 당첨이 웬 말이냐! 돌아보면 평생 거의 꽝 인생이 아니었던가. Y씨는 당첨이라는 글자에 자못 흥분이 되었다."그런디 랜덤이 뭐여?"Y씨는 문자를 보낸 P사의 전화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거그 요구르트 맹그는 곳 맞는가요?""네. 고객님! 무슨 일이신가요?""지가요, 문자를 하나 받었는디, 뭔 랜덤을 추첨했다고요잉?""아. 그거요. 랜덤을 추첨한 게 아니구요.
모든 방송사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휴월(虧月) 윤해원(尹海遠 70) 선생이 현장에서 체포되는 장면을 뉴스속보로 전하고 있었다.그날도 휴월선생은 ‘눈물의 사회적 가치’라는 주제로 강연을 마치고 강연장을 막 나서는 중이었다."당신은 독안에 든 쥐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빨리 손들고 나오라!"경찰청 기동타격대 차량 위에 설치된 엠프에서는 계속 자수 권유 방송이 흘러나왔다. 휴월선생이 유유히 걸어 나오자 강연장 입구에서 바리케이드를 쳐놓
황무진씨(69세)는 온갖 험한 일을 하면서 참 잘 버텨오다가 늘그막에 얻은 손자 돌잔치를 맞이하게 되어 감격에 겨웠다.아들내미도 비록 좋은 학교는 보내지 못했어도 지금은 어엿한 중소기업 사장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딱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돌잔치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조명등은 방송국 드라마 세트장보다 으리번쩍했고 이벤트 사회자의 말솜씨는 좌중을 휘어잡는 것을 넘어 구사되는 미사여구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돌잔치의 주인공과 엄마, 아빠, 그리고 하객들 또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자, 하객 여러분! 이제 가장 중요한
윤시달(尹時達)씨는 반지하방 구석에 놓인 화장지 겉면의 선전 문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잘 풀리는 집'이라고라? 감었으니께 풀리겄제, 뭔놈의 그것도 광고라고 참.생각이 워낙 많은 위인인 윤시달은 지난 해 11월 수능 며칠 전 일이 생각난다. 수능을 치는 옆집 고3 아이에게 문제를 잘 풀라고 잘 풀리는 화장지를 갖다 주었다는 아내의 자랑에, 늘그막에 무슨 요즘 아그들 식 이벤트를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던 것.시달씨야 타고나기를 워낙 선물에는 취약한 체질이어서 60평생 누구에게 이렇다 할 선물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주
Y씨는 골방 천정이 닿을 정도로 쌓여있는 농구공들을 바라보자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Y씨는 평생을 농구공 제조업체에서 잔뼈가 굵었으나 그놈의 코로나가 웬수지, 각종 농구경기도 덩달아 시들해지고 농구공이 잘 팔리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나이순으로 희망퇴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해외수출에 공헌하여 무역의 날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농구공 제조업체 (주)하이바스키코리아는 퇴직자들에게 기념으로 농구공을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하곤 한다. 사장이 워낙 농구를 좋아한 이유도 있으나 그럴싸한 영문으로 된 회사 이름 치고는 매우 영세한
Y씨는 어릴 적부터 개를 워낙 좋아해서 정년퇴직 후에도 개만 보면 어쩔 줄 몰라 한다. 뿐만 아니라 복날이면 곧잘 듣게 되는 "개 혀?"라는 사투리식 우스갯소리도 세상에서 제일 못돼먹은 막말로 생각할 정도다.그러던 어느 봄날, Y씨는 우연히 이모작투모로라는 인터넷매체에서 "반려동물 전문가. 치매예방 지도사 양성과정"이라는 광고를 접하고 반색을 했다."하기사 동물도 치매가 올 수 있겄제잉. 반려동물 치매예방 지도사라고? 요것이야말로 나한테 딱 맞는 일이구먼 흐흐."곧바로 Y씨는 광고에 적힌 안내전화를 돌렸다."에또~. 그곳이 페트 스